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지면서 얼굴에 내리쬐는 햇볕이 싫지 않았던 아침. 집 모든 곳에 나있는 창은 (화장실 빼고) 해가 뜨고 지는 내내 집 내부 구석구석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초췌한 내 몰골을 더욱 비리하게 만든다. 환하다 못해 반짝이는, 시간이 멈춘 듯한 거실 가운데 덩그러니 앉아 있으면 내 존재 자체가 먼지 속으로 사라지는것만 같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보낸 일주일 중 가장 힘들었던 목요일은 다행히도 아무런 일정이 없는 날이였는데 집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화르르 타올라 옷을 주섬 주섬 갈아입었다가, 바지에 다리를 넣는 그 짧은 와중에 의지가 훅 사그라들어 벗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뭘했냐고? 다시 약을 입에 털어넣고 누웠지 뭐.
즐겨 읽던 책과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옷가지들이 슬슬 방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었기에 청소를 더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그마저도 미루고 미루다가 저녁 6시쯤 천천히 기지개를 펴고 앉아 옷가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툭. 눈물이 떨어지는게 아닌가. 엄마가 작년에 사준 옷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같이 입자며 엄마도 하나 사고 내게도 사주셨던 얇은 가디건이였다.
문득 엄마가 보고싶었다. 내가 이러고 있는 걸 알면 엄마가 얼마나 속상해 할까. 엄마의 작지만 단단한 손으로 내 얼굴을 마구 문지르며 엄마의 가슴팍으로 당겨 꼭 안아주겠지. 엄마한텐 너가 최고야, 진심 가득 담긴 말을 해주면서. 엄마를 떠올리는 것. 그것이 시작이였다. 며칠간 제대로 힘을 실어보지 않은 힘없는 다리가 빳빳하게 경기를 일으켜지고 허리가 펴지기 시작한 것은. 몸을 곧추 일으켜 세워 옷가지를 들고 천천히 가져다 놓았다.
정리란 참 쉽구나. 옷을 벗고 바로 개어 놓으면 나중에 또 귀찮게 정리할 필요가 없으니까 더 쉽겠지. 앞으론 바로바로 정리하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을 푹 쉬고 나니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마음 속으로만 외던 주문을 드디어 입밖으로 내도 될것 같았다. 하… 나는 괜찮다. 억지로 아니여도 된다.
옷을 정리하고 책을 쌓아놓고 둘러보니 침대방 뿐만이 아니였다. 집은 이미 전쟁터였다. 며칠째 돌리지 않은 청소기에 바닥은 소복히 먼지친구들이 쌓여있었고 부엌엔 산더미 같은 설겆이에 빈 플라스틱 물병들이 굴러다녔다. 이 꼴을 보면 우리 어머니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마음 아파하시겠지. 그래, 그럼 치워야겠지. 생각해보니 꽤나 간단한 대답이였고, 그렇게 청소는 시작되었다.
내 상태를 인정하는 첫 걸음이 시작이지 않은가. 청소를 마치고, 두드러기가 올라와 파티를 벌이고 있는 푸석푸석한 얼굴에 마른세수를 한 다음 오랜만에 목욕을 재개했다. 평소보다 조금은 더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몸 구석구석을 닦았다. 샤워를 하기 전 인간은 씻어서 뭐 해 싶다가도 샤워하고 나면 역시 사람은 씻고 살아야지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확실히 뜨거운 스팀에 몸을 굴리고 나니 훨씬 가벼워진 느낌이 든다.
며칠째 부모님과 통화를 하지 않았다. 잠깐 안부 문자는 했지만 부러 초췌해진 얼굴이 드러나는 화상전화는 피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거짓 웃음으로 훼이크를 부려봐도 부모님의 날카로운 촉은 피해갈 수가 없는 법. 아예 피해가기 신공으로 전화를 부러 받지 않은지 벌써 일주일이 넘어간다. 문득 든 생각은 내 가장 원초적인 진심을 아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가족이기에 그토록 피한 것이 아닐까. 가장 아픈 곳을 제일 잘 알아차릴 유일한 존재니까.
그렇기에 더욱 피하고 싶었던 청개구리 딸 마음을 엄마 아빠는 알까. 그리고 충분히 우울했던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견딘 나는 조금씩 극복해 내고 있다는 걸, 알아주실까. 물론 비밀이지만. 후로 나는 차차 평소 하던 루틴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배고프지 않아도 뭐든 입에 쑤셔넣기, 따듯한 물도 마시기. 노래를 집안 가득 틀어놓고 머리속으로 상상하기. 간단한 요가를 하기 등등.
나는 매트 위에서 절망했고, 매트 위에서 희망을 더듬었다. 괜찮아질거야 라는 위로의 말 조차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들이지 않았고 아픔을 온몸으로 견뎌내었다. 좌절했지만, 그 좌절을 딛고 나를 부여잡았다. 물론 아직 약을 완전히 끊을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1년간은 복용하기로 사전 상담을 했던 부분이기에 지킬 생각이다.
곧, 온건하게 기록된 극복 과정을 조용히 웃으며 담담히 주치의 선생님께 보여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살면서 언제고 또 찾아올 우울. 그 놈을 이번엔 정면으로 맞서 넘겼으니, 다음번도 두렵지 않노라고 허세를 부리면서.
이야기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지금은 극복하셨다지만 만약 또 우울이 찾아왔을 때는 여기저기 이야기하세요.
그럼 아마 훨씬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
감사합니다. 치료과정에서도 나 우울하다, 를 티내야 한다고 하시더라구요. 혼자만 안고 있으면 더욱 악화된다구요. ^^ 저도 음악으로 글로 풀어내니 훨씬 극복에 도움이 된 듯 합니다.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
일단 극복하셔서 다행입니다.
Posted using Partiko Android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
극복해야죠. ^^ 감사합니다.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
토닥토닥 🌹
Posted using Partiko iOS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
감사합니다.. 토닥토닥에 마음 녹아버림 ^^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
글쓰는 것 자체가 치유라네요.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제가 다 읽진 못 하지만 ㅎ).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
가끔 들러주셔서 댓글 남겨주시는것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 소통이 스팀잇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
정말 괜찮아지면 비로소 어지럽힌 시야가 눈에 들어와요. 그렇게 조금씩 정리하다보면 머릿 속도 정리되고- 방 상태 = 제 마음 상태 와 같다는 생각을 자주해요.
시련이 오면 정면으로 돌파해야 가장 빨리 통과한다고 하는데 레일라님 극복일기 읽다보니 그 말이 생각나네요:D 피할 수 없으면 온몸으로 아파야 한다고
잘하셨어요. 역시 엄마가 최고에요! 레일라님 내면의 힘을 믿어요!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
약은 빠트리면 않됩니다 간단한 운둥이라도 매일 꾸준히 하면 좋을거예요 밖에들어 냈다는것이 치료가 되어가고있는 징표예요
Posted using Partiko Android
Downvoting a post can decrease pending rewards and make it less visible. Common reasons:
Subm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