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카이사르 (9)
아스테릭스는 고대 로마와 현대 미국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정신승리가 낳은 걸작만화였다.
거친 라인 강을 건넜으니 그다음은 넓은 바다를 건널 차례였다. 카이사르는 로마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도버해협을 건너가 지금의 영국 땅에 발을 디뎠다. 중무장한 군대와 함께였다. 그는 두 번이나 대서양을 항해해 브리탄니족에게 막대한 인적 손실을 끼쳤다.
그렇지만 야만인들의 손해가 로마병사들의 이익을 뜻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영국에는 로마 군단에게 약탈할 가치가 있는 물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원정이었다. 카이사르의 도버해협 횡단은 이전까지 전설상의 땅으로만 알려져온 브리튼 제도가 문명세계에 편입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카이사르는 영국이 신사의 나라를 자부할 수 있는 전통과 토대를 선물해준 것이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귀환했을 때 게르마니족이 받았을 충격과 공포를 능가할만한 전율할 내용을 담은 편지가 그를 수신인으로 해서 도착해 있었다. 딸 율리아가 폼페이우스의 아이를 출산하다가 사망했다는 비보였다. 아이 또한 며칠 후에 죽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크나큰 슬픔에 빠졌다. 두 사람의 친구와 동료들 역시 비통해했다. 불안한 정국에서 화합과 소통의 매개 역할을 해주던 중요한 연결고리가 사라진 탓이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평화로운 장인과 사위 관계를 마감하고 다시 예전처럼 살벌한 정치적 경쟁자 사이로 돌아갔다.
냉혹한 역사의 흐름은 카이사르의 개인적 고통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규모에서나 잔인성에서나 갈리아 최대의 전쟁이 막 벌어질 참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부족들이 로마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는데 선봉장 겸 총지휘관은 베르킨게토릭스가 맡고 있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용감한 사내였다. 하지만 인내심이 강하거나 혜안을 갖춘 남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만약 갈리아인들이 로마가 본격적 내전에 휩싸일 때를 기다렸다가 봉기했다면 성공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반면에 카이사르는 사소한 기회조차도 최상으로 활용하는 데 천부적 재질이 있었다. 게다가 폼페이우스와의 최후 결전에 앞서서 후방을 안전하게 다져놓아야 한다는 점 또한 잘 알았다. 그는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전격전의 대명사인 독일 전차군단처럼 전광석화 같이 움직였고, 로마군에게 연전연패한 갈리아인들은 알레시아의 성채로 몸을 숨겼다. 이들 패잔병 무리에는 베르킨게토릭스도 포함돼 있었다.
성안에 갇힌 갈리아인의 숫자는 17만 명에 달했다. 그러자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30만 명의 또 다른 갈리아인 병력이 알리시아에 도착해 카이사르의 군대를 포위했다. 카이사르로서는 자칫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될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두 개의 방벽을 쌓았다. 하나는 알리시아에 고립된 갈리아인들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한 방벽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지원군으로 달려온 외곽의 갈리아 병력을 막으려는 목적의 방벽이었다. 카이사르는 안팎의 적군이 양동작전을 펼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고 신속하게 각개격파에 나서 처음에는 외곽의 적군을 전멸시키고, 그 다음에는 성 안쪽의 적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숫자는 적지만 확실한 사령탑이 존재하는 로마군이, 수효는 많아도 유능하고 효과적인 컨트롤타워가 부재한 갈리아군을 일방적으로 압도했다.
항장의 마지막은 비참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의 발밑에 꿇어앉아 항복 의사를 표시해야만 했다. 그는 로마로 끌려가 카이사르의 개선행진을 빛내주는 장식품으로 쓰이는 굴욕을 겪은 다음 곧 목숨을 잃었다.
- 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카이사르 (9)
아스테릭스는 고대 로마와 현대 미국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정신승리가 낳은 걸작만화였다.
거친 라인 강을 건넜으니 그다음은 넓은 바다를 건널 차례였다. 카이사르는 로마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도버해협을 건너가 지금의 영국 땅에 발을 디뎠다. 중무장한 군대와 함께였다. 그는 두 번이나 대서양을 항해해 브리탄니족에게 막대한 인적 손실을 끼쳤다.
그렇지만 야만인들의 손해가 로마병사들의 이익을 뜻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영국에는 로마 군단에게 약탈할 가치가 있는 물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원정이었다. 카이사르의 도버해협 횡단은 이전까지 전설상의 땅으로만 알려져온 브리튼 제도가 문명세계에 편입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카이사르는 영국이 신사의 나라를 자부할 수 있는 전통과 토대를 선물해준 것이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귀환했을 때 게르마니족이 받았을 충격과 공포를 능가할만한 전율할 내용을 담은 편지가 그를 수신인으로 해서 도착해 있었다. 딸 율리아가 폼페이우스의 아이를 출산하다가 사망했다는 비보였다. 아이 또한 며칠 후에 죽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크나큰 슬픔에 빠졌다. 두 사람의 친구와 동료들 역시 비통해했다. 불안한 정국에서 화합과 소통의 매개 역할을 해주던 중요한 연결고리가 사라진 탓이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평화로운 장인과 사위 관계를 마감하고 다시 예전처럼 살벌한 정치적 경쟁자 사이로 돌아갔다.
냉혹한 역사의 흐름은 카이사르의 개인적 고통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규모에서나 잔인성에서나 갈리아 최대의 전쟁이 막 벌어질 참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부족들이 로마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는데 선봉장 겸 총지휘관은 베르킨게토릭스가 맡고 있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용감한 사내였다. 하지만 인내심이 강하거나 혜안을 갖춘 남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만약 갈리아인들이 로마가 본격적 내전에 휩싸일 때를 기다렸다가 봉기했다면 성공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반면에 카이사르는 사소한 기회조차도 최상으로 활용하는 데 천부적 재질이 있었다. 게다가 폼페이우스와의 최후 결전에 앞서서 후방을 안전하게 다져놓아야 한다는 점 또한 잘 알았다. 그는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전격전의 대명사인 독일 전차군단처럼 전광석화 같이 움직였고, 로마군에게 연전연패한 갈리아인들은 알레시아의 성채로 몸을 숨겼다. 이들 패잔병 무리에는 베르킨게토릭스도 포함돼 있었다.
성안에 갇힌 갈리아인의 숫자는 17만 명에 달했다. 그러자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30만 명의 또 다른 갈리아인 병력이 알리시아에 도착해 카이사르의 군대를 포위했다. 카이사르로서는 자칫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될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다.
카이사르는 두 개의 방벽을 쌓았다. 하나는 알리시아에 고립된 갈리아인들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한 방벽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지원군으로 달려온 외곽의 갈리아 병력을 막으려는 목적의 방벽이었다. 카이사르는 안팎의 적군이 양동작전을 펼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고 신속하게 각개격파에 나서 처음에는 외곽의 적군을 전멸시키고, 그 다음에는 성 안쪽의 적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숫자는 적지만 확실한 사령탑이 존재하는 로마군이, 수효는 많아도 유능하고 효과적인 컨트롤타워가 부재한 갈리아군을 일방적으로 압도했다.
항장의 마지막은 비참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의 발밑에 꿇어앉아 항복 의사를 표시해야만 했다. 그는 로마로 끌려가 카이사르의 개선행진을 빛내주는 장식품으로 쓰이는 굴욕을 겪은 다음 곧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