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지라는 부분은(성은 이氏이고 승지는 관직)입니다.
김씨성을 가진 회사 대표에게 김사장님하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성은 김씨인데 회사 사장이라서 김사장!.^^
재미 있죠? ^^
승지라는 관직은 지금으로치자면 장관정도 될 것 같습니다.
이승지라고 표기하고 조그만하게 이름(의국)이라고 써 놓았네요
봉피의 발송인.도착인이 뚜렸하고 편지지까지 있지만 우표가 유실되어 매우 아쉽네요.
오랜세월이 지나면서 우표와 봉피의 접촉 부분이 삮아져서 떨어졌나 봅니다.
TV대하 드라마를 보면 가끔 나오는 장면들 기억 하시죠?
왕초: 여봐라앙아아앙앙앙앙도승지 듭시오오오옹옹~~~
내시: 넹! 네~~~~에에에에엥~~~~
왕초: 도승지 들라 해라~~~아아앙
내시: 넹
그 도승지랑 지금 편지의 승지랑 관직이 같은 것입니다.
이의국
[李義國]
요약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1888년(고종 25) 성균관 사마시에, 1890년(고종 27) 문과에 올라 승문원을 거쳐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과 통정대부 비서감승(通政大夫秘書監丞)을 역임했다. 1910년 한일병합(韓日倂合) 이후 국운을 한탄하며 낙향하였다. 이후 학교를 신축하고 용흥강습소(龍興講習所)를 설립하여 후학을 기르는 데 힘썼다.
출생-사망
1867 ~ 1935
본관
연안(延安)
자
치인(致仁)
호
삼운(三雲)
국적
한국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後谷里)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치인(致仁), 호는 삼운(三雲)이다.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後谷里) 출신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부원군(府院君) 이광정(李光庭)의 12세손이다.
1888년(고종 25) 성균관 사마시에, 1890년(고종 27) 문과에 올라 승문원을 거쳐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과 통정대부 비서감승(通政大夫秘書監丞)을 역임했다. 삭주 군수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919년과 1926년에는 국장(國葬)에 참여하여 마지막 신절(臣節)을 다했다.
1910년 한일병합(韓日倂合)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백의(白衣)하여 국운을 한탄하였다. 또한 육영에 뜻을 두어 학교를 신축하고 용흥강습소(龍興講習所)를 설립하여 신구학을 종합적으로 가르치며 후학을 기르는 데 힘썼다. 묘소는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에 있는 8대조 연릉군(延陵君) 선영(先塋) 아래에 있다.
발송지:괴산군(충청북도) [槐山郡(忠淸北道)] 청안면(淸安面) 금신리(錦新里)
용흥강습소는1900년대 초 대전군 북면 미호리 구리고개와 문의면 후곡리,삼정리의 경계 사이에 있었다,
용흥강습소는그 이후에 용흥초등학교로 변경된다.
또 그 이후에 용흥초등학교는 대청댐의 건설로 수몰되어버렸다.
이런 사진은 많이 못봐서 그런지 많이 신기하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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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자주자주 구경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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