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알렉산드로스 (19)
알렉산드로스와 마케도니아 군대의 마지막 고난의 행군은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하는 손학규의 대모험을 방불하게 했다.
헛헛한 마음을 바다를 보면서 달래려는 심사에서였을까? 알렉산드로스는 귀로로 물길을 택했다. 그러나 뗏목과 나룻배를 타고서 강을 따라 바다로 향하는 알렉산드로스의 여정은 평화롭고 유유자적한 여행길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록 느릿느릿 움직이기는 했어도 그는 눈에 보이는 도시란 도시는 죄다 공격해 정복했다.
이 정복여행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전투에 능하기로 정평이 난 말로이족을 공격할 때의 일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제일 먼저 성벽에 오른 알렉산드로스는 사다리가 산산조각 나는 바람에 성 안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호위병 두 명만이 그를 따라온 상황이었다. 적병들은 고립된 알렉산드로스 일행에게 맹공을 가했다.
이윽고 두 명의 호위병은 죽거나 치명상을 입고서 전투불능 상태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가슴에는 화살을 맞고, 목에는 몽둥이를 맞았다. 그라니코스 강변에서의 위기 못잖은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본대가 너무 늦지 않게 성 안으로 쇄도한 덕분에 왕은 이번에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가슴받이를 뚫고 알렉산드로스의 갈비뼈에 박힌 화살촉은 넓이가 손가락 세 개에, 길이가 역시 손가락 네 개만 했다. 화살에 직격당한 후유증으로 알렉산드로스는 식이요법까지 가미된 치료를 오랫동안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또다시 배에 올라 바다로 가는 여행을 재개했다. 크고 작은 전투들 또한 다시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열 명의 나체 철학자들을 포로로 붙잡아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철학적 질의응답을 벌였다.
알렉산드로스가 물었다.
“인간이 신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철학자가 답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면 됩니다.”
알렉산드로스가 다른 철학자에게 물었다.
“삶과 죽음 중에 무엇이 더 강력한가?”
그 다른 철학자가 답변을 했다.
“삶입니다. 수많은 불행을 지탱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이 마케도니아에 대한 반란을 선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원 목숨을 살려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승부욕도 세지만, 호기심 또한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마케도니아에게는 골칫거리였던 이들 이방인 철학자들을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런 거추장스러운 즉문즉답의 자리를 아마 애당초 만들지조차 않았으리라.
강을 따라 바다로 내려가는 여정은 일곱 달을 잡아먹는 대장정이었다. 바다에 다다른 알렉산드로스는 네아르코스를 해군 대장으로, 오네시크리토스를 최고 항해사로 각각 임명한 다음 인디아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면서 페르시아만 방면으로 항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 스스로는 육로를 통해 귀향길에 나섰는데 오레이타이 족의 영토를 가로지르는 60일 동안에 그는 과거 전투에서 잃어버린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병력을 무더위와 식량난과 이에 따른 여러 가지 질병들로 잃게 되었다. 인도로 출발할 당시 거느렸던 휘하 병력의 4분의 3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해야만 할 사실은 그가 인도 원정에 착수했을 때 보병과 기병을 통틀어 13만 5천 명이라는 적지 않은 숫자의 군사들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이 무렵의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마케도니아 출신 병사들 이외에도 많은 이민족들이 가세한 다국적군의 성격을 띠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게드로시아에 도착해서야 고난의 행군이 끝나고, 풍요한 생활이 돌아왔다.
이후의 행군은 우리가 오늘날 브라질의 유명한 리우 카니발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성대한 축제 퍼레이드를 방불케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크고 호화롭게 꾸며진 마차 위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먹고 마셨으며, 여러 지휘관들은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는 자줏빛 차양을 친 다음 목에 꽃다발을 걸고서 왕과 마찬가지로 술과 음식에 흥청망청하게 탐닉했다. 일반 병사들은 하나같이 손에 술병과 술잔을 들고 천천히 비틀비틀 걸어갔다. 투구와 방패와 창 같은 무기류는 보이지 않았고, 그 대신 여인들의 애교 석인 음성과 악사들이 연주하는 즐거운 음악소리가 군대와 함께했다.
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알렉산드로스 (19)
알렉산드로스와 마케도니아 군대의 마지막 고난의 행군은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하는 손학규의 대모험을 방불하게 했다.
헛헛한 마음을 바다를 보면서 달래려는 심사에서였을까? 알렉산드로스는 귀로로 물길을 택했다. 그러나 뗏목과 나룻배를 타고서 강을 따라 바다로 향하는 알렉산드로스의 여정은 평화롭고 유유자적한 여행길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록 느릿느릿 움직이기는 했어도 그는 눈에 보이는 도시란 도시는 죄다 공격해 정복했다.
이 정복여행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전투에 능하기로 정평이 난 말로이족을 공격할 때의 일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제일 먼저 성벽에 오른 알렉산드로스는 사다리가 산산조각 나는 바람에 성 안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호위병 두 명만이 그를 따라온 상황이었다. 적병들은 고립된 알렉산드로스 일행에게 맹공을 가했다.
이윽고 두 명의 호위병은 죽거나 치명상을 입고서 전투불능 상태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가슴에는 화살을 맞고, 목에는 몽둥이를 맞았다. 그라니코스 강변에서의 위기 못잖은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본대가 너무 늦지 않게 성 안으로 쇄도한 덕분에 왕은 이번에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가슴받이를 뚫고 알렉산드로스의 갈비뼈에 박힌 화살촉은 넓이가 손가락 세 개에, 길이가 역시 손가락 네 개만 했다. 화살에 직격당한 후유증으로 알렉산드로스는 식이요법까지 가미된 치료를 오랫동안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또다시 배에 올라 바다로 가는 여행을 재개했다. 크고 작은 전투들 또한 다시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열 명의 나체 철학자들을 포로로 붙잡아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철학적 질의응답을 벌였다.
알렉산드로스가 물었다.
“인간이 신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철학자가 답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면 됩니다.”
알렉산드로스가 다른 철학자에게 물었다.
“삶과 죽음 중에 무엇이 더 강력한가?”
그 다른 철학자가 답변을 했다.
“삶입니다. 수많은 불행을 지탱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이 마케도니아에 대한 반란을 선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원 목숨을 살려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승부욕도 세지만, 호기심 또한 강한 사람이었다. 그가 마케도니아에게는 골칫거리였던 이들 이방인 철학자들을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런 거추장스러운 즉문즉답의 자리를 아마 애당초 만들지조차 않았으리라.
강을 따라 바다로 내려가는 여정은 일곱 달을 잡아먹는 대장정이었다. 바다에 다다른 알렉산드로스는 네아르코스를 해군 대장으로, 오네시크리토스를 최고 항해사로 각각 임명한 다음 인디아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면서 페르시아만 방면으로 항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 스스로는 육로를 통해 귀향길에 나섰는데 오레이타이 족의 영토를 가로지르는 60일 동안에 그는 과거 전투에서 잃어버린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병력을 무더위와 식량난과 이에 따른 여러 가지 질병들로 잃게 되었다. 인도로 출발할 당시 거느렸던 휘하 병력의 4분의 3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해야만 할 사실은 그가 인도 원정에 착수했을 때 보병과 기병을 통틀어 13만 5천 명이라는 적지 않은 숫자의 군사들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이 무렵의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마케도니아 출신 병사들 이외에도 많은 이민족들이 가세한 다국적군의 성격을 띠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게드로시아에 도착해서야 고난의 행군이 끝나고, 풍요한 생활이 돌아왔다.
이후의 행군은 우리가 오늘날 브라질의 유명한 리우 카니발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성대한 축제 퍼레이드를 방불케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크고 호화롭게 꾸며진 마차 위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먹고 마셨으며, 여러 지휘관들은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는 자줏빛 차양을 친 다음 목에 꽃다발을 걸고서 왕과 마찬가지로 술과 음식에 흥청망청하게 탐닉했다. 일반 병사들은 하나같이 손에 술병과 술잔을 들고 천천히 비틀비틀 걸어갔다. 투구와 방패와 창 같은 무기류는 보이지 않았고, 그 대신 여인들의 애교 석인 음성과 악사들이 연주하는 즐거운 음악소리가 군대와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