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위기 극복의 리더십 : 카밀루스 (8)
로마공화국의 독재관과 갈리아 부족의 왕은
뒷골목 건달들이나 할 법한 주먹싸움까지 벌이며
상대방을 향한 깊고 격렬한 증오와 원한을 폭발시켰다.
로마인들 사이의 갈등도, 로마인과 갈리아인들 간의 분쟁도 카밀루스가 인솔한 대군이 수도의 성문 앞에 나타나면서 일거에 종식되었다. 로마인들은 카밀루스에게 조용히 길을 터줌으로써 격심한 국론분열 사태가 끝났음을 알렸다. 그가 생애 두 번째로 독재관으로 취임하는 데 대한 전폭적 동의의 표시였다.
로마와 갈리아의 분쟁은 대화가 아닌 대결로써 마무리됐다. 카밀루스는 저울에 올려 있던 황금을 자신을 따라온 수행원들에게 건네주고는 갈리인들에게 저울과 추를 가지고 당장 꺼지라고 호통 쳤다. 그는 기존에 맺어진 협정은 자격 없는 자들 사이에 오간 말장난일 뿐이라며 전부 무효화시켰다.
브렌누스는 자기보다 한 술 더 또는 이 간 큰 로마인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충격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고, 로마의 독재관과 갈리아의 왕은 폐허가 된 시내에서 마치 평범한 동네 건달들 같이 거친 몸싸움을 벌였다. 둘 다 칼을 뽑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맨주먹으로 다퉜다. 본격적 교전을 벌이기에는 공간이 너무나 협소했던 탓이다. 양군의 전투는 소수의 사상자만을 남긴 채 싱겁게 마무리됐다.
그럼에도 브렌누스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는 한밤중에 진영을 거둬 철수길에 올랐다. 북쪽을 향해 철퇴를 개시한 갈리아 군대는 가비니 가도 옆에서 야영을 했다. 카밀루스는 로마에게 막심한 피해를 안긴 갈리아인들을 순순히 보내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갈리아 병사들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느라 전열이 흐트러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떠오르는 태양을 등진 로마군이 갈리아군 진영을 급습했다. 빛나는 갑옷을 화려하게 차려입은 역전의 용사 카밀루스가 선봉에 섰다.
로마인들은 더는 갈리아인들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수많은 전사자의 시신을 내버려둔 채 갈리아인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그들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간 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대다수가 도중에 로마인들에게 붙들려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갈리아인은 로마인을 무서워했다. 반대로 로마인들은 갈리아인들과 마주칠 때면 늘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른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들뜨곤 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땅을 정복하기 이전에 갈리아의 정신은 이미 카밀루스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로마는 브렌누스의 전광석화와 같은 공격에 힘없이 굴복해 점령당했다. 그리고 번개처럼 이뤄진 카밀루스의 날쌘 군사작전으로 수복되었다. 갈리아들은 7월 15일에 로마에 들어와 이듬해 2월 13일에 그곳에서 쫓겨났다.
로마 해방의 주역 카밀루스는 개선행진을 벌였다. 이번에는 아무도 이러쿵저러쿵하면서 행진을 트집 잡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야만족의 약탈을 피해 옮겨두거나 숨겨놨던 귀중품과 신성한 물건들을 들거나 혹은 이고서 카밀루스의 대열을 따라 로마로 돌아왔다. 카피톨리움에서 포위를 이겨낸 시민들이 승리한 군대와 수도로 귀환하는 피난민들의 행렬을 반갑게 맞이했다. 환영하는 사람이나, 환영받는 사람이나 오랫동안 못 먹고 못 입어 하나같이 헐벗고 앙상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시가지가 잿더미로 변한 로마의 거리들 역시 앙상한 모습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카밀루스는 전래에 능통한 원로들의 충고를 좇아 신들에게 제를 올리며 적군의 말발굽에 더렵혀진 도시를 정화하는 의식을 치렀다. 그는 국가 권위의 복원과 흩어진 민심의 수습을 목적으로 신전의 복구에 우선적으로 착수했다. 카밀루스는 소문의 신과 소리의 신에게 신전을 지어 봉헌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카이디키우스에게 갈리아인들의 침범을 미리 경고해준 데 대한 감사의 사례였다.
신전을 복구하는 일만도 매우 고된 작업이었다. 따라서 처참하게 파괴된 도시 전체를 재건하려니 로마인들은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휴식과 안정을 원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누울 곳도 없는 판국에 로마의 재건은 언감생심처럼 보였다.
- 위기 극복의 리더십 : 카밀루스 (8)
로마공화국의 독재관과 갈리아 부족의 왕은
뒷골목 건달들이나 할 법한 주먹싸움까지 벌이며
상대방을 향한 깊고 격렬한 증오와 원한을 폭발시켰다.
로마인들 사이의 갈등도, 로마인과 갈리아인들 간의 분쟁도 카밀루스가 인솔한 대군이 수도의 성문 앞에 나타나면서 일거에 종식되었다. 로마인들은 카밀루스에게 조용히 길을 터줌으로써 격심한 국론분열 사태가 끝났음을 알렸다. 그가 생애 두 번째로 독재관으로 취임하는 데 대한 전폭적 동의의 표시였다.
로마와 갈리아의 분쟁은 대화가 아닌 대결로써 마무리됐다. 카밀루스는 저울에 올려 있던 황금을 자신을 따라온 수행원들에게 건네주고는 갈리인들에게 저울과 추를 가지고 당장 꺼지라고 호통 쳤다. 그는 기존에 맺어진 협정은 자격 없는 자들 사이에 오간 말장난일 뿐이라며 전부 무효화시켰다.
브렌누스는 자기보다 한 술 더 또는 이 간 큰 로마인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충격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고, 로마의 독재관과 갈리아의 왕은 폐허가 된 시내에서 마치 평범한 동네 건달들 같이 거친 몸싸움을 벌였다. 둘 다 칼을 뽑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맨주먹으로 다퉜다. 본격적 교전을 벌이기에는 공간이 너무나 협소했던 탓이다. 양군의 전투는 소수의 사상자만을 남긴 채 싱겁게 마무리됐다.
그럼에도 브렌누스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는 한밤중에 진영을 거둬 철수길에 올랐다. 북쪽을 향해 철퇴를 개시한 갈리아 군대는 가비니 가도 옆에서 야영을 했다. 카밀루스는 로마에게 막심한 피해를 안긴 갈리아인들을 순순히 보내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갈리아 병사들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느라 전열이 흐트러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떠오르는 태양을 등진 로마군이 갈리아군 진영을 급습했다. 빛나는 갑옷을 화려하게 차려입은 역전의 용사 카밀루스가 선봉에 섰다.
로마인들은 더는 갈리아인들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수많은 전사자의 시신을 내버려둔 채 갈리아인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그들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간 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대다수가 도중에 로마인들에게 붙들려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갈리아인은 로마인을 무서워했다. 반대로 로마인들은 갈리아인들과 마주칠 때면 늘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른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들뜨곤 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땅을 정복하기 이전에 갈리아의 정신은 이미 카밀루스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로마는 브렌누스의 전광석화와 같은 공격에 힘없이 굴복해 점령당했다. 그리고 번개처럼 이뤄진 카밀루스의 날쌘 군사작전으로 수복되었다. 갈리아들은 7월 15일에 로마에 들어와 이듬해 2월 13일에 그곳에서 쫓겨났다.
로마 해방의 주역 카밀루스는 개선행진을 벌였다. 이번에는 아무도 이러쿵저러쿵하면서 행진을 트집 잡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야만족의 약탈을 피해 옮겨두거나 숨겨놨던 귀중품과 신성한 물건들을 들거나 혹은 이고서 카밀루스의 대열을 따라 로마로 돌아왔다. 카피톨리움에서 포위를 이겨낸 시민들이 승리한 군대와 수도로 귀환하는 피난민들의 행렬을 반갑게 맞이했다. 환영하는 사람이나, 환영받는 사람이나 오랫동안 못 먹고 못 입어 하나같이 헐벗고 앙상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시가지가 잿더미로 변한 로마의 거리들 역시 앙상한 모습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카밀루스는 전래에 능통한 원로들의 충고를 좇아 신들에게 제를 올리며 적군의 말발굽에 더렵혀진 도시를 정화하는 의식을 치렀다. 그는 국가 권위의 복원과 흩어진 민심의 수습을 목적으로 신전의 복구에 우선적으로 착수했다. 카밀루스는 소문의 신과 소리의 신에게 신전을 지어 봉헌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카이디키우스에게 갈리아인들의 침범을 미리 경고해준 데 대한 감사의 사례였다.
신전을 복구하는 일만도 매우 고된 작업이었다. 따라서 처참하게 파괴된 도시 전체를 재건하려니 로마인들은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휴식과 안정을 원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누울 곳도 없는 판국에 로마의 재건은 언감생심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