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위기 극복의 리더십 : 카밀루스 (5)
독소 전쟁 초기의 소련군의 졸전은
투하체프스키(아랫줄 제일 왼쪽) 원수와 같은
유능한 야전 지휘관들이 무더기로 숙청당한 탓이 컸다.
로마군 역시 비슷한 이유로 갈리아인들에게 연전연패했다.
페티알레스는 로마의 제2대 임금인 누마 폼필리우스 왕이 창설한 사제 계급으로서 이들은 평화를 수호하고 전쟁의 정당성을 판별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페티알레스는 파비우스 가문의 무모한 행동을 비판하면서 그들의 잘못된 처사를 처벌함으로써 전쟁을 피할 것을 주장했다. 반면에 민중은 무기를 들 것을 요구했다. 민중과의 갈등을 원치 않았던 원로원은 파비우스 형제들을 군사 호민관에 임명하여 갈리아인들의 부아를 더욱 돋웠다.
갈리아인들은 숫자도 많았지만 사기나 장비 면에서도 강하면 강했지 약하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브렌누스라는 지모가 뛰어난 지도자가 이들을 이끌었다. 브렌누스는 로마로 진격하는 동안 지나치는 마을과 농토를 약탈하지 않는 이례적인 인내력을 발휘했다. 그 덕분에 로마 편에 서서 갈리아인들의 배후를 위협할 수도 있었을 여러 도시들과 우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 놈만 팬다”는 브렌누스의 전략이 주효한 까닭에 로마는 갈리아와 동맹국 없이 일대일로 맞붙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로마는 4만 명의 중무장 보병을 동원할 수 있었다. 기병과 경보병, 궁수들과 투석병의 숫자까지 더하면 로마군의 병력은 갈리아에 뒤지지 않을 규모였다.
독소전 초기에 스탈린의 소련군이 히틀러의 독일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린 이유는 병력의 규모와 장비의 질에서 열세인 데 있지 않았다. 투하체프스키 원수 같은 대다수 고위 장성들을 즉결 처형해버린 대숙청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유능한 지휘관들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모자란 것이 연전연패의 원인이었다. 갈리아인들이 침입할 무렵 로마군이 처한 상황도 1941년 여름의 붉은 군대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카밀루스가 부당하게 쫓겨나는 광경을 목격한 장군들은 과감하고 소신 있게 군대를 지휘하려고 하지 않았다. 소련 장성들이 폭군의 눈치를 보느라 허둥지둥했다면, 로마의 장수들은 민중의 변덕이 두려워 갈팡질팡했다. 단일한 지휘체계 확립에 필수적인 독재관을 임명하는 일마저 건너뛸 정도로 로마의 지휘관들은 보신주의에 찌들어 있었다.
권위도, 복종심도 사라진 로마군은 군대라기보다는 무장한 민간인의 무리에 더 가까웠다, 그래도 그들은 머릿수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로마시로부터 11밀레가량을 전진하여 알리아 강둑에 진을 쳤다. 로마군의 위용과 대형이 유지된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갈리아군이 갑자기 일제히 공격해오자 로마군은 즉시 혼란에 빠졌다. 좌익에 있던 장병들은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대부분 강물에 빠져죽었고, 오른쪽 날개에 포진한 부대들은 좌익이 적군에게 도륙을 당하는 틈을 타 가까스로 도주할 수 있었다. 로마가 갈리아 족에게 이미 함락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몇몇 병사들은 베이이로 도망치기도 했다.
로마가 신속한 함락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갈리아인들이 그동안 힘겹게 참아온 약탈 욕구를 충족시키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영민한 브렌누스마저 알리아 강변에서의 대승에 담긴 중차대한 전략적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브렌누스도 한니발처럼 전쟁은 알아도 정치는 모르는 인간이었다.
운 좋게 벌게 된 귀중한 시간을 로마인들은 최대한 이용했다. 피난할 수 있는 사람들은 피난을 떠났고, 베스타 여신을 모시는 여사제들이 간직해온 성화처럼 안전지대로 소개시켜야 할 물건들은 재빨리 옮겨졌다. 남은 사람들은 카피톨리움 주위에 방벽을 쌓은 다음 방벽 안쪽으로 화살과 창칼 등의 무기들을 잔뜩 비축해두었다. 나머지 지역의 방어는 불가피하게 포기했다.
그러나 다른 신들을 모시는 사제들, 그리고 한때 집정관이었으며 개선행진의 영광도 누렸으나 이제는 늙어버린 시민들은 차마 로마를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예복을 갖추어 입고 당시 최고 제사장이었던 파비우스를 따라, 죽는 순간까지 나라를 위해 몸 바치겠다고 신들에게 맹세했다.
사흘 동안 마음껏 약탈과 향음을 즐긴 갈리아 군대가 드디어 로마의 문턱에 다다랐다. 브렌누스는 로마의 문지방을 넘는 일을 주저했다.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성벽 위에 수비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지라 그로서는 로마군이 함정을 판 것이 아닌지 의심을 품는 것이 당연했다. 정찰병으로부터 아무런 이상 징후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은 브렌누스는 전군에 로마에 입성할 것을 명령했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창건한 지 360년 만에 처음으로 이방인의 군대가 로마 시내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360년이라는 계산이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때 전화를 입어 너무나 많은 기록과 사료들이 잿더미로 변해버린 탓이었다.
로마를 점령한 갈리아의 왕 브렌누스는 군인들로 카피톨리움을 포위했다. 그리고 자신은 포룸으로 갔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예복을 갖춰 입은 노인들이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적이 다가오는데도 일어서서 저항하지 않았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두려움 없는 편안한 모습으로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주1) 1밀레는 1천 보 정도의 거리를 가리킨다.
주2) 여기에서의 포룸은 카피톨리누스 언덕 남쪽에 자리해 있던 광장을 의미한다.
- 위기 극복의 리더십 : 카밀루스 (5)
독소 전쟁 초기의 소련군의 졸전은
투하체프스키(아랫줄 제일 왼쪽) 원수와 같은
유능한 야전 지휘관들이 무더기로 숙청당한 탓이 컸다.
로마군 역시 비슷한 이유로 갈리아인들에게 연전연패했다.
페티알레스는 로마의 제2대 임금인 누마 폼필리우스 왕이 창설한 사제 계급으로서 이들은 평화를 수호하고 전쟁의 정당성을 판별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페티알레스는 파비우스 가문의 무모한 행동을 비판하면서 그들의 잘못된 처사를 처벌함으로써 전쟁을 피할 것을 주장했다. 반면에 민중은 무기를 들 것을 요구했다. 민중과의 갈등을 원치 않았던 원로원은 파비우스 형제들을 군사 호민관에 임명하여 갈리아인들의 부아를 더욱 돋웠다.
갈리아인들은 숫자도 많았지만 사기나 장비 면에서도 강하면 강했지 약하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브렌누스라는 지모가 뛰어난 지도자가 이들을 이끌었다. 브렌누스는 로마로 진격하는 동안 지나치는 마을과 농토를 약탈하지 않는 이례적인 인내력을 발휘했다. 그 덕분에 로마 편에 서서 갈리아인들의 배후를 위협할 수도 있었을 여러 도시들과 우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 놈만 팬다”는 브렌누스의 전략이 주효한 까닭에 로마는 갈리아와 동맹국 없이 일대일로 맞붙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로마는 4만 명의 중무장 보병을 동원할 수 있었다. 기병과 경보병, 궁수들과 투석병의 숫자까지 더하면 로마군의 병력은 갈리아에 뒤지지 않을 규모였다.
독소전 초기에 스탈린의 소련군이 히틀러의 독일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린 이유는 병력의 규모와 장비의 질에서 열세인 데 있지 않았다. 투하체프스키 원수 같은 대다수 고위 장성들을 즉결 처형해버린 대숙청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유능한 지휘관들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모자란 것이 연전연패의 원인이었다. 갈리아인들이 침입할 무렵 로마군이 처한 상황도 1941년 여름의 붉은 군대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카밀루스가 부당하게 쫓겨나는 광경을 목격한 장군들은 과감하고 소신 있게 군대를 지휘하려고 하지 않았다. 소련 장성들이 폭군의 눈치를 보느라 허둥지둥했다면, 로마의 장수들은 민중의 변덕이 두려워 갈팡질팡했다. 단일한 지휘체계 확립에 필수적인 독재관을 임명하는 일마저 건너뛸 정도로 로마의 지휘관들은 보신주의에 찌들어 있었다.
권위도, 복종심도 사라진 로마군은 군대라기보다는 무장한 민간인의 무리에 더 가까웠다, 그래도 그들은 머릿수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로마시로부터 11밀레가량을 전진하여 알리아 강둑에 진을 쳤다. 로마군의 위용과 대형이 유지된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갈리아군이 갑자기 일제히 공격해오자 로마군은 즉시 혼란에 빠졌다. 좌익에 있던 장병들은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대부분 강물에 빠져죽었고, 오른쪽 날개에 포진한 부대들은 좌익이 적군에게 도륙을 당하는 틈을 타 가까스로 도주할 수 있었다. 로마가 갈리아 족에게 이미 함락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몇몇 병사들은 베이이로 도망치기도 했다.
로마가 신속한 함락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갈리아인들이 그동안 힘겹게 참아온 약탈 욕구를 충족시키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영민한 브렌누스마저 알리아 강변에서의 대승에 담긴 중차대한 전략적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브렌누스도 한니발처럼 전쟁은 알아도 정치는 모르는 인간이었다.
운 좋게 벌게 된 귀중한 시간을 로마인들은 최대한 이용했다. 피난할 수 있는 사람들은 피난을 떠났고, 베스타 여신을 모시는 여사제들이 간직해온 성화처럼 안전지대로 소개시켜야 할 물건들은 재빨리 옮겨졌다. 남은 사람들은 카피톨리움 주위에 방벽을 쌓은 다음 방벽 안쪽으로 화살과 창칼 등의 무기들을 잔뜩 비축해두었다. 나머지 지역의 방어는 불가피하게 포기했다.
그러나 다른 신들을 모시는 사제들, 그리고 한때 집정관이었으며 개선행진의 영광도 누렸으나 이제는 늙어버린 시민들은 차마 로마를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예복을 갖추어 입고 당시 최고 제사장이었던 파비우스를 따라, 죽는 순간까지 나라를 위해 몸 바치겠다고 신들에게 맹세했다.
사흘 동안 마음껏 약탈과 향음을 즐긴 갈리아 군대가 드디어 로마의 문턱에 다다랐다. 브렌누스는 로마의 문지방을 넘는 일을 주저했다.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성벽 위에 수비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지라 그로서는 로마군이 함정을 판 것이 아닌지 의심을 품는 것이 당연했다. 정찰병으로부터 아무런 이상 징후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은 브렌누스는 전군에 로마에 입성할 것을 명령했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창건한 지 360년 만에 처음으로 이방인의 군대가 로마 시내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360년이라는 계산이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때 전화를 입어 너무나 많은 기록과 사료들이 잿더미로 변해버린 탓이었다.
로마를 점령한 갈리아의 왕 브렌누스는 군인들로 카피톨리움을 포위했다. 그리고 자신은 포룸으로 갔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예복을 갖춰 입은 노인들이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적이 다가오는데도 일어서서 저항하지 않았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두려움 없는 편안한 모습으로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주1) 1밀레는 1천 보 정도의 거리를 가리킨다.
주2) 여기에서의 포룸은 카피톨리누스 언덕 남쪽에 자리해 있던 광장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