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史
에니그마의 비밀을 풀어낸 앨런 튜링 [2]안녕하세요! KEEP!T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에니그마의 비밀을 풀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 앨런 튜링의 이야기 이어나가겠습니다.
1.수학의 영역으로 들어온 암호학
1939년 9월 영국 정부 암호학교에서 HUT(막사) 8의 책임자가 된 튜링은 암호해독팀에 필요한 전문가들을 구성해 곧바로 에니그마 해독 장치 제작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전문가들 중 처음엔 언어학자들도 포함돼 있었으나, 튜링은 이들을 해고하고 수학자 위주로 팀을 꾸립니다. 튜링은 에니그마 암호를 사람이 해독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빠른 계산이 가능한 계산 장치가 해독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때문에 이 장치를 제작하는데 도움이 되는 전문가들로 팀을 꾸린 것입니다. 영국 정부 입장에서는 방독면을 쓰고 자전거로 출근하는 이 괴상한 남자가 하는 말이 미심쩍었지만, 일단 책임자를 맡긴 이상 전권을 주기로 했습니다.
사실 1차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암호해독은 주로 언어학자의 영역이었습니다. 이전의 암호체계가 단순히 평문의 알파벳을 암호키를 이용해 다른 알파벳으로 대체하는 기법이었기에 언어학만으로도 충분히 암호를 해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허나 1,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면서 암호학이 급격하게 발전하게 되고 양상은 달라집니다. 이때 등장한 전문가들이 바로 수학자들입니다. 1932년 폴란드 암호국에서 고용한 수학자들이 에니그마의 암호를 처음으로 해독해내면서 암호해독은 수학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종이와 펜을 이용해 작성하던 암호가 기계 장치를 이용해 작성하는 암호로 바뀌면서 암호학 역시 자연스레 언어학에서 수학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후 현대 암호학은 수학의 정수론의 영향을 받아 급격한 발전을 이루게 되죠.
2.맞출수 있으면 맞춰 봐, 에니그마의 비밀
이전 칼럼에서 다뤘던 다중대체암호를 기억하시나요? 다중대체암호는 암호키가 정해진 단일대체암호와는 달리 행렬표에서 고른 암호키를 이용해 암호문을 생성합니다. 때문에 단일대체암호와 같이 알파벳 출현 빈도수를 통해 평문을 유추하는 빈도분석공격에 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 역시 평문을 암호문으로 치환할 때 사용하는 암호키의 반복 주기를 간파하여 해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암호키를 유추하는 것을 아주 어렵게 만들면 어떨까요?
Enigma machine
3개의 회전자, 램프보드, 자판, 배전반으로 구성된 에니그마 장치
실제로 에니그마가 이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에니그마는 회전자와 배전반을 이용해 평문을 암호문으로 바꾸는 경우의 수, 즉 암호키를 천문학적으로 생성할 수 있는 장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경우의 수는 몇 가지나 될까요? 무려 158,962,555,217,826,360,000가지! 이는 아주 아주 많은 암호키를 가진 다중대체암호 알고리즘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정도로 많은 암호키를 이용해 암호문을 생성한다면, 암호문에서 암호키가 반복되는 주기를 간파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암호키를 무작위에 가깝게 생성하는 것이죠.
각각 알파벳 배열이 다른 회전자 5개 중 회전자 3개를 선택하는 경우의 수
5x4x3 = 60가지회전자의 1부터 26까지 숫자 중 초기 숫자 설정으로 생성할 수 있는 경우의 수
26 x 26 x 26 = 17,576가지배전반의 플러그 위치 변경을 통해 생성할 수 있는 경우의 수
26! / 6! x 10! x 2^10 = 150,738,274,937,250가지에니그마 장치가 생성할 수 있는 총 경우의 수
158,962,555,217,826,360,000가지
158,962,555,217,826,360,000 (Enigma Machine) - Numberphile
에니그마의 작동 원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와있는 영상입니다.
3. 도구에는 도구로 상대한다, 초고속 계산기 봄브(Bombe)
이제야 왜 튜링이 수학자들과 함께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팀을 꾸렸는지 이해가 됩니다. 튜링은 에니그마가 이전까지의 고전적 암호해독기법을 무력화시키는 암호장치란 점을 이미 간파했고, 더이상 사람의 인력으로는 풀 수 없으리란 점을 알았던 것입니다. 도구에는 도구로 상대한다. 그 많은 경우의 수를 빠르게 계산할 수 있는 기계가 존재한다면? 에니그마의 비밀을 풀기 위한 해법으로 튜링은 마침내 초고속 계산기를 생각하게 됩니다.
튜링에겐 또한 많은 조력자들이 존재했습니다. 사실 에니그마는 1932년 폴란드 수학자 레예프스키(Marian Rejewski)에 의해서 처음으로 해독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암호학 분야에서 수학자들이 활약하기 시작한 것이고요. 그러나 전쟁이 임박한 1938년 12월 15일 독일 측에서 기존의 에니그마 회전자를 5개로 늘리고 3개를 선택하는 방식을 채택하면서 기존의 해독법은 무력화되고 맙니다. 게다가 1939년에 이르자 폴란드의 에니그마를 해독하기 위한 노력은 한계에 부딪히고, 이에 폴란드는 1939년 7월 25일 자신들이 그동안 모은 에니그마에 대한 모든 자료와 암호해독기술을 영국에 넘겨줍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튜링에 앞서 에니그마를 연구한 폴란드 암호학자들의 도움은 결정적이었을 겁니다. 또한 침몰하는 독일 해군 유보트에 목숨을 걸고 들어가 에니그마를 가져온 영국 수병, 매일 입수한 독일 통신문을 가져다 준 첩보원, 함께 전쟁 기간 동안 초고속 계산기 제작에 매진한 HUT 8 팀원들의 도움 역시도요.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암호문마다 따박따박 하일 히틀러(Heil Hitler!)를 사용해서 결정적 힌트를 준 독일군의 도움도 빼놓아서는 안되겠네요.
블레츨리 파크에서 HUT 8 팀원들과 함께 초고속 계산기 제작에 몰두한 튜링은 마침내 이 초고속 계산기를 완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계산기는 폴란드 암호국에서 사용했던 암호해독장치 봄브(Bombe)의 이름을 계승합니다. 이 장치는 1936년 그가 <연산 가능한 수들에 관하여>란 논문에서 제시했던 보편 만능의기계, 즉 '튜링 머신'의 최초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테이프, 헤드, 상태 기록기, 행동표로 이뤄진 기계 장치 말입니다.
초고속 계산기 봄브(Bombe)
이후 이 장치는 사람 대신 쉬지 않고 일하는 암호해독기로서 엄청난 활약을 하게 됩니다. 봄브의 등장으로 천문학적으로 많은 경우의 수를 생성하고, 매일 자정 24시간마다 암호체계가 바뀌는 에니그마에 대항할 수 있게 된 것이죠.
매일 오전 6시 입수한 독일군 통신문을 단서로 봄브는 사람이 일일이 수행할 때보다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해서 그날 그날의 에니그마 암호문을 해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에니그마의 비밀이 풀리게 된 순간이죠.
4. 현대 암호학으로
역사학자 칸(David Kahn)은 에니그마 암호문의 해독이 종전을 2년 앞당기고 1400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평가 합니다. 이후 이어진 전쟁 기간 동안 튜링과 암호해독팀은 에니그마의 발전에 발맞춰 뉴 봄브를 개발하고, 독일군의 최고사령부 보안통신기인 로렌츠 암호체계의 해독을 목표로 최초의 프로그래밍 가능 디지털 컴퓨터 콜로서스(Colosuss)를 개발하기에 이릅니다. 봄브와 콜로서스의 활약으로 연합군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히틀러와 독일 수뇌부의 작전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고, 이 최초의 컴퓨터들은 유럽 대륙을 나치로부터 탈환하는데 어느 전쟁 영웅 못지 않은 공을 세우게 됩니다.
Colossus
콜로서스
: 1943년에 탄생한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밍 가능 디지털 컴퓨터. 이전까지는 1946년에 탄생한 ENIAC이 세계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로 알려졌으나 1975년 영국 정부에서 군사 기밀을 해제하면서 콜로서스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었다. 1500개의 진공관을 사용해 제작하였으며, 스위치와 플러그 및 종이 테이프로 작동시켰다.
튜링이 창안했던 보편만능기계(튜링 머신)는 이후 오늘날의 컴퓨터의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튜링 머신, 인공지능, 그리고 암호학에 대한 연구까지 튜링은 정보과학 전반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또한 컴퓨터의 등장이 현대 암호학을 탄생시키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생각하면 암호학의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으로 평가받기에도 마땅합니다. 주로 군사 영역에서 연구하던 암호학이 컴퓨터란 도구의 탄생으로 민간 영역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암호학이 정보보호, 전자서명, 블록체인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바로 컴퓨터의 보급 덕택이겠지요. 때문에 블록체인사에서 컴퓨터의 아버지인 앨런 튜링의 이야기를 빼놓고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컴퓨터와 현대암호학. 이제 우리는 다시 블록체인 기술의 배경인 현대 암호학의 시대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다시 비트코인과 암호학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blockchainnomad
참고문헌
짐 오타비아니, 앨런 튜링: 생각하는 기계, 인공지능을 처음 생각한 남자, 푸른지식, 2016
오채환, 튜링이 들려주는 암호 이야기, 자음과 모음, 2010
Bombe
콜로서스
블록체인史 시리즈
경제적 배경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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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적 배경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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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배경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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