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4세(프랑스어: Henri IV de France, 1553년 12월 13일 - 1610년 5월 14일)는 프랑스와 나바르 왕국의 왕으로, 카페 왕조의 분가인 부르봉 왕가 최초의 왕이다. 위그노들의 수장으로서 당시 프랑스 내의 많은 종교 전쟁을 지휘했고, 1589년 프랑스 왕위에 오른 뒤에는 믿음의 자유를 부여하는 낭트 칙령을 반포하여 내전을 종식시킨 뒤 프랑스의 발전을 이끌었다. 재위 당시 성군으로서 국민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나 1610년 파리 시에서 로마 가톨릭 교인의 손에 암살당하였다. 그는 1610년 살해될 때까지 20차례 이상 암살 기도에 시달렸고 그때마다 예수회의 관련성이 끊임 없이 거론되었다. 특히 1594년 예수회 콜레주 학생 장 샤스텔의 암살 기도 후 예수회는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앙리 4세는 훌륭한 업적으로 앙리 대왕(Henri le Grand) 혹은 선량왕 앙리(le bon roi Henri)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지만 평생 50명이 넘는 정부를 거느려 팔팔한 오입쟁이(le Vert galant)라는 별명 또한 얻기도 하였다.
앙리 4세는 1572년 8월 18일 프랑스 국왕 샤를 9세의 누이동생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결혼하였다. 개신교 신자인 신랑과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인 신부의 결혼은 왕국 내 종교적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왕실 차원에서의 노력으로 받아들여졌지만,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사건이 터지면서 오히려 내전은 심해졌다. 실제로 불분명한 원인과 그 잔혹한 성격 때문에 이 사건은 프랑스 역사상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나 현재 사학자들은 개신교 세력의 우두머리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과 로마 가톨릭교회 세력의 중심인 왕의 모후 카트린느 드 메디치, 기즈 공작 앙리 드 기즈(Henri, duc de Guise) 사이의 분쟁이 불씨가 되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때 콜리니는 카트린느 드 메디치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급진적인 정치관과 독실한 개신교 신앙, 안팎으로 어려운 프랑스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진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촉구할 정도로 강경한 성품과 모후인 카트린느 드 메디치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은밀한 노력 등으로 카트린느 드 메디치와 관계가 틀어졌다. 또 가톨릭 세력의 수장인 기즈 가문을 혐오하여 한때 친구였던 전(前) 기즈 공작 프랑수아의 죽음을 사주했다는 의혹 탓에 프랑수아의 아들인 현 공작 앙리의 원한을 사고 있었다.
결국 콜리니는 학살이 시작됨과 동시에 기즈 공작의 수하들에 의해 살해당했으나 한번 폭발한 가톨릭교도들의 감정은 가라앉지 않았고, 왕실은 이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개신교 신자들 역시 살아남기 위해 대항하면서 파리에서만 수천 명이 죽었고, 간신히 죽음을 면한 앙리 드 나바라 또한 반 강제적으로 개신교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로 전향한 뒤 파리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1576년 탈출과 동시에 앙리 드 나바라는 잔존하고 있던 위그노 개신교도들과 합류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다시 프랑스 내에서는 내전이 시작되었다.
앙리 3세와 기즈 공작이 모두 죽은 뒤에도 로마 가톨릭교회 연맹은 위그노 개신교도인 앙리 4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에스파냐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프랑스 남부에서 맹위를 떨쳤다. 프랑스의 수도이자 로마 가톨릭교도들의 도시 중 하나인 파리 시 역시 앙리의 입성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앙리 4세는 유럽 개신교도들의 재정적, 정신적 지주였던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힘을 빌어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로마 가톨릭교회 연맹은 앙리 4세의 삼촌으로 부르봉 추기경인 샤를(Charles, the Cardinal de Bourbon)을 샤를 10세(Charles X)로서 내세웠으나 막상 추기경 자신은 앙리 4세의 포로인 신세여서 이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나마 늙은 추기경이 1590년 사망하자, 로마 가톨릭교회 연맹은 궁여지책으로 죽은 앙리 3세의 큰 누이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의 딸이자 펠리페 2세의 딸이기도 한 에스파냐의 공주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를 여왕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살리카 법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적국 에스파냐의 왕족을 새 왕으로 삼는다는 이러한 처사는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들 사이에서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 당파는 점점 약해지는 명분과 넓어지는 앙리 4세의 세력에 밀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수도 파리가 꿋꿋하게 버티며 위그노인 앙리의 입성을 거부하자, 안 그래도 그에게 평생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정부이자 가톨릭교도였던 가브리엘 데스트레에게 감화되어 있던 앙리는 1593년 “파리는 (개종해서라도) 미사를 거행할만한 가치가 있다(Paris vaut bien une messe)”는 선언과 함께 앞으로 영원히 개신교를 버릴 것을 다짐하고 다시 한 번 로마 가톨릭교회로 종교를 바꾸었다. 이 사건은 유럽 내 개신교 신자들과 그때까지 그의 강력한 재정적 지원자 중 한 명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나 이미 오랜 전쟁에 지쳐 있었던 파리 시민들을 비롯한 로마 가톨릭교회 연맹은 앙리 4세의 개종을 인정, 그를 왕으로 받아들임으로서 드디어 앙리 4세는 1594년 2월 27일 샤르트르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로 종교를 바꾼 뒤에도 그는 위그노들을 잊지 않고 개신교 신자에 대한 차별 금지법인 낭트 칙령을 반포함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마침내 내전을 종식시켰다.
또한 위그노이자 나바라 국왕 시절부터 그를 보필한 쉴리 공작 막시밀리앙 드 베튄(Maximilien de Bethune, duc de Sully)을 전격적으로 재상으로 기용해 오랜 전쟁으로 파산 상태였던 프랑스의 재정을 크게 개선시켰을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프랑스 사회를 발전시켰다. 지나치게 과중했던 농민들의 세 부담을 줄이는 대신 귀족들의 세 부담을 늘리고, 위그노들이 대부분이었던 프랑스의 상공업자들이 다시 생활 터전으로 돌아가면서 직물 산업, 유리 공업 등이 다시 발전했다. 재무, 농업, 토지 관리에 있어서의 쉴리 공작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도로망, 삼림, 운하 건설과 캐나다 퀘벡 주 개발 등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앙리 4세의 유명한 말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나는 왕국의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일요일이면 닭고기를 먹게 하겠다(Si Dieu me prête vie, je ferai qu’il n’y aura point de laboureur en mon royaume qui n’ait les moyens d’avoir le dimanche une poule dans son pot! )”는 현실이 되었다. 현대 프랑스에서 닭은 프랑스의 상징이기도 하다.
앙리 4세는 백성들로부터 앙리 대왕(Henri le Grand)이라는 칭송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밝고 유쾌한 성격이어서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종교적 문제로 항상 암살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낭트칙령으로 위그노에게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 것은 결정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원한을 사게되었다. 이후 그는 무려 17차례나 암살 위기를 겪어야 했다. 결국 1610년 5월 14일, 앙리 4세는 독일의 율리히 공작령 계승 문제를 두고 루돌프 2세와 개신교 제후들이 갈등을 보이자, 개신교 신도들을 도우면서 합스부르크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대규모 원정계획을 의논하기 위해 쉴리공작을 만나러 가다가, 넘쳐나는 마차들로 인해 정체상태였던 파리 시가지에서 광신적인 가톨릭교도 프랑수아 라바이약(François Ravaillac)에게 칼로 암살당했다. 왕비인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하는 가운데 그의 장남 루이 13세가 9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1610년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는 재무상인 쉴리 공작을 부르러 전령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앙리 4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쉴리에게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집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쉴리 공작이 질병에 걸리기 쉬운 상태가 되었으니 왕이 안전해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이었다. 장관이 샤워를 할때마다 국무회의를 취소하는 정치 지도자가 요즘에도 있을지 의문이다. 어쨌든 17세기 사람들이 물을 진심으로 믿지 못하고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화다.
프랑스인은 고도의 청결을 유지했던 선조들과 달리 유달리 목욕을 꺼리고 아마포를 선호했다. 앙리 4세의 아들인 루이 13세는 목욕을 기피하던 아버지의 선례를 따랐고 “나는 아버지를 닮아서 겨드랑이에 암내가 난다”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그레그 제너 지음, 서정아 옮김, 와이즈베리, 페이지 153
암내까지 자랑을 했지만 사실 냄새가 나는 사람은 많이 괴로워서 사회생활도 못하고 대중교통도 타지 못하게 된다. 현재는 액취증 수술이 있지만 또한 흉터 때문에 치료이후에 심적 괴로움이 가중될수 있다. 하지만 겨드랑이 액취증 수술 흉터침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또한 몸에 외과 수술적 흉터나 화상흉터, 교통사고 흉터, 기타 베이거나 긁힌 흉살이 있는 경우에도 목욕탕 가기가 어려운데 흉터를 치료하면 근심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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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ry I don't understand wat u write there but have been hearing about great Wall of China and is one of the beautiful thing I will love to see in thi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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