조선인이 부러워한 하멜의 흰 피부와 백색 튼살치료

in kr •  7 years ago 

조선인이 부러워한 하멜의 흰 피부와 백색 튼살치료

제주도에서 이들 일행이 마음을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를 만난 것이 한 계기가 되었다. 17세기 초반 동인도 회사의 선박을 타고 항해하다 우연히 제주도에 내려 발이 묶였던 벨테브레이는 박연이란 이름으로 개명한 후 조선의 군인으로 정착해서 살고 있었다. 하멜이 도착하자 조선에서는 그를 내려 보내 이들을 조사하게 했던 것이다.
하멜 일행은 말이 통하는 같은 네덜란드인이 조선에 산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고 또 안심하기도 했다. 박연 또한 이들을 만나면서 엄청난 감회에 사로잡혔다. 하멜의 표류기에는 처음 박연의 반응이 어떠했던가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목사 이익태(재임 1694~1696)가 작성한 『지영록』에는 “박연과 표착한 세 사람이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다가 ‘나와 형제 같은 사람이다’ 하고는 서로 슬피 울었고, 박연 또한 울었다”고 적고 있다.
18세기 말, 고위 관직을 역임한 윤행임이란 인물이 작성한 글에 따르면 박연이 그들[하멜 일당]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에 “자기 옷깃이 다 젖을 때까지 울었다”(『석재고(碩齋攷)』)고 한다. 고국으로부터 수만 리 떨어진 이교도(異敎徒)의 나라에서 동향 사람을 만나는 심정은 하멜 일행이나 박연이나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목사 이원진의 호의적인 배려 또한 이들이 심리적으로 안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1651년(효종 2)에 제주목사로 내려와 3년의 임기가 다 끝나가는 시점에 하멜 일행을 만났던 이원진은 매우 우호적으로 이들을 대했다. 될 수 있는 한 먹을 것을 풍부하게 제공하고 부상자를 치료했으며, 숙소에서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게 했고, 일본으로 살아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이와 함께 그는 서울로 떠날 때에 하멜 일행의 겨울 채비가 시원하지 못한 것을 보고 한 사람당 신 두 켤레, 두툼한 외투 한 벌, 가죽버선 한 켤레씩을 만들어주며 추위를 견디게 했다. 또 자기 마음대로 그들을 일본에 보내주거나 혹은 함께 본토로 데려가지 못하는 것을 매우 섭섭하게 여기고, 조정에서 이들을 해방시켜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서울로 불러올리도록 자신이 있는 힘을 다 쏟겠다고 했다.
이들이 서울로 올라오기 전 목사 임기가 끝났기에 이원진의 배려를 더는 받을 수 없었지만, 하멜은 그에 대해 “목사는 우리가 보기에 이해심이 매우 깊고 견식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 소신이 틀림없음을 누차 경험하였다. 그는 올해 70세로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명망이 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신자에게서 받는 대우보다 이 이교도에게서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고까지 기록했다. 이원진이 이들에게 심어준 인상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원진은 명문 여주 이씨가의 일원으로 가문으로 보나 학식으로 보아 당대 그 누구하고도 비길 데 없는 인물이었는데, 인품 또한 훌륭했던 것이다. 이원진은 유형원의 외삼촌으로 그를 가르치기도 했으며, 성호 이익에게 5촌숙이 된다. 하멜의 기록이 유럽에 퍼졌을 때, 유럽 사람들은 아마도 이원진이 베푼 인정어린 행동을 보고 조선과 조선인의 문화 수준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느꼈을 것이다.

가혹한 노동과 이국인에 대한 두려움 vs 조선 사람의 따뜻한 인심

하멜 일행이 조선에서 보낸 13여 년의 세월은 길고 긴 여정으로 점철되었다. 이들은 제주도에서 8개월을 체류한 뒤, 서울로 옮겨와 그곳에서 2년을 보내고 이어서 전라도 해안 지역으로 내려가 10여 년을 살았다. 이들은 이 기간 동안 국왕 호위부대에 소속되어 군인으로 지내기도 했고, 개인 주택을 구입하여 독립된 생활을 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표류해온 외국인으로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항상 국가의 감독과 관리를 받으며 부자유스럽게 지냈다. 전라도 해안에서 배를 구입해 일본으로 몰래 탈출해야 했던 것도 그런 생활이 한 계기가 되었다.
하멜 일행이 제주도를 떠나 서울(원문에는 sior로 표기되어 있음. 당시 조선에서는 한성보다는 서울이라는 이름을 더 흔히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임)로 출발한 것은 1654년 6월이었다. 이들이 제주도에 표착한 뒤, 조선 조정에서는 긴 논의 끝에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군인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들이 화포(火砲)를 잘 쏘는 것으로 판단한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제주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오게 했던 것이다.
제주에서 서울로의 이동은 조선에서의 첫 여정이었다. 제주도에서 해남으로 온 이들은 영암을 거쳐 나주, 장성, 정읍, 태인, 금구, 전주, 여산, 은진, 공주 지역을 지나 서울로 들어왔다. 이들이 이동한 경로는 전라도-충청도-서울로 이어지는 최단거리의 길이었는데, 이들은 말을 타고 매우 빠른 속도로 서울로 들어왔다. 17세기에 간행된 『고사촬요(攷事撮要)』에 따르면 제주에서 서울까지는 11일 반, 해남에서 서울까지는 11일이 걸렸다고 한다. 아마도 이들 역시 이 정도 시간을 들이며 이동했을 것이다. 서울로 들어온 이후 이들은 국왕을 만나고 국왕 호위부대에 배속되었으며, 조선식 이름과 직역이 새겨진 호패(號牌)를 발급받았다. 이제 조선의 군인으로서 매달 일정한 급료를 받으며 안정적으로 생활할 여건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조선에서 하멜 일행에게 지어준 조선식 이름은 하멜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1655년(효종 6) 4월 25일의 실록에 이들 일행 중 “남북산(南北山)이라는 이가 청나라 사신을 만나려고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남씨 성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 자는 네덜란드인을 남만국(南蠻國)에서 온 사람으로 보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조선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인정이 베풀어졌다. 서울 사람들은 이전에 박연과 같은 사람을 보기도 했겠지만, 네덜란드인의 특이한 용모,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굉장한 호기심을 보였다. 그랬기에 하멜 일행은 초기에는 매일 고관들의 부름에 응하여 그 가족들과 만나야 했다. ‘하멜 일행은 생김새가 사람보다는 괴물처럼 생겼다’거나 ‘음료를 마실 때에는 코를 귀 뒤로 돌린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고관의 가족들이 이를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네덜란드인들을 만나본 조선 사람들은 이들을 신기해하며 우호적으로 대했다. 하멜은 “대부분의 조선인은 우리가 못생겼다고 여기지 않고 우리의 흰 피부를 부러워했다”고 적고 있다. 세상에 보지 못한 하얀 피부에 조선 사람들은 선망의 마음이 들었을까? 이들은 이 무렵 조선말을 익혀 쉬운 대화는 능히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던 듯하다. 제주도 시절부터 조금씩 조선말로 소통할 수 있었지만, 서울 생활을 하면서는 조선말 실력이 더 늘었던 것이다.
하멜 일행의 서울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청나라 사신에게 이들의 존재가 알려질 것을 매우 두려워했던 조정에서 이들을 지방으로 내려 보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렇게 되었던 것은 이들 가운데 일등 항해사 헨드릭 얀서와 또 한 사람이 조선에 왔던 청나라 사신에게 찾아가 그들이 체류하고 있던 사정을 알리는 돌발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1655년 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앞서 실록에 나온 남북산의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조선에 온 외국인을 청에 알리지 않고 국왕의 호위군사로 두었다는 사실 자체가 크게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사안이었다. 정부에서는 청의 사신에게 뇌물을 써서 이 일을 무마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든 이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후 청나라 사신이 여러 차례 조선을 왔다 가자, 조정에서는 이들을 죽이자는 둥 여러 의견을 내며 갑론을박을 벌였고, 결국 전라도 강진의 병영으로 내려가서 살게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서울 생활은 이렇게 해서 끝이 났다.
서울을 떠난 것은 1656년 3월이었다. 이때 남아 있던 일행은 33명이었다. 한 명은 예전 제주도에서 해남으로 올 때 병사했고, 두 명은 서울에서 청나라 사신을 만났다가 구금된 뒤 사망한 터였다. 일행은 한강 가에서 박연 및 몇몇 친한 사람과 작별하고 제주에서 올라오던 길을 되짚어서 목적지 강진으로 내려갔다. 박연과의 이별 장면은 매우 건조하게 서술되어 있다.

1653년 3월 초 우리는 말을 타고 서울을 떠났다. 서울에서 1마일 정도 떨어져 있던 강까지 벨테브레이와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 몇 명이 동행했다. 우리가 나룻배에 몸을 실었을 때, 벨테브레이는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그것이 벨테브레이를 본 마지막이었고, 다시는 그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강진에서의 생활은 1656년 봄부터 1662년까지 6~7년간 지속되었다. 병영에 머무는 동안 이들은 여러 명의 병사(兵使)를 만났다. 병사마다 이들을 대우하는 방식은 현저하게 차이가 있었는데 땔감 채취, 마당의 풀 뽑기 등의 강도 높은 노동을 강요하며 가혹하게 대우하거나, 느슨하게 방임해두거나, 아니면 엄격하게 통제하기도 했다.

규장각 교양총서 6 세상 사람의 조선여행,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엮음 김수진 책임기획, 글항아리, 페이지 110-118
Klimt Friedericke Maria Beer, 1916, oil on canvas, Collectio.jpg
하멜표류기등을 보면 정말 한국인은 구경을 좋아한다. 하멜 일행은 1654년 6월 서울로 이송돼 훈련도감에서 병사로 생활했다. 이들은 낯선 생김새 때문에 늘 놀림을 당했다, 지체 높은 고관들의 집에 불려가 구경거리가 됐다.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관심과 관찰의 대상이 되었다.
특이한 점은 하멜이 못생겼다고 여기지 않고 우리의 흰 피부를 부러워했다고 했는데 현재에도 미백 화장품이 인기이다. 그 이유는 농사등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귀족들은 태양을 피하니 흰피부가 될 수 밖에 없고 이 창백한 피부가 신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부에 군데군데 흰색인 백반증이 생기거나 흰색 튼살이 있다면 매우 낭패가 아닐수 없다.
이런 흰색 튼살은 www.imagediet.co.kr 자향미 한의원의 튼살침인 ST침으로 치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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