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에도 여러 책을 읽었습니다. 그 중 소설만 따져보니 총 94권이네요. 94권의 소설 중에서, 특히 올 해 처음 읽기 시작한 장르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 써보고자 합니다.
2016년에는 주로 SF를 즐겨 읽었다면, 2017년은 일본 미스테리 소설을 중심적으로 읽었습니다. 사실 일본 미스테리 소설 중에서 제가 즐겨 읽는 작품은 마쓰모토 세이초 부터 미야베 미유키까지 이어지는 '사회파 미스테리' 작품들입니다.
흔히 사회파 미스테리라고 불리우는 작품들은 '범죄에 대한 추리' 보다는 '범죄 그 자체의 사회적 성격'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우리가 흔히 추리소설이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기가 막힌 트릭들, 주어진 단서들을 논리적으로 해석하여 사건의 진상에 이르는 탐정들과는 좀 거리가 있죠. 사회파 미스테리는 범죄에 대해 접근하는 탐정이 사건에 좀 더 깊이 다가갈 수록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이 드러나는 일종의 르포 같은 재미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회파 미스테리 작가 중 하나가 한국에서도 널리 사랑 받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입니다. 이를테면 1년 전 JTBC에서 드라마로도 방영된 미야베 미유키 원작의 <솔로몬의 위증> 이 있는데요, 한 학생이 자살하게 되면서, 그 자살로 인해 학교 폭력과 외모지상주의, 경쟁적 입시 체제, 교사들의 관료주의 등 학교 내부의 문제들과 사건을 선정적으로 조망하는 언론의 문제들에 대해 고교생인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작품이죠. 한국에서 드라마화 되면서, 여기에 세월호 참사라는 사회적 맥락을 덧붙여 한층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제가 워낙 사회파 미스테리를 높게 평가하다 보니, 그 동안 일본의 신본격 미스테리 작품들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가지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신본격 미스테리란, 우리가 흔히 추리소설이라고 했을 때 생각하는 요소들을 극대화 시켜 90년대부터 일본에서 큰 유행을 한 유형의 작품들을 이야기합니다. 트릭, 수수께끼, 영리한 탐정, 논리와 두뇌 싸움 등이 신본격물의 특징이죠.
저 같은 경우는 어린 시절 <XX관의 살인> 시리즈로 유명한 아야츠지 유키토로 신본격 미스테리를 처음 접했다가, 이건 추리 소설보다는 공포 소설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기도 해서 더 신본격 쪽과 멀어지게 된 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본격 미스테리 작가 중에서 오랜만에 제 관심을 끈 작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늘 이야기할 '아리스가와 아리스'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들은 크게 두 개의 시리즈로 나뉩니다. 재밌게도, 두 시리즈 모두 등장 인물의 이름이 작가의 이름과 같은 '아리스가와 아리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시리즈의 인물들이 같은 인물인 것은 아닙니다. 흔히 '학생 아리스' 시리즈로 불리는 시리즈에서는 대학 추리소설 동호회의 회원이자 추리소설 작가를 꿈꾸는 대학생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작가 아리스' 시리즈에서는 그럭저럭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인 30대 남자인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등장합니다. 이 아리스가와 아리스들은 작품 내에서 '왓슨 역'을 맡습니다. 명탐정은 따로 있다는 얘기죠. 학생 아리스 시리즈에서는 추리소설 동호회의 부장인 에가미 지로가 탐정 역할이고, 작가 아리스 시리즈에서는 아리스의 친구이자 대학의 범죄사회학 교수인 히무라 히데오가 탐정 역할을 맡습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일본의 신본격 작가들이 대개 그렇듯 엘러리 퀸의 열광적인 팬입니다. 그래서인지 여러모로 엘러리 퀸을 오마쥬하는 구석이 많죠. "여기까지 왔으면 당신도 범인을 추리할 수 있다! 단서는 모두 제공되었다!"라며 독자에게 던지는 도전장을 작품 내에 삽입하는 고전적인 장면이라던가, 논리적 소거법으로 범인을 맞추는 방식이라거나 하는 것이 딱 엘러리 퀸 스럽습니다.
'학생 아리스'시리즈는 총 네 작품이,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총 아홉 작품이 한국에 소개되어 있는데요, 저는 모두 지난 여름 휴가 기간에 열심히 탐독했습니다. 두 시리즈 모두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듯 한데, 저는 개인적으로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가 더 재밌더라구요.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탐정역은 추리소설동호회의 부장이자 아리스의 선배인 에가미 지로인데, 추리소설의 탐정들이 다들 그러하지만 이 에가미 선배가 참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보통 탐정들은 머리가 워낙 좋은 나머지 좀 성격이 삐뚤어지거나 반사회성이 강한 캐릭터들이 많고, 또 그런 요소가 오히려 캐릭터에게 개성을 주는 방식으로 그려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에가미 선배는 사람됨이 반듯하고 선량하며, 진중한 성품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앞으로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캐릭터입니다. 사람들을 휘어잡는 지적이고 신비한 분위기가 있으며, 그러면서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리더십이 있죠. 이런 인물은 보통 탐정물 주인공 보다는 판타지 소설의 용사에 가까운... 그런 캐릭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의 탐정역으로 전혀 어색하지 않은 존재감을 보여주니 어떻게 보면 굉장히 특이한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이 에가미 선배의 캐릭터성이야말로 '학생 아리스' 시리즈를 더 재밌게 만들어주는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특징이라면 지금까지 소개 된 네 작품 모두 클로즈드 써클 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가의 데뷔작이자 1부인 <월광 게임~Y의 비극'88~>은 화산 분화로 인해 탈출로가 끊긴 산 속 캠핑장의 대학생들, 2부인 <외딴 섬 퍼즐>은 말 그대로 폭풍으로 배가 뜨지못하는 상황의 외딴 섬, 3부인 <쌍두의 악마> 역시 태풍으로 강의 다리가 끊긴 폐쇄적 마을이 배경입니다. 4부인 <여왕국의 성>으로 가자면, 무려 신흥 종교 집단의 본부에 어떠한 사정으로 인해 추리소설 동호회 부원들이 갇히게 됩니다. ㅎㅎㅎ 이렇게 이야기하자면 너무 추리소설의 클리셰들이 반복되는게 아닌가 싶지만, 그게 진부하게 느껴진다기 보다는 전성기 시절의 소년탐정 김전일을 볼 때 느꼈던 재미 같은게 느껴지는게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매력인듯합니다.
사실 '학생 아리스' 시리즈도 뭐 작품마다 편차가 있긴 합니다. 1부인 <월광게임>은 주어진 단서를 토대로 논리적으로 사건을 추리한다는 측면에서 좀 허무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학생 아리스' 시리즈 전반으로 이어지는 특유의 청춘물스러운 분위기를 잘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라이트노벨과 유사한 재미를 주기도 하죠. 2부인 <외딴 섬 퍼즐>, 3부인 <쌍두의 악마> 는 일반적으로 추리소설이라고 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딱 그런 작품들입니다. 평범하지만, 머리를 굴리는 재미가 있죠. 제가 가장 높게 치는 작품은 4부인 <여왕국의 성>입니다.
<여왕국의 성>은 1989년의 일본을 무대로 하는데, 일본 버블 경제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 등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맞춰 신흥종교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옴진리교에서 힌트를 얻었겠죠? 그래도 상대가 옴 진리교처럼 너무 막나가는 신흥종교라면 추리고 뭐고 개입되는 순간 살해 당할 수 있으니, 일본판 사이언톨로지 비슷한 종교가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외계인과 관련된 여러 떡밥들을 가지고 이야기에 살을 붙여서, 이런 음모론 좋아하는 분들은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듯 합니다.
저는 추리소설을 읽을 때 처음부터 복선을 열심히 체크하면서 읽는 편인데 <여왕국의 성>은 좀 무리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 전개임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초반부터 성실하게 복선을 깔아둬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신흥종교의 '미소녀 교주'의 존재가 일종의 맥거핀 효과를 내면서 이야기의 흥미를 더하는 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단순히 클로즈드 써클에 갇히고, 거기서 살인이 일어나며, 이를 해결하는 단순한 패턴이 아니라 주인공들을 가둔 신흥종교 집단이 있고, 이들의 감금 이유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탈출 가능성이 엿보인다거나 감금 이유에 대해서도 추리해 볼 수 있는 등 여러 미스터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이야기라 상당한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흡입력 있게 읽어내려갈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받은 작품인 만큼, 퀄리티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신본격 미스테리 작가의 작품들은, 제가 아야츠키 유키토에게 느꼈던 부담감처럼 살인이 엽기적이라던가, 왜곡된 욕망과 동기에 의해 범죄가 일어난다거나 합니다. 보다보면 좀 으슬으슬하죠. 그런데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상당히 이야기 구조가 심플하고, 동기 역시 일반적이라 그런 부담감이 덜한 편입니다. 동시대에 데뷔한 신본격 작가인 오이하라 이치의 경우 한 권 한 권 읽을 때 마다 독자의 정신 상태가 어그러지는걸 즐기는 듯한 이야기를 즐긴다면,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순수하게 범인이 저지른 범죄를 보고 범인을 맞춰나가는 재미에 집중합니다. 탐정도 반듯하고 이야기도 깔끔한데다가, 청춘물의 정취도 있으니 일본 미스테리에 관심을 가지고 입문할 작품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작가 아리스' 시리즈에 대해서도 좀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이미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작가 아리스 시리즈에 대해서도 시간 되는 대로 또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 4부 <여왕국의 성> 알라딘 링크입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97407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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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몇 년 독서를 지독하게도 안하고 있는데 kyc님 글을 읽으니 뽐뿌가 오네요 ㅋㅋ 한 번 알아봐야겠습니다 예전에 일본 추리 소설들을 재밌게 읽은 기억도 있고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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