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기행

in kr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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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기행

나는 ‘서울기행’이라고 제목을 정했지만 왠지 헛웃음이 나온다. 왜냐하면 ‘기행’이란 말은 사전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여행하는 동안에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것을 적는 것’인데, 요즘 세상에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느긋하게 ‘기행’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 빚에 허덕이는 사람들, 진급을 위해 가정을 포기하는 사람들. 등등. 그래, 서울은 그런 곳이었다. 근데 천하태평하게도, 나는 서울기행이란 주제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3년 전,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서 ‘여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편의점, 점원>
대책 없이 서울로 올라온 나는 청량리역 광장에서 막막함을 느꼈다. 딱히 어디 기댈 곳도 없었고, 수중에 돈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광장 한 귀퉁이에 우두커니 한참을 서있었다. 하늘은 회색이었다. 하늘이 회색이라는 것에서 갑자기 내 식욕이 자극되었다.

나는 근처 편의점에서 사발면 하나를 들이켰다. ‘캬. 역시, 서울 사발면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나는 들뜨는 기분을 억누르며 800원짜리 캔커피도 구입했다. 파랑색 앞치마를 입은 편의점 점원이 안타까운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 점원이 앉았던 의자에는 우연히도 파랑색의 토익 책이 놓여있었다. 하늘이 우중충했다.

<청계천, 중년의 남자>
편의점을 나선 나는 딱히 갈 곳이 없었으므로 일단 청계천으로 향했다. 청계천을 보니 그래도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서울에 왔다는 실감도 났다. 나는 청계천 길을 따라 걸어나갔다.

신설동, 동대문, 종로 순으로 걸어갔다. 나는 한참을 걷다가 불현듯 편의점에서 구입했던 800원짜리 커피가 생각이 났다. 나는 길가의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왠지 뿌듯하고 설렌 마음으로 800원짜리 커피를 개봉했다. 캔의 김빠지는 소리가 내 심금을 울렸다. 커피를 마시자 왠지 내 스스로가 멋있게 느껴졌다.

그리고는 건방진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끊임없이 왔다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흐르는 청계천의 계단에는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검은 낚시 모자를 썼고, 낡고 색이 바랜 붉은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소주병이 쥐어져 있었다. 소주를 병으로 마시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그가 병을 휙 들어서 입에 가져갈 때 마다 병 속의 술들이 출렁거렸다. 나는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나는 들고 있던 커피를 휙 하니 입에 털어 넣었다. 설탕이 필요했다.

<종로, 동남아 게이>
벌써 어두운 저녁이 되었다. 하루 종일 종로바닥을 유령처럼 배회하던 나는 찜질방에 가기로 했다. 찜질방에서는 8천원으로 발 뻗고 잘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질질 끌고 다니던 커리어 가방을 안내데스크에 맡기고, 옷을 벗고, 찬물에서 개헤엄을 치고, 따스한 물에서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고, 바나나우유를 먹고, 남자들의 문신을 보고는 내 눈빛을 착하게 바꾸었고, 사우나에서 나눠준 옷을 입었다.

나눠준 옷에서는 종로 뒷골목의 냄새가 났다. 나는 굉장히 피곤했으므로 바로 수면실로 향했다. 그런데 동남아인 남자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외국인이 신기했으므로 나도 역시 그를 웃으며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수면실로 들어갔다. 수면실은 굉장히 넓었다.

그 넓은 수면실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수면실의 가장 끝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수면실 입구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실눈을 떠보았다. 아까 그 동남아인 남자였다. 그 남자의 발소리가 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설마 이 넓은데 이쪽으로 오진 않겠지.’ 그러나 그 발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는 내 옆에 누웠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나는 일단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속옷을 내리더니 수음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일어나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나는 재빨리 그러나 맥없이.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나올 때까지, 그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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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의 꾸준한 포스팅을 응원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ㄷ ㄷ ㄷ 마지막은 공포쪽으로

마지막은 좀 무서웠습니다...ㅎㅎ

언제부터인가 저는 괜히 그런곳들을 피해 가네요~~ @jjangjjangman 이벤트 참여하고 있어 남기고 갑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많이 외로워서 그랬..............아니 집 놔두고 왜 거기서!!

그러게 말입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