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장 참여] 사람,혹은 사랑의 뒷면은 울퉁불퉁하고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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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남자친구와 걷는 것을 봤어. 너의 표정은 밝았고 즐거워 보였어. 네 남자친구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어. 내 후배기도 하고. 객관적으로 잘생기고, 사려깊고, 친절한 사람이였지. 나는 멈춰서서 너의 표정을 훔쳐 보았어.
좋아 보였어.

어제 꿈에 네가 나왔었어. 모래사장이 있었고, 그리고 네가 나왔었어. 가만히 서서 나를 보고 있었지. 꿈을 생각하며 멀리서 너희 둘을 봤어. 너흰 게시판 앞에서 사이좋게 손을 잡고 웃고 있었지.
그래. 좋아 보였어.

너의 남자친구는 내게 정중하게 인사했어. 넌 남친이 안 볼때 살짝 손을 흔들어 줬지. 내가 이방인처럼 느껴져 간단한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했어.

갈 길을 가면서 생각했어.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내겐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닿지 않을 만큼 멀리, 평생 볼 일 없을 달의 뒷면처럼.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든, 내가 호의를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말야.

그렇지만 넌 좀 달랐어.

이년 전, 널 처음 봤을 때. 나는 네 이름을 몰랐지만 너는 내 이름을 알았지. 내가 너의 이름을 모른다고 하자 '너무해요!'라고 외치며 두 눈을 질끈 감던 널 아직도 기억해.

넌 나에게 산소를 줬어. 사랑은 공기와도 같다고 기욤 뮈소가 썼는데, '구해줘' 였던가? 걔 소설은 다 비슷비슷해서 한 권을 읽든 여러 권을 읽든 다 비슷하게 느껴지더라. 어찌됐든, 어두운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내게 자신의 산소탱크를 물려주듯 말했지.

'저 xxx에요!'라고 또박또박 알려줬어.

넌 그 이름이 내 꿈 속에, 잠들지 못하는 새벽 두 시에, 한낮에 혼자 밥을 먹던 내 옆자리에 끼어들었다는 걸 모르겠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길고 긴 밤동안 내게 이름을 알려주던 너의 목소리가 나를 지나쳤어.

친해지고 싶었어. 하지만 우리는 그저 과 후배와 선배 사이었고 연락을 먼저 하기엔 나는 너무나 멍청했지. 내게는 너무 어려웠던 문제였어.

내가 예전 아는 형의 연애 상담을 해줬던 적이 있었어. 그 형은 내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고, 어떻게 해야 할까 내게 물었어.

'그냥 같이 밥 먹자고 해!'. 간단한 조언과 '그런다고 세상이 무너져?' 란 물음을 동봉해 답을 했지. 그런데 형은 내게 진지하게 대답했어.

응, 세상이 무너져.

나는 그 말을 절절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난 꽤나 웃기고 쾌활하고,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행동해. 하지만 실제론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고,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지만 생각하지.

남들은 잘 모르지만 난 알아.그래서 네가 나한테 친절했을 때 난 무서웠어. 너는 아무 것도 모르고 내게 친절했지. 주변에 알려진 모습과 페이스북에서의 모습을 본 걸까? 그건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냥 넌 내게 친절했던 걸까? 왜 그렇게 밝게 인사해줬던 걸까?
넌 내 진짜 모습을 모르잖아. 동굴 속의 괴물처럼 어둡고 달 뒷면처럼 울퉁불퉁한 날 모르잖아.

이런 생각을 자꾸 하다 보면 난 무서워져. 사람들이 내 우울함을, 어두움을 알게 되면 날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돼. 그래서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나를 버리기 전에 먼저 도망쳐 버려. 멀리, 멀리.

이번엔 도망치고 싶지 않았었어. 하지만 다가갈 용기도 없었지. 그래서 달처럼 네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만 했어. 그러다가, 결국은.

네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된 날 나는 새벽 내내 울었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변만 빙빙 돌던 나와 그런 나를 만든 내 옛날과 한심한 지금 모습 모두 다 싫었어.

차라리 네가 나에게 인사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너는 지금도 나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해주지. 네가 알바하는 곳에 자주 찾아가고 싶어지게 해.

그러지 마. 결국 난 다시 물 속으로, 어두운 우주 속으로 돌아가야 해. 거기가 내 집이고 내가 평생 살던 곳이니까.

있잖아, 심해어는 말야. 물 위로 올라오면 부레가 터져. 깊은 곳에 사는 심해어를 급작스럽게 물 밖으로 꺼내면 말야. 심해어를 누르고 있던 수압이 급격히 약해지면서, 부레 안의 공기가 팽창해. 결국은 갈기갈기 찢어져 죽어버리고 말지.

그러니까 심해어는 그냥 물 깊은 곳에 살게 해야 해.

네가 내게 인사를 하면 말야. 공기를 건네주면 말야, 나는 순식간에 물 밖으로 쏘아져 나와. 그 날은 내 부레가 하루 종일 아프지. 내가 일하는 가게에 와서, 남자친구의 등을 바라보는 너의 눈빛이 말야, 나에게 한번도 보여주지 않던 눈빛이 너무나 아파. 가게를 나가며 내게 인사하는 게 너무나 아파.

그러니까 말야. 이제 나를 좀 모른 척 해줘.

안녕. 이젠 잠수할 시간이야.

이러고도 또 마주쳐 버렸지. 여전히 밝게 인사해 주더군. 이제는 심해어는 아니고 고등어 정도로 버틸 수 있게 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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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구 갑니다 ^^

읽어주시는 분이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 같아요! 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 잘 읽었다고 하기엔 슬픈 이야기지만요.
다음번엔 좀더 용기를 내보세요. 세상이 무너지긴 하는데, 그래도 살아져요.
무너진 폐허속에서, 좀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살아져요.
(어차피 용기를 안 내도 그 사람이 떠나가면 결국 세상이 무너지잖아요..)
그러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되면 다시 멋진 세상이 만들어질 거에요. ^^

실제 경험 이신가요?

마음이 짠하네요...

생각나게 하지 말아주세요 ㅠㅠ 이번에도 한번 마주쳐서 차에 치이는 기분이 들었답니다...

그러셨군요...
저두 사랑에 대한 기억들이 참 많네요..
가슴아프게 했던 사랑
가슴 아팠던 사랑..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하지만 상처는 영원히 남는것 같습니다.

힘내시란 말보다 많이 아파 하시고 가슴에 고이 간직하세요...
더 크고 행복한 사랑이 찾아 올겁니다.

감사합니다. 새 사랑을 기다리며 노력해봐야겠어요.

반드시 지금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받으실겁니다....

정말 잘 읽고 갑니다. 팔로우도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팔로우했어요. 글 기대할게요!!!

자주 뵈어요^^

남자는 이성의 친절함에 호감이나 사랑이라고 쉽게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거 같아요.ㅎㅎ

진화심리학적 관점으로 여자가 진짜 호감을 가지고 있을 때 '아, 저 여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건 엄청난 손해기 때문에 남자는 착각하는 편이 훨씬 이득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우와.. 필력이 좋으시네요! 잘 읽고 갑니다! 실제 경험이신지 궁금하네요!

네. 실제 경험이 아니라면 이런 글이 나오지 않아요. 흑흑. 뻐끔뻐끔...

안녕 이젠 잠수할 시간이야 이 말 너무 좋네요 이 한문장으로 더 빛나는 글이 된것 같아요^^

볼드처리한 보람이 있군요. 유리자드님의 글도 빛이 느껴진답니다. 비 피해는 이제 거진 수습돼셨나요??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남자라면 가지고 있을 경험들을 공감하며 읽습니다. 이번 백일장은 공감되는 글이 정말 많네요.

모두들 차에 치이듯 사랑이 시작되곤 하죠 자신의 이름 세글자를 알려주다니 반칙 아닙니까

흐... 이번 백일장은 가슴아픈 이야기들이 너무 많네요 ㅠㅠ 에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마음 한복판에 왜 그리 커다란 할큄을 주고 떠나야만 하는지. 그냥 조용히 갈수만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

마지막 문장을 보니 심해어가 한번씩 부레의 고통을 겪고 나면 조금씩 조금씩 수면위로 올라올 수 있는 것 같군요. 이 담번엔 평생을 수면위의 따듯한 햇볕아래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인연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 감사합니다!

p.s. 근데 저는 개복치입니다. 개복치는 조금의 잘못된 자극을 받으면 죽어버리지요. 저는 문학 개복치라 너무 좋은 글을 만나면 가슴이 터져 죽어버립니다 ㅠㅠ 죽을 위기를 맞았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겠죠.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중입니다. 부레가 아프지 않을 때까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좋은 인연이 있겠죠!
문학 개복치라니 좋은 표현이군요. 마진숏님의 감상평을 읽으면 정성과 진심을 담아 쓴 글인게 느껴져서 기분이 좋아져요!! 그리고 제 글이 마진숏님의 가슴을 울렸다니 기쁘네요.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토닥토닥.... 달의 뒷면까지 보듬어주고, 숨을 고르면서 천천히 고등어를 물 위로 인도해 줄 사람이 꼭 나타날거에요! 빈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저는 인연을 믿기에, 꼭 그런 사람이 르캉님 앞에 나타날 거라고 믿어요:)

가나님의 말에 위로를 받아요. 감사합니다. 언젠가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겠죠. 내 뒷면을 이해하기 위해 저도 다시 가라앉아 볼게요. 인연을 믿으며 나를 사랑해봐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실제 본인의 사연같으네요.

모든 작가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법이죠.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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