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바람바람바람'이란 영화를 봤다. 불륜을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한 게 나름 신선했지만, 보는 내내 마음 속에선 '불륜은 불륜인데 그 안에 긍정적인 요소들을 많이 넣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보다 한 수 위에 계신 불륜의 화신급 여인 보바리 부인은 어떤 결말을 맺었을까? 영화와는 극히 대조적으로 보바리 부인의 마지막은 처참하다. 작가의 의도도 있겠지만 실은 이 소설은 그 당시 기사화되었을 정도로 유명했던 한 여인의 실제 불륜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불륜의 최대 희생자인 남편 샤를을 바라보며 '달과 6펜스'의 바보같은 조연이자 더 착했지만 더 비참했던 한 남편, 스트로브가 떠올라 비교해보고 싶어졌다. 두 연인은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보바리 부인 / 구스타브 플로베르
불륜을 소재로 한 소설이지만 한 여인이 어떻게 내면 속 갈망을 해결하지 못하고 무너지는가를 아름다운 순간과 절망적 순간의 대비를 통해 알 수 있는 실화바탕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늘 갈망했던 것이다. 부유하고 낭만적인 사랑이 가득한 삶을... 그런 상상과 실존하는 현실의 삶 사이에서 적절한 화해를 이루지 못한 여인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유혹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을 수 있다. 각종 매체를 통해 나의 현실 속에선 생각조차 못했던 삶과 장면들이 우리 눈 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진다. 보는 그 자체로, 즉 대리만족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서 멈추기란 쉽지 않다.
보바리 부인 엠마는 농장주의 딸로 독서와 예술을 좋아하고 수녀원생활을 거쳤을만큼 교양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불륜'이란 단어가 쉽게 떠오르지 않을만큼 나름의 정숙함도 갖춘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쩌다가 그런 처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결혼 전부터 내면에 존재했던 환멸과 목마름
샤를이 베르토를 처음 방문했을 무렵, 그녀는 이미 인생에 환멸을 느꼈으며 더 이상 배울 것도, 느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 전, 그녀는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랑에 응당 따라야 할 행복이 오지 않으니 자기가 잘못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엠마는 책에서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던 희열이니 정열이니 황홀이니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결혼 전부터 책을 통해 봤던 환상에 대해 늘 목말라했다.
남편 샤를의 공감 무능력
만일 그의 시선이 단 한 번이라도 그녀의 생각에 닿을 수 있었더라면 손을 갖다 대기만 하면 떨어지는 농익은 과일처럼 그녀의 가슴속에 뭉쳐 있던 것들이 무진장으로 쏟아져 나왔으련만. 그러나 두 사람의 일상생활의 친밀감이 더해질수록 내면의 간격은 더 벌어졌고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녀는 샤를의 정열에는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치부해 버렸다. 그의 사랑 표현은 일과처럼 규칙적이었고 키스하는 시간도 거의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생활 습관들 중 하나에 불과했으며 맛없는 저녁 식사 후에 뻔히 다 알고 있는 디저트가 나오는 것처럼 상투적이었다.
더욱 울화가 치미는 것은 샤를이 그녀의 고통을 도통 짐작조차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기가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고 확신했고 그녀는 그것이 미련한 모욕으로 느껴졌다. 또한 그렇게 안심하는 모양이 배은망덕으로 느껴졌다. 도대체 그녀가 누구 때문에 정조를 지키고 있는데? 샤를이야말로 모든 행복의 장애물이요, 모든 비참의 원인이요, 그녀를 옴짝달싹 못하게 옥죄고 있는 복잡한 가죽끈의 잠금 고리이자 거기에 달린 날카로운 바늘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남녀문제의 원인이 한 쪽에만 있을 수는 없다. 남편 샤를 또한 자기만의 이기적인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다. 자연스레 그녀는 공감해주지 못하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환멸을 느끼며 공허감에 빠져버린다.
엠마의 공허
무도회의 추억을 되새겨 보는 것은 엠마의 일과가 되었다. 수요일마다 아침에 잠을 깰 때면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일 주일 전…… 이 주일 전…… 삼 주일 전…… 나는 거기 있었는데!’ 그러나 차차 사람들의 얼굴이 기억 속에서 뒤섞이고 콩트르당스 때 연주되었던 음악도 잊어버렸다. 하인들의 제복도 방들의 모습도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자잘한 부분들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아쉬움만은 여전했다.
그녀 가슴에 남은 것은 공허뿐이었다. 다시 똑같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젊고 매력적인 남자 레옹
그들은 이렇게 바짝 다가앉아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그들은 서로 이해하고 공감했다. 파리의 연극, 소설의 제목, 새로운 카드리유 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교계, 지금까지 그녀가 살았던 토트, 현재 그들이 있는 용빌 등, 그들은 저녁 식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을 검토했고,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의 내면에 있던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남자를 만나고 그 또한 엠마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러나 레옹은 소심한 남자였기에 그런 매혹적인 느낌만 남긴 채 그녀를 잊으려 다른 도시로 떠난다. 그 이후 엠마는 더욱 탐욕스러워진다.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탐욕적인 엠마
엠마는 야위어갔다. 두 볼은 파리해졌고 얼굴은 길쭉해졌다. 그녀의 검은 머릿단과 커다란 눈, 곧바로 뻗은 콧날, 새처럼 가냘픈 걸음걸이, 게다가 이제는 언제나 침묵에 잠겨 있는 그녀의 모습은 삶이라는 바다를 닿을 듯 말 듯 스치며 가로질러 가는 존재를 연상시켰다. 또한 그녀의 이마에는 뭔가 숭고한 숙명의 낙인이 찍혀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너무도 슬프고 너무도 차분하고 너무도 부드러운 동시에 너무나도 삼가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녀 옆에 있으면 얼음과도 같은 차가운 매력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성당 안에서 대리석의 냉기가 서린 꽃향기에 전율을 느끼는 것과 흡사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탐욕과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 내부에는 육욕과 금전욕, 그리고 정열로 말미암은 우수가 한데 뒤엉켜 하나의 고뇌로 응축되었다.
그러나 인내의 시간도 잠시, 다시 그녀의 매력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한 남자가 나타난다.
카사노바 여성 편력자 로돌프
로돌프 불랑제 씨는 서른네 살이었다. 성격이 거칠고 머리 회전이 빨랐다. 여성 편력이 많았고, 그런 만큼 여자를 잘 알았다. 그 여자는 예뻐 보였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그녀 남편에 대해 생각했다.
“그자는 분명 멍청이일 거야. 아마 여자는 이미 진력이 났을 걸. 손톱도 더럽고, 수염도 더부룩하더군. 그자가 환자를 보러 다니는 동안 여자는 집에서 양말짝이나 꿰매고 있겠지. 정말 따분할 거야. 도회지에 살면서 매일 저녁 폴카를 추고 싶을 테지. 가엾은 것 같으니라고! 도마 위의 잉어가 물을 그리워하듯 사랑에 갈증이 나 있겠지. 서너 마디 달콤한 말만 걸어주면 홀딱 넘어가겠지. 틀림없어. 그거 삼삼하겠는걸! 제법 괜찮겠는데! ……그래,하지만 나중에 어떻게 떼버린담?
”
불륜의 환상에 완전히 빠져든 엠마
지금 그녀는 곁에 있는 로돌프의 머리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 감미로운 감각은 과거의 욕망 속으로 스며들었고 그 욕망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모래알처럼 그녀의 영혼에 퍼져나가는 미묘한 향기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녀는 몇 번이나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기둥을 휘감은 담쟁이덩굴의 싱그러운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녀는 나지막이 되풀이했다. “내게 애인이 생겼어! 애인이!” 이렇게 생각하자 마치 제 이의 사춘기를 맞은 것처럼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이제 드디어 사랑의 기쁨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체념했던 뜨거운 행복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그녀는 황홀한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은 정열, 도취, 열광으로 점철되어 있을 것이다. 푸른빛을 띤 광대한 세계가 그녀를 둘러쌌다. 그녀의 상념 속에는 최고조의 감정들만이 산봉우리처럼 솟아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평범한 일상은 기껏해야 저기, 저 아래, 그 높은 꼭대기들 사이의 어두운 곳에 까마득히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유혹에 넘어간 것을 후회하는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그를 더욱 사랑하고 싶은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몸을 허락했다는 데서 오는 굴욕감은 원망으로 변했지만 육체의 쾌락이 그것을 무마해 주었다. 그것은 애착이 아니라 끊임없는 유혹이었다. 그는 그녀를 마음대로 지배했다. 그 사실에 그녀는 겁이 날 지경이었다.
유혹에 빠져들며 점점 음탕해지는 그녀는 외적으론 더더욱 아름다워져갔다. 작가의 화려한 표현이 그녀를 더 높여주는 듯 하다.
이 무렵만큼 보바리 부인이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다. 그녀는 기쁨과 열정과 성공이 가져다주는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기질과 환경이 조화를 이룬 데서 나온 아름다움이기도 했다.마치 비료와 비와 바람과 햇빛이 합작하여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이 그녀의 갈망, 슬픔, 쾌락의 경험, 언제나 젊디젊은 환상 따위가 그녀를 점점 발전시켜 마침내는 그 천성을 활짝 피어나게 한 것이다.
그녀의 눈꺼풀은 그윽한 사랑의 시선을 위해 일부러 조각해 놓은 듯했고, 뜨거운 숨결에 그녀의 작은 콧구멍이 벌름거렸고 두꺼운 입술 끝이 당겨 올라갔다. 거기에 밝은 빛이 비치면 약간 검은 빛을 띤 솜털이 그림자처럼 드러나 보였다. 목덜미에 한 줄로 땋아 드리운 머리칼은 퇴폐적 표현에 능란한 예술가가 그려놓은 듯했다. 그 무거운 머리 다발은 불륜의 현장에서 매일같이 흐트러졌다가 아무렇게나 대충 다시 묶이곤 했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감미로워지고, 몸매도 더욱 유연해졌다. 심지어 그녀의 옷자락과 발바닥에서까지 ...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랑의 쾌락
으로 단단히 다져진 로돌프는 그녀도 결국 똑같다고 생각하고는 편지 한 장 남긴 채 떠나버린다. 그렇게 탐욕만 가득하게 쌓아 마치 불륜 레벨업을 한 엠마 앞에 때마침 레옹이 다시 나타난다. 처음엔 엠마가 발을 빼는 척 하지만 결국 둘은 밀회를 즐긴다.
떠났던 레옹과의 밀회
그는 우아한 여성의 말할 수 없는 미묘한 매력을 난생 처음으로 맛보았다. 그는 이런 고상한 말씨나 단정한 옷매무새, 잠자는 비둘기와 같은 자태를 접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열광적인 영혼과 그녀 속치마의 레이스를 찬미했다. 게다가 그녀는 상류 사회의 부인이며 기혼녀가 아닌가! 요컨대 진짜배기 정부가 아닌가?
음란의 화신 엠마
변덕스레 자주 바뀌는 기분에 따라 우수에 잠겼다가 금방 쾌활해지고, 수다스럽다가 과묵해지고, 열정적이다가 무기력해지면서 그녀는 레옹의 마음속에 무수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갖가지 본능과 추억을 되살렸다.
그는 그녀가 왜 더욱 격렬하게 삶의 쾌락에 몸을 내던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걸핏하면 화를 내고, 식탐이 많아지고, 음탕해졌다.
그녀가 그의 정부인 것이 아니라 그가 그녀의 정부인 셈이었다. 그녀의 정다운 말과 키스는 그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녀는 도대체 어디서 배운 것일까? 너무나도 깊고 은밀한 나머지 거의 비(非)물질적으로 느껴지는 이런 심오한 퇴폐를 말이다.
레옹과의 밀회에도 만족을 못하자 책을 통해 상상을 통해 그녀만의 환상적인 연인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아침이 될 때까지 음란한 묘사와 피비린내 나는 장면으로 점철된 황당무계한 책들을 읽었다.
그녀는 그에게 계속 편지를 써 보냈다. 여자는 언제나 연인에게 편지를 써야하는 법이니까.
그러나 쓰고 있는 동안 다른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녀의 가장 열렬한 추억과 가장 아름다운 독서와 가장 강렬한 탐욕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환영이었다. 그것은 점점 현실감을 더해 가서 마침내 손에 잡힐 듯한 실감 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녀는 경이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엠마는 자신의 방탕한 생활로 인한 빚더미의 결과가 다가오자 먼저는 레옹에게 그리고 옛 연인 로돌프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그녀는 연인들로부터 완전히 거절을 당하고 끝내 음독자살을 하고야만다.
엠마의 죽음 직전
화창한 날, 너무도 아름다운 날,
열기에 몸 달은 젊은 아가씨, 사랑을 꿈꾼다네.
엠마는 전기 충격을 받은 시체처럼 벌떡 일어났다. 머리칼은 산발이고,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고 입은 크게 벌어졌다.
낫으로 이삭들을 베어놓으면
손으로 부지런히 거둬들이려고
나의 나네트는 허리 구부리고
밭으로, 고랑으로 걸어가네.
“장님이다!”
그녀는 이렇게 부르짖고 나서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소름끼치도록 끔찍하고 절망적인 웃음
이었다. 영원의 어둠 속에서 위협하듯 솟아오는 거지의 흉측한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날은 세찬 바람이 불었다네,
짧은 치마가 들썩거렸다네!
샤를은 그렇게 아내를 보낸 후에 그녀의 연인이었던 로돌프를 바라보며 비참하게 부러워하다가 자살을 한다. 그리고 샤를의 어린 딸은 가난한 친척에 맡겨져 공장에 보내진다.
굴욕을 당하는 면에서는 이보다 더 비참한 남편이 있었으니 바로 '달과 6펜스'의 스트로브다.
달과 6펜스 / 서머싯 몸
화가 폴고갱
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이 소설은 한 중년남성이 자신의 주변 현실을 다 버리고 내면의 예술적 갈망을 쫓아 화가의 길로 접어들면서 나타나는 그의 미술적 천재성과 주변을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그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 중요한 조연의 역할을 하는 부부가 있다.
바로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화가이지만 높은 예술적 안목을 갖춘 '더크 스트로브'
그리고 그의 아내 '블란치 스트로브'
더크 스트로브는 안목이 있는 화가였기에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본다. 그리고 그의 착한 천성때문에 가난한 스트릭랜드의 병든 모습을 보고 집에 데려와 간호까지 해준다. 그런 그의 도움에 감사따윈 할 줄 모르는 스트릭랜드의 인간성을 모르고...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럼 부탁이에요. 스트릭랜드만은 데려오지 마세요. 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아요. 도둑이든 술꾼이든 길거리의 비렁뱅이든 상관없어요. 무슨 일이든 기꺼이 하겠다고 약속할게요. 하지만 제발 스트릭랜드만은 데려오지 마세요."
"아니, 왜 그렇다는 거야?"
"그 사람은 무서워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한테는 무서운 데가 있어요. 우리에게 큰 해를 끼칠 사람 같아요. 전 알아야. 느낌이 그래요. 그 사람을 데려오면, 반드시 끝이 좋지 않을 거에요."
"원,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어?"
"아녜요. 이건 내 말이 맞아요.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말 거에요."
스트로브의 아내는 분명히 스트릭랜드의 등장으로 자신의 모든 것이 변화될 꺼라는 확신을 했던 것 같다. 이성적이라기보다 육감적이고 직감적인 무언가가 그녀에게 드리워진 게 아니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내면 속에 감추어둔 욕망, 잘 억눌러서 현실의 삶과 타협하며 사느라 숨겨진 욕망이 터져나와 자신의 온 삶을 휘감아 버릴까봐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도 비슷한 견해을 내놓는다.
나는 블란치 스트로브가 스트릭랜드를 격렬하게 싫어했던 이유는 처음부터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로브의 열정은 그녀의 그런 본성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녀가 스트릭랜드를 싫어했던 것은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여튼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미리 감내하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며 어쩔 수 없이 승락한다. 처음에는 스트릭랜드를 간호하면서도 더 미워하고 싫어했다. 그러나 점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스트릭랜드도 상태가 퍽 좋아져서 하루 이틀이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들과 함께 스튜디오에 앉아 있었다. 더크와 나는 이야기를 나누고, 스트로브 부인은 바느질을 했다. 그녀가 깁는 것은 아무래도 스트릭랜드의 셔츠 같았다. 스트릭랜드는 드러누워 있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연히 보니 블란치를 빤히 응시하고 있다. 눈길에 묘한 냉소가 담겨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여자는 얼굴을 들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의 표정을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야릇한 당혹스러움이랄까, 아니면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두려움 같은 것이 두 눈에 배어 있었다. 스트릭랜드는 곧 고개를 돌리고 천장을 이곳 저곳 멀거니 바라보았다. 여자는 마냥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는 참으로 설명하기 힘든 표정이 담겨 있었다.
스트릭랜드의 묘한 관능
그가 주는 인상을 뭐라고 표현해야 정확할지 모르겠다. 육체의 휘장은 속이 비쳐 보일듯이 투명했지만, 분명하게 보이는 그것이 딱히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얼굴에는 야수적인 관능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는 해도, 그의 관능성에는 야릇하게 영성이 어려 있는 듯했다. 그에게는 어딘지 원시성 같은 것이 있었다.
점차 회복이 되자 자신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도록 배려해준 스트로브에게 스트릭랜드는 그리는 데 거슬린다며 나가있으라고 할 정도로 뻔뻔스럽다. 그런 그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그 순간, 그의 아내가 갑자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스트릭랜드를 따라가겠다고 말한다.
여보, 저는 이 분을 따라가겠어요. 당신과는 이제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어요.
몇 번의 실갱이 끝에 결국 스트릭랜드의 지저분한 거처에 아내가 지내는 것은 안된다며 스트로브는 자신의 집을 내어주고 떠난다. 그 이후 아내의 마음을 되돌려보려는 구차한 노력이 이어졌으나 실패였다. 오히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야 만다. 그의 아내가 스트릭랜드와의 갈등으로 음독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병원까지 이송되었으나 고통의 눈물로 며칠을 못버티고 숨을 거둔다. 마지막 가는 그 순간까지 스트로브는 그의 아내를 위해 최선을 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만남을 거절한다.
그의 비참함은 그녀가 죽어도 끝나지 않는다. 그 이후 작가를 만나 자신이 화가가 되기까지의 이야기을 들려준다. 가족과 주변인들의 격려와 지지 속에서 나름 화가로서 입지를 굳혔지만 이제는 더이상 그리지 않겠다며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아내를 보내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죽은 그녀를 그리워하며 그녀가 남긴 흔적을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 쪽 구석에 있는 누드 그림을 발견한다. 자신의 죽은 아내를 그린 스트릭랜드의 작품이었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소파 위에 누워 있는 여자의 그림이었다. 여자는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은 몸 위에 살며시 얹어놓고 있었다. 한 무릎은 세우고 다른 다리는 뻗고 있다. 고전적인 자세였다. 스트로브는 눈 앞이 아찔했다.
블란치
였다.슬픔과 질투와 분노가 그를 사로잡았다
. 그는 쉰소리로 울부짖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그림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다
. 한순간도 눈앞에 더 두고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겠어. 그때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튼 그림에다 커다란 구멍을 내줄 작정으로 팔을 막 치켜든 참이었지. 그 순간 그걸 보았던 것 같아"
"그거라니"
"그림을 봤네. 진짜 예술 작품 말일세. 나는 감히 손댈 수가 없었네. 겁이 났어... 정말 대단한, 정말 굉장한 그림이었네. 경외심마저 느껴질 정도였어. 하마터면 무서운 범죄를 저지를 뻔했네. 나는 그림을 좀 더 잘 보려고 몸을 옮겼네. 그때 뭔가 발에 걸려서 보니 내가 떨어뜨린 그림 주걱이었네. 소름이 쫙 끼치더군"
정말 나 역시 그를 사로잡았던 감정을 얼마간 느낄 수 있었다. 기묘한 감동이었다. 갑자기 가치 관념이 다른 세계로 들어선 듯한 기분이었다. 일상의 사물들에 대한 반응이 전혀 다른 나라에 온 외국인처럼 어리둥절하여 서 있었다. 스트로브는 그림에 대해 얘기해 주려고 애썼으나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스트릭랜드는 그때까지 자신을 얽매어왔던 굴레를 과감히 깨뜨려버렸던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뭐랄까, 전혀 생각지 못했던 힘으로 넘치는 새로운 혼을 발견했던 것이다.
강렬하고 특이한 개성을 대담하고 단순하게 묘사한 것만은 아니었다. 살결은 열정에 가득한 어떤 관능, 불가해한 어떤 것을 품고 있는 관능으로 채색되어 있었는데, 그렇다고 채색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중량감, 그러니까 육체의 무게를 뚜렷하게 느끼게 해주는 그런 중량감에 그치는 것만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어떤 영적인 것이, 혼을 어지럽히는 전혀새로운 어떤 영성이 깃들어 있어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상상을 이끌어 가면서, 영원한 별들만이 빛나는 어둡고 텅 빈 우주를, 벌거벗은 영혼이 두려움에 떨면서 새로운 신비를 찾아 모험의 여정을 나선 그런 우주를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스트로브는 그 그림을 차마 찢을 수가 없었다. 물론 예술적 측면에서는 이보다 더한 가치평가가 있을까 싶지만 스트로브는 인간 이하의 굴욕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자기도 그림을 업으로 살아온 사람인데... 그럼에도 그는 예술혼을 이기지 못하고 스트릭랜드에게 자신의 고향에 함께 돌아가 그림을 그리자는 비상식적인 제안을 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소설의 이런 묘사들은 참 기묘할만큼 말이 안되는 것 같은데, 동시에 슬며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핵심 명장면인,
주인공이 집을 버리고 떠난 스트릭랜드를 만나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회유를 하는 장면이다.
"그림은 그릴 줄 아십니까?"
"아직은 안 돼요. 하지만 될 거요. 여기 온 것도 그 때문이지. 런던에서는 바라는 걸 얻을 수 없었소. 아마 여기서는 가능할 거요."
"당신 나이에 시작해서 잘될 것 같습니까? 그림은 다들 십칠팔 세에 시작하지 않습니까?"
"열여덟 살 때보다는 더 빨리 배울 수 있소"
"어째서 그런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잠시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려야 해요" "승산 없는 도박을 하자는 것입니까?....나이가 몇이오? 스물셋?"
....
"난 그려야 해요"
"잘해야 삼류 이상은 되지 못한다고 해봐요. 그걸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다른 분야에서는 별로 뛰어나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아요. 그저 보통만 되면 안락하게 살 수 있지요. 하지만 화가는 다릅니다."
"이런 맹추같으니라구"
"제가 왜 맹추입니까? 분명한 사실을 말하는 게 맹추란 말인가요?"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진실한 열정이 담겨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감명을 받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들끓고 있는 어떤 격렬한 힘이 내게도 전해 오는 것 같았다.매우 강렬하고 압도적인 어떤 힘이, 말하자면 저항을 무력하게 하면서 꼼짝할 수 없도록 그를 사로잡고 있음
을 느낄 수 있었다.
불륜의 관점에서 집중적으로 봤기때문에 미처 나타내지 못한 내용들도 있습니다. 긴 글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글에 댓글이 없죠? ㅎㅎㅎㅎ 저는 파울로 코엘료의 불륜이란 소설을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이상한 시각을 느낀적이 있어요. 불륜이 왜? 불륜이 어때서...? 글쎄요... 쉽게 풀어낼수 있는 소재가 아니라서 그런가요. 아님 다들 불륜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요 ㅋㅋㅋㅋㅋ 큐리어스님은 관능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는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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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 플러스 공감이요ㅎㅎ 코엘류의 책도 읽어보고싶네요 소중한 댓글과 책소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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