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폰일가의 폭발사고 사망과 화상흉터치료

in kr •  7 years ago 

죽음의 상인으로 시작한 듀폰
듀폰의 창업자 엘뢰테르 이레네 뒤퐁(Éleuthère Irénée du Pont, 1771~1834)은 파리의 시계 제조업자이자 중농주의 경제학자였던 피에르 사뮈엘 뒤퐁(Pierre Samuel du Pont de Nemours, 1739~1817)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피에르는 루이 16세 시절 재정총감 튀르고(Anne Robert Jacques Turgot)에게 발탁되어 자유주의적 경제 개혁을 이끌었지만 봉건귀족 세력의 반발로 해임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해임된 뒤 장원을 마련해 한가로운 은퇴생활을 하던 그에게 루이 16세는 프랑스가 후원한 미국의 독립을 영국이 외교적으로 승인하는 파리조약을 추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공로로 귀족 칭호를 받은 피에르는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등 미국 정치 지도자들과 친분을 맺었다. 엘뢰테르는 14세 때 이미 화약 제조에 관한 논문을 쓸 만큼 화학과 식물학에 조예가 깊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당시 가장 유명한 화학자인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의 제자 겸 동료로 일하며 폭발물 제조 기술을 익혔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 뒤퐁 부자가 운영하던 인쇄소가 폭도들에게 약탈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등 생명의 위협을 받자 뒤퐁 일가는 투자 명목으로 자금을 모아 미국 망명길에 나섰다.
갖은 고생 끝에 신천지에 도착했지만 뒤퐁 일가는 주변의 충고를 무시한 채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입었다. 손실을 메워야 하는 엘뢰테르는 자신의 화약제조 기술이 돈을 버는 데 쓸모 있단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 미국은 기술 수준이 매우 낮아서 품질이 조악한 저급 화약밖에 생산할 수 없었고 영국제 화약은 너무 고가였기 때문에 수요는 충분했다. 그는 1801년 프랑스로 돌아가 새로운 투자자들에게 추가 자금을 끌어들여 최신 화약 제조 장비를 구입했다. 1802년 7월 19일, 그는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의 브랜디와인 강변에 처음으로 화약 공장을 열었고,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운 제퍼슨이 듀폰의 흑색화약을 육군과 해군에 납품하도록 힘써준 덕분에 1811년 무렵엔 미국 최대 규모의 화약제조 업체가 될 수 있었다. 화약 산업은 승승장구했지만 잇따르는 폭발 사고 때문에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고, 사업 규모를 수익 규모보다 더 크게 확장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채무자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채무에 시달리던 엘뢰테르는 1834년 사업차 필라델피아에 갔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
엘뢰테르의 사망 이후 듀폰은 유진 뒤퐁(Eugene du Pont, 1840~1902)으로 이어졌다가 다시 라모 뒤퐁(Lammot du Pont, 1831~1884)과 헨리 뒤퐁(Henry A. du Pont, 1838~1926)으로 이어졌다. 특히 라모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한 과학자로, 남북전쟁 기간 칠레에서 300만 파운드의 초석을 구입하는 등 정부를 위해 일하기도 했다. 이 무렵 듀폰은 매우 든든한 동업자를 만나게 되는데 앞으로 미국 금융계의 마왕으로 성장하게 될 J.P.모건이었다. 1861년 남북전쟁 무렵 이미 미국 최대 화약 기업으로 성장한 듀폰은 모건과 손잡고 북군에 화약을 납품하는 '모건 캠프'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비싸게 납품한 군수품은 품질이 매우 조악해서 병사들은 끊임없이 격발 사고에 시달렸고 군화는 지급받은 지 반나절도 안 되어 밑창이 떨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장관이 해임되고 의회의 진상조사가 실시되는 등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었다. 전쟁으로 큰 이득을 보았지만 J.P.모건과 듀폰은 악덕 상인이자 죽음의 상인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을 받았음에도 두 회사는 남북전쟁 이후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까지도 군수물자를 생산해 미군에 납품했고 제너럴모터스를 공동으로 지배하기도 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군산복합체는 남북전쟁 때 듀폰과 J.P.모건에 의해 시작되었다.
화약 기업에서 화학 기업으로 변신하다
듀폰공장.png
남북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장기 불황에 접어들었다. 듀폰은 경쟁 업체들을 공격적으로 합병해 경영권을 장악하고 듀폰을 중심으로 한 기업연합(cartel) 체제를 구축해나가기 시작한다. 라모 뒤퐁은 1872년 화약의 가격과 생산을 통제하는 화약거래협회의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듀폰은 업체 간 경쟁을 배제하고 생산과 판매의 합리화를 이룩하며 압도적인 시장 지배력을 갖췄고 연방정부 군용 화약의 공급을 독점하게 되었다. 라모는 1870년대 다이너마이트의 주요 생산 업체였던 캘리포니아화약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면서 듀폰의 사업을 화학 분야까지 넓히도록 이끌었지만, 1884년 폭발 사고 때문에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얼마 뒤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출신으로 뛰어난 경영 능력과 폭넓은 인맥을 지녔던 헨리 뒤퐁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듀폰은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헨리 포드부터 마사 스튜어트까지 현대를 창조한 사람들-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인물과 사상사, 전성원 지음, 페이지 340-344

폭발 사고 때문에 많은 안전이 필요하고 후손인 라모 뒤퐁까지 폭발사고로 죽으니 정말 화약 개발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화약이 남북전쟁등에 전쟁용으로 쓰인 화약산업 자체가 피를 먹고 성장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폭발사고는 거의 사망사건이며 중상에 걸리고 또 화상도 3도 이상 화상에 흉터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www.imagediet.co.kr 자향미한의원에서도 폭발등으로 발생한 화상에 대한 흉터 치료를 화상흉터침인 BT침을 사용하여 기혈순환을 돕고 진피의 콜라겐과 엘라스틴을 자극 재생해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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