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홀의 유령

in kr •  7 years ago  (edited)


[우리가 부른 사람, 다시 부르는 노래]

아트홀의 유령

 

잊지 못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보고싶은 뮤지션이 있습니다. 

뮤지션과 가상 대화를 통해 음악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가득 찬 충무아트홀 객석 위로, 조명이 하나 둘 꺼졌다. ‘오페라의 유령’ 팬으로서 프리퀄 ‘팬텀’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있었다. 웅장한 음악과 샹들리에 불빛이 공연의 시작을 알렸고, 걷힌 막 사이로 얼굴 한 쪽을 감춘 배우 류정한이 등장했다. “저 친구도 꽤 괜찮지” 라며


  팬텀이 옆에 앉아있었다. “놀라지 말게, 가끔은 A석에도 앉으니까.” 객석에 반듯이 앉은 그의 음성은 묵직했다. 어두운 탓에 가면이 가리지 못한 반쪽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팔짱을 낀 채 그는 뚫어져라 무대를 응시했다. 대필 자서전을 검토하는 회장님처럼,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You Are Music>

 

  무대 위 류정한은 크리스틴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있었다. ‘팬텀’의 하이라이트 넘버로 알려진 ‘You Are Music‘을 두 남녀가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너는 내 음악이요 빛이라 노래하는 그들은, 누가 들어도 아름다울 음악 그 자체였다. 멜로디가 귀에 익을 때쯤


  “난 크리스틴을 사랑하지 않았어”라며 팬텀이 내게 속삭였다. 아, 그건 분명 크리스틴을 가르칠만한 목소리였다. 뭐라고요? 마침 무대 위 류정한이 다른 남자와 떠나는 크리스틴 뒤에서 슬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저토록 애절하게 ‘What Will I Do’를 부른 당신이 그게 할 말인가요. 다 안다는 듯한 말투에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가 저 밑에 있어봐, 노래만 잘하면 남자도 사랑할걸.” 그리고 나지막이 덧붙였다. “사랑하지 않았어. 여자를 사랑한 게 아니라 음악을 사랑한 거야.”

 

<Without Your Music>

 

  팬텀은 줄곧 류정한의 연기가 마땅찮은 눈치였다. “저 녀석은 너무 로맨틱해. 난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야. 그렇게 얘기했건만.” 무대 위 류정한은 화를 내며 질투의 화신 카를로타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차라리 저 여자가 마음에 들어.” 그가 천천히 말했다. “저 여자는 욕망에 솔직하거든. 인간적이지.” 그렇다면 크리스틴은? 왜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겁니까. 순수하고 열정적인, 노래하는 크리스틴을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내 류정한이 그녀를 데려와 그의 지하 묘지에 뉘었다. 크리스틴을 향한 마음을 담아 ‘Without Your Music‘을 열창할 때 팬텀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크리스틴은 나를 남자로 생각한 적이 없어. 보면 모르겠나? 그녀에게 나는 마에스트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 그는 복잡한 눈치였다. “마음에 안 드는 건 뭔 줄 알아? 그녀는 나한테 노래를 배워갔잖아. 근데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 그녀조차도.”

사랑하지 않았다면서요. 그녀를 얻는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그건, 사랑이라기보다는. 말하고 싶진 않지만, 엄마 같은 거야.” 엄마요? “그래 엄마.” 어머니도 아닌 엄마라는 단어로, 그는 열띠게 설명했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크리스틴을 지하로 데려 왔다고,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사랑해줄 여인이 필요했노라고 그는 고백했다. “크리스틴은 엄마가 될 준비를 하지 않았어. 내가 가면을 벗을 때도 그랬고.” 아 당신은 엄마를 찾기에는 너무도 남성적인 목소리군요, 그에게 말할 뻔 했다.

 

<You Are My Own>

 

  “차라리 카를로타를 사랑할 걸. 그녀는 교환에 익숙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유부녀는 좀 그렇잖아요. 말하는 순간, 팬텀 가족의 진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로맨스인지 불륜인지 모를 아비의 이야기에도 그는 무던한 눈치였다. 이윽고 죽어가는 아들을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아버지의 고백에, 조금은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그래도 죽을 땐 억울했다고. 아깝잖아 내 재능이 하하.” 아 그나저나 자네,


  “음악 좋아하나?” 그가 물었다. 그럼요. 음악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타도 칠 줄 아는걸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는 “아름다움의 완성은 음악이지”라며 거듭 중얼거렸다. 자세한 의미를 묻고 싶었지만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크리스틴이 분명 노래를 잘하긴 하죠. 결국 당신은 그녀를 통해 아름다움을 완성한 거 아닌가요. “그럼 뭐하나, 내가 이 꼴인데” 옆자리의 신사가 퍼지듯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어쨌거나 류정한 저 녀석은 너무 로맨티스트야. 저게 아니래도.”

 

  커튼콜이 끝나고 밝아진 객석에서, 문득 크리스틴이 궁금해졌다. 끝내 그녀는 음악으로 ‘아름다움’을 완성했을까? 그래서 크리스틴은 어떻게 되었나요, 서둘러 물어보려는 내 옆에


  팬텀은 없었다. 신사가 앉은 자리는 비었고, 그의 목소리만 남을 뿐이었다. 노래라도 한 곡 불러주고 갔으면 좋으련만, 팬텀은 소리 없이 충무아트홀 어딘가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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