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무죄 무전유죄’ 판결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통계

in kr •  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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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jtbc 화면캡쳐

지난달 초부터 <사법부는 성역이 아니다>라는 대주제로 10회 짜리 기획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번엔 연재물 중 ‘유전무죄 무전유죄’ 판결 흐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통계를 바탕으로 쓴 기사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혹시나 하고 찾아봤는데 정말 이런 유의미한 판결 통계 자료가 있었더군요. 인용한 자료 출처는 ‘경제개혁연구소’입니다.


#사건1
피고인은 2017년 4월 5일 대전광역시 동구의 한 편의점에서 냉장고에 진열된 2천원짜리 맥주 1캔을 꺼내 마신 뒤 돈을 내지 않았다. 피고인은 당시 수중에 현금이 1천원 밖에 없고 신용카드 등 다른 지불 수단이 없는 상태였다.

#사건2
피고인은 회계 처리 없이 회삿돈 366억원을 몰래 빼내 비자금을 조성했다. 이 중 326억원을 개인적으로 썼다. 10년에 걸쳐 범행이 이뤄졌다. 계열사를 동원하는 것도 모자라 허위로 유령 계열사를 만들어 비자금을 조성하는 데 이용했다.

판사는 이 두 사건을 각각 어떻게 판단했을까? 2천원짜리 맥주를 훔친 사람은 징역 6월을 선고받고 감옥에 갔다. 회삿돈 366억원을 편취한 사람은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각각 60대 노숙자와 두산그룹 박용오·박용성 총수 일가에 대한 판결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판결의 전형이다.

“내가 법관들의 판결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수는 없고, 간섭할 생각도 없지만 사법부 전체의 신뢰 문제라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남의 집에 들어가 1억원어치 물건을 절도한 사람에게 실형을 선고하지 않는 판사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놓고 200억, 300억원씩 횡령한 피고인들에 대해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하면 국민들이 어떻게 수긍하겠느냐?”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참여정부 당시 현직에 있을 때 고법 부장판사 20여명과 공관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공개석상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오죽하면 사법부 수장이 법관들 앞에서 저런 말을 했을까?

판사는 일반 생계형 범죄에 엄격하고 화이트칼라 범죄에 관대하다

이 전 대법관의 발언은 당시 법원 내에서 상당히 논란이 됐다. 자칫 ‘법관의 독립성’을 해칠 수 있다는 일선 판사들의 우려 때문이었다.

단순히 판결 하나하나만 놓고 판사의 편향성을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유의미한 판결 샘플로 통계를 냈을 때 판사들이 일반 생계형 범죄보다 재벌·기업인들의 경제범죄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판결한다는 경향이 확연하게 나타난다.

경제개혁연구소(소장 김우찬)는 지난 2007년과 2013년 두 차례에 걸쳐 화이트칼라 경제범죄와 일반 생계형 범죄에 대한 판사들의 양형을 비교 분석한 자료를 내놨다. 조사 대상 판결 수는 각각 137건, 119건이다.

두 자료는 모두 기업범죄의 전형인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 사건 피고인 중 지배주주 일가나 이사, 전문경영인이 피고인인 사건에서 집행유예 선고 비율과 사법연감에서 확인할 수 있는 ▲형법상 절도·강도죄 ▲형법상 횡령·배임죄의 집유 비율을 비교했다.

이들 유형을 비교 군으로 설정한 이유는 재판부가 실제 화이트칼라 범죄자 및 그들이 연루된 사건을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범죄자, 일반 횡령·배임 사건에 비해 얼마나 유리하게 처우하는지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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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 분석 결과, 모두 재벌 등 기업인들의 특경법상 횡령·배임 사건에 대한 집유 선고 비율이 다른 일반 범죄에 대한 집유 선고 비율보다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2013년 자료에는 대법원 ‘양형기준’이 도입된 이후의 판결도 포함돼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유 선고 비율의 격차는 크게 나타났다. 양형기준을 벗어난 판결도 다수 있었다. 이는 재벌·기업인 면죄부 판결을 위해 판사가 일종의 조직 규칙인 양형기준마저 과감하게 무시해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1차 자료에서 재벌·기업인 범죄와 일반범죄 선고 통계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1심에서 재벌·기업인(특경법상 횡령·배임 사건)이 집유를 선고받은 비율은 71.1%에 달했다. 반면 1심에서 생계형 범죄로 분류되는 절도·강도죄 집유 선고 비율은 47.6%, 일반 형법상 횡령·배임죄 집유 선고 비율은 41.9%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한국 법원은 재벌·기업 범죄자에 대한 양형을 결정할 때 다른 범죄집단에 비해 ‘집행유예’를 선호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사 대상이었던 재벌·기업인 범죄의 법정형은 3년 이상의 유기징역(이득액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이나 5년 이상의 유기징역(이득액 50억원 이상)이다. 절도·강도죄의 법정형은 절도죄의 경우 6년 이하의 징역, 강도죄의 경우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상대적으로 낮다.

판사들이 ‘법대로’ 판결해왔다면 재벌·기업 범죄보다 생계형 범죄의 집유 비율이 더 높아야 자연스럽다. 그러나 통계에서 드러난 판사들의 판결 흐름은 오히려 정반대다. 사람을 봐가면서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세게 처벌하고 있다는 것이다.

2차 자료(2008~2011년까지 판결 대상)에서 재벌·기업인 범죄의 집유 선고 비율은 50.8%로 줄었다. 일반 절도·강도죄 집유 비율은 42.8%, 일반 횡령·배임죄 집유 비율은 40.1%였다.

재벌·기업인 범죄 집유 선고 비율이 대폭 줄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일반 범죄에 비해 집유 선고 비율이 높다는 점, 다른 일반 범죄들과 비교했을 때 근본적으로 법정형 기준이 다르다는 점을 감안하면 판사들은 여전히 재벌·기업인들에게 관대한 처벌을 내리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재벌·기업인 범죄의 집유 선고 비율이 많이 낮아진 데에는 횡령·배임죄에 대한 양형기준이 도입된 2009년 7월 이후의 판결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기준을 이탈한 판결 건수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예를 들어 횡령·배임액수가 300억원 이상일 경우 양형기준에 따르면 집유 선고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횡령·배임액 300억원 이상 사건 41건 중 집유를 선고한 사건은 무려 17건에 달했다. 놀랍게도 범죄액수가 낮을 때보다 300억원 이상일 때 양형기준을 무시하고 봐주기 판결을 하는 횟수가 상대적으로 더 높게 나타났다.

‘이왕 해 먹을 거면 더 많이 해 먹어라’는 판사들의 해괴한 가이드라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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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별 양형기준이 도입되고 나서부터는 오히려 노골적으로 주요 혐의를 무죄로 판단해버리는 경우도 더러 있다.

지난 2015년 9월 131억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된 이석채 전 KT회장에게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유남근 부장판사)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 전 회장은 2011년 8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KT가 이 전 회장의 친척과 공동 설립한 ㈜OIC랭귀지비주얼(현 ㈜KT OIC) 등 3개 벤처업체의 주식을 의도적으로 비싸게 사들이게 해 회사에 총 103억5천만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를 받았으나, 판사는 “배임의 고의를 갖고 있었거나 비자금을 불법영득 의사로 사용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무죄로 판단했다.

특경법상 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된 범죄를 이보다 처벌 수위가 낮은 형법상 업무상 배임 혐의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형을 대폭 감경시켜주기도 한다.

지난해 12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김상동 부장판사)는 신동빈 롯데그룹회장의 1천245억원대 배임 및 508억원대 횡령 등 총 1천753억원대 기업범죄 혐의 대부분을 무죄로 판단했다. 딱히 무죄로 판단할 요인을 찾지 못한 롯데시네마 측에 774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특경법상 배임)에 대해서는 롯데시네마 측이 손해를 본 건 맞지만, 신 회장이 얼마나 이득을 봤는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특경법상 배임 혐의가 아닌 단순 업무상 배임 혐의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신 회장에게 징역 1년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판사가 이렇게 다툼의 여지가 있는 혐의에 대해서는 쉽게 무죄 판단을 하고, 유죄가 명백한 혐의의 경우 상대적으로 처벌 수위가 낮은 혐의로 바꿔 적용해주면, 재벌을 집행유예로 풀어주면서 양형기준에도 부합시키는 교묘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게 된다.

결국 아무리 제도적으로 양형기준을 강화하고, 혐의별 가중처벌 수위를 높이는 방향으로 현행법을 개정한다 한들, 판사가 재벌을 봐주겠다고 작정해버리면 양형에 제약을 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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