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키메데스의 거울로 배를 불태움과 블록체인 기술

in kr •  7 years ago 

아르키메데스(고대 그리스어: Ἀρχιμήδης, 현대 그리스어: Αρχιμήδης 아르히미디스, 약 기원전 287년 ~ 기원전 212년)는 고대 그리스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일부였던 시라쿠사 출신의 철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겸 공학자이다. 그의 생에 대해 남겨진 기록은 얼마 되지 않으나 고전 고대의 대표적인 과학자로 손꼽히고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물리학 분야에서 정역학과 유체정역학을 연구했으며 지레의 원리를 설명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아르키메데스는 아르키메데스 나선양수기, 해상에 있는 배를 공격하기 위한 거울 등의 기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고전 고대 시기의 가장 뛰어난 수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수학과 관련한 아르키메데스의 업적으로는 실진법의 도입, 포물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의 넓이 계산, 원주율의 계산과 같은 것들이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287년 무렵 시라쿠사에서 태어났다. 시칠리아에 있는 도시인 시라쿠사는 아르키메데스가 태어날 무렵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자치 식민지였다. 아르키메데스의 출생 연도는 비잔틴 그리스의 역사가 존 체체스의 연표에 기초한 것이다. 체체스는 아르키메데스 사망 당시 나이가 75세라는 기록을 근거로 그의 출생년도를 산정하였다.[4] 아르키메데스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출생지와 죽음 이외에 알려진 사실이 그리 많지 않다. 발견의 기쁨에 벌거벗고 거리를 달렸다는 것 같은 아르키메데스와 관련한 많은 일화는 후대에 각색된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스스로를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여겼고 특히 구에 대한 자신의 발견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모래알을 세는 사람》에서 아버지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였는데, 이름이 피디아스라는 것과 천문학자라는 점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아르키메데스가 시라쿠사의 국왕 히에론 2세와 친척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6] 다른 기록으로는 아르키메데스의 친구였던 헤라클레이데스가 쓴 전기가 있었으나 소실되었다.[7] 이 때문에 아르키메데스가 결혼은 했는지, 아이가 있었는지와 같은 것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알려진 것으로는 아르키메데스가 청년기에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에서 공부하였다는 것과, 사모스의 코논, 에라토스테네스와 같은 사람들과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 정도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도시데우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저는 옛 친구였던 코논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친구이자 평소 존경했던 한 수학자를 잃었다는 슬픔에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지금까지 누구에 의해서도 연구된 적이 없고 마침내 저에 의해 완성된 한 정리를 코논에게 보낼 작정이었는데 이제 보낼 수가 없게 되어버렸군요.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212년 무렵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에 사망하였다.기원전 212년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2년 동안의 공방전 끝에 시라쿠사를 점령하였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도시가 함락될 당시 아르키메데스는 기하학 문제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고 한다. 시라쿠사가 함락되자 로마 군인이 아르키메데스에게 찾아와 마르켈루스를 접견하라고 명령하였다. 아르키메데스가 문제를 푸는 도중이라며 거절하자 이에 격분한 군인이 아르키메데스를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고 한다. 플루타코스는 이 외에도 아르키메데스의 사망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아르키메데스가 도시 함락 와중에 사망한 것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아르키메데스가 들고 있던 해시계, 구와 같은 도구가 보물로 오인되어 이를 약탈하려는 병사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마르켈루스 장군은 도시를 함락시키면서 부하들에게 아르키메데스의 안전을 당부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망 소식에 매우 화를 냈다고 한다.
한편, 아르키메데스가 남긴 말로 유명한 “내 원을 밟지마” (그리스어: μὴ μου τοὺς κύκλους τάραττε, 라틴어: Noli turbare circulos meos)는 후대에 누군가가 지어낸 것으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폴리비오스는 《세계 역사》에서 시라쿠사 공방전과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을 언급하였다. 플루타르코스와 티투스 리비우스의 저서를 바탕으로 폴리비우스는 아르키메데스가 도시 방어를 위해 여러 가지 기계를 제작한 기술자였다고 적고 있다.
아르키메데스가 사망한 지 137년이 지난 기원전 75년 키케로는 시라쿠사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키케로는 자신이 알고 있던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 사방으로 찾아다닌 끝에 시라쿠사 인근의 관목 사이에 버려져있던 묘비를 발견하였다. 키케로는 아르키메데스의 묘비에는 원기둥과 구가 그려져있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신이 찾은 묘가 아르키메데스의 것이라 확신하였다.
2세기 무렵 고대 로마의 작가 루키아노스는 시라쿠사 공방전에서 아르키메데스가 로마의 전함을 불태웠다고 기록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였던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는 아르키메데스가 사용한 무기가 일종의 화경이었다고 언급하였다. 아르키메데스 열선이라고도 불리는 이 무기는 햇볕을 한 데 모아 불을 붙이는 기구였다. 이러한 무기로 공격이 가능한 지에 대해서는 르네상스 시대까지 논란이 되었다. 르네 데카르트는 실제 그런 무기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 여겼지만 근대에 들어 존 웨슬리 등은 당시에도 그런 무기의 제작이 가능하였을 것이란 의견을 피력하였다.
구리나 청동으로 제작된 거울을 포물면 반사판과 같이 배치하여 초점 거리를 적절히 조정하면 실제 불을 붙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원리를 이용하여 태양로가 만들어 지고 있다. 1973년 그리스의 과학자 로아니스 사카스는 실제 실험을 통해 아르키메데스 거울을 재현하였다. 그는 50미터 거리를 둔 모형 로마 범선을 향해 가로 1.5 미터 세로 1 미터의 거울 70개로 햇볕을 모아 불을 붙이는데 성공하였다. 이 실험에서 모형 범선은 초점이 모아진지 수 초 만에 불꽃을 일으켰다. 당시 로마 범선에 이용된 타르는 발화제로 작용하였을 것이다.[24]
2005년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의 학생들은 1평방피트의 거울 127개로 아르키메데스 거울을 재현하여 30미터 떨어진 모형 배에 불을 붙이는 실험을 하였다. 이 실험에서는 햇볕이 초점에 모인 뒤 배에 연기가 나기 시작하였으나 구름이 햇볕을 가리는 바람에 불을 붙이는 데는 실패하였다. 아르키메데스 거울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날씨에 크게 좌우될 수 밖에 없다. MIT 학생들의 이 실험은 후에 텔레비전 프로그램 호기심 해결사에서 다시 시도되었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 낚시 보트를 놓고 진행된 이 실험에서는 배에 불꽃을 일으켰다. 나무가 불이 붙기 시작하는 발화점은 약 300 °C다.
한편, 아르키메데스가 이러한 무기를 실제로 제작하여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수학과 교수인 셔먼 스타인은 아르키메데스의 거울 무기는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라고 판단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무기가 선박을 향한 공격에 효과적이었다면 후대에 다른 전투에서도 사용되었을 것인데 그러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목거울.jpg
아르키메데스 거울을 단 한 개가 아니라 여러개의 거울이 태양빛을 받고 오목거울을 이용해서 배 하나에 여러개의 거울의 초점만 잘 맞는다면 충분히 배를 불태울만큼 칼로리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현대 태양열 발전소도 한 개 전지판에 여러개 거울로 빛을 몰아주는 경우도 있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에 쓰이는 블록체인 기술도 마찬가지이다. 분산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 나뉘어진 파편 하나하나가 원 장부와 똑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해킹이나 위변조가 불가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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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e post....please upvote me

  ·  7 years ago Reveal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