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전 맥주 한캔을 사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찰

in kr •  6 years ago  (edited)

회사의 적당히 친한 선배, 적당히 친한 동기와 다음주 화요일에 원래 술약속이 잡혀있었다. 오늘, 그 선배한테 퇴근을 앞둔 네 시쯤 연락이 왔다. 우리가 약속한 날에는 본인이 업무 때문에 저녁을 먹기가 힘들것도 같은데 혹시 오늘 번개는 안되겠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생각에, 월요일이어서 부담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편한 사람들이기도 했고 더 미루느니 그냥 오늘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느껴졌다. 마침 나도 동기도 선배도 가능해서 오늘 흔쾌히 먹기로 했다.

비도 많이 와서 회사 최단거리에 있는 중국집에 갔다. 사천탕수육, 유산슬밥을 시켜서 소주 한병이랑 맥주한병을 시켜 먹었다. 소주 한병을 또 시켜먹엇다. 다시 잡탕밥, 군만두를 시키려고 하다가 잡탕밥만 시키고 군만두를 서비스로 얻어내는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소주를 또 1병을 시키고, 1병을 더 시켜서 먹었다. 아쉬워서 눈치를 보다가 또 1병을 시켰다. 사실 몇 병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최근에 있었던 인사 발령 얘기, 내 거지같은 상사 얘기, 동기의 거지같은 상사 얘기, 선배의 자랑 아닌듯한 자랑을 들으면서 먹었다. 많은 얘기를 다들 감정을 섞어서 열나게 했으나 벌써 어떤 내용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즐거웠던 관계로 정신 차리니 벌써 9시가 약간 넘었고, 나는 사람들을 더 붙잡는 것은 민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기적적으로 들어서 일어나자고 했다. 다들 또 응했다. 더 먹고 싶었던 사람은 나뿐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의지로 파하고 지하철을 탔다. 나는, 1차에서 억지로 파한게 약간 억울해서인지, 덜 취해서인지, 혹은 시간이 아직 일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가는 길에 지하철 역 앞 편의점에서 맥주 한캔을 사갈 지 말 지를 엄청나게 고민하고 있다. 경험상 사는게(live) 힘들어서 그런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오늘 하루 중 가장 심각한 고민일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언제나처럼 한 캔을 사 갈 것이고(아마 클라우드 500ml, 아니면 하이네켄 500ml) 내일 또 약간의 후회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억지로 꾸역꾸역 기록했으니, 내일 후회가 될 때 한 번 보고, 그 다음번의 오늘같은 저녁에 후회를 줄일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있다. 오늘은 이미 글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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