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카이사르 (8)
카이사르는 그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아낌없이 돈다발을 건네주었다.
카이사르는 태생적으로 약골 체질이었다. 그는 피부는 연약한 데다 만성두통을 안고 살았다. 게다가 간질병을 앓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는 군복무 중에 노숙과 야영 등을 일부러 자청했다. 신체를 단련함으로써 건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시간을 잠시도 놀리지 않았다. 잠은 마차나 가마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잤으며, 속기사 한 명을 늘 대동하고 다니면서 쉴 새 없이 서류와 편지를 구술했다. 카이사르가 얼마나 말을 빨리 했던지 그의 말을 받아 적으려면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속기사가 필요했다.
대규모 군대가 겨울을 나는 일은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21세기에도 쉬운 과제가 아니다. 고대에는 겨울은 모든 군사행동의 중단을 뜻했다. 전쟁이 겨울잠에 들어가자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와 이탈리아 사이에 흐르는 루비콘 강가에 머물며 향후의 정국운영 방향을 구상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카이사르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카이사르는 그를 찾아온 방문자들의 부탁이라면 사소한 민원사항까지 빠짐없이 일일이 들어줬다. 폼페이우스가 모르는 사이에 카이사르는 신속하고 착실하게 세력기반을 넓혀가고 있었다. 보수파들은 이런 상황을 알 턱이 없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연이은 승전보를 축하하기 위해 15일간 모든 국가업무를 중단하고 축제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이때까지의 로마 역사에서 전례 없이 긴 승리 잔치였다.
갈리아에서의 임무를 마친 카이사르는 파두스 강변에 머물며 겨울을 났다. 전쟁을 벌일 때의 카이사르가 사자와 같이 용맹했다면, 정쟁에 임할 때의 카이사르는 한 마리 교활한 뱀이었다. 그는 월동지로 찾아오는 공직 후보들에게 돈을 듬뿍듬뿍 뿌렸다. 로마로 돌아간 후보자들은 시민들에게 카이사르로부터 받은 금품을 무차별적으로 살포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물론이고 사르디니아의 지방관 압피우스와 이베리아 총독 네포스도 카이사르를 만나러 파두스 강변을 방문했다. 이들 일당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이듬해의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고, 카이사르는 현재의 관할지역을 5년간 더 관리하면서 여기에 필요한 국가예산을 배정받는다는 정치적 합의에 별다른 이견 없이 도달했다.
이러한 밀약에 이의를 제기할만한 인사들은 이미 거세된 뒤였다. 키케로는 키프로스로 좌천되었고, 파보니우스의 외침은 아무런 대중적 호응도 얻지 못한 채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차가운 겨울 하늘을 가를 뿐이었다.
이 무렵 게르마니 민족의 일부가 갈리아로 쳐들어왔다. 카이사르는 쳐들어온 게르마니아 인들을 격멸한 일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최초로 라인 강을 건넌 로마인이라는 월계관을 쓰고 싶었다. 그는 홍수로 물이 불어난 라인 강을 도강하는 데 필요한 부교를 불과 열흘 만에 완성시켰다.
그가 이끄는 로마군이 라인 강 동쪽의 게르마니아 땅에 머문 기간은 통틀어 18일에 지니지 않았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로마인에게는 긍지와 자부심을, 게르마니족에게는 충격과 공포를 안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 도전과 변화의 리더십 : 카이사르 (8)
카이사르는 그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아낌없이 돈다발을 건네주었다.
카이사르는 태생적으로 약골 체질이었다. 그는 피부는 연약한 데다 만성두통을 안고 살았다. 게다가 간질병을 앓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는 군복무 중에 노숙과 야영 등을 일부러 자청했다. 신체를 단련함으로써 건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시간을 잠시도 놀리지 않았다. 잠은 마차나 가마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잤으며, 속기사 한 명을 늘 대동하고 다니면서 쉴 새 없이 서류와 편지를 구술했다. 카이사르가 얼마나 말을 빨리 했던지 그의 말을 받아 적으려면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속기사가 필요했다.
대규모 군대가 겨울을 나는 일은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21세기에도 쉬운 과제가 아니다. 고대에는 겨울은 모든 군사행동의 중단을 뜻했다. 전쟁이 겨울잠에 들어가자 카이사르는 갈리아 키살피나와 이탈리아 사이에 흐르는 루비콘 강가에 머물며 향후의 정국운영 방향을 구상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카이사르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카이사르는 그를 찾아온 방문자들의 부탁이라면 사소한 민원사항까지 빠짐없이 일일이 들어줬다. 폼페이우스가 모르는 사이에 카이사르는 신속하고 착실하게 세력기반을 넓혀가고 있었다. 보수파들은 이런 상황을 알 턱이 없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연이은 승전보를 축하하기 위해 15일간 모든 국가업무를 중단하고 축제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이때까지의 로마 역사에서 전례 없이 긴 승리 잔치였다.
갈리아에서의 임무를 마친 카이사르는 파두스 강변에 머물며 겨울을 났다. 전쟁을 벌일 때의 카이사르가 사자와 같이 용맹했다면, 정쟁에 임할 때의 카이사르는 한 마리 교활한 뱀이었다. 그는 월동지로 찾아오는 공직 후보들에게 돈을 듬뿍듬뿍 뿌렸다. 로마로 돌아간 후보자들은 시민들에게 카이사르로부터 받은 금품을 무차별적으로 살포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물론이고 사르디니아의 지방관 압피우스와 이베리아 총독 네포스도 카이사르를 만나러 파두스 강변을 방문했다. 이들 일당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이듬해의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고, 카이사르는 현재의 관할지역을 5년간 더 관리하면서 여기에 필요한 국가예산을 배정받는다는 정치적 합의에 별다른 이견 없이 도달했다.
이러한 밀약에 이의를 제기할만한 인사들은 이미 거세된 뒤였다. 키케로는 키프로스로 좌천되었고, 파보니우스의 외침은 아무런 대중적 호응도 얻지 못한 채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차가운 겨울 하늘을 가를 뿐이었다.
이 무렵 게르마니 민족의 일부가 갈리아로 쳐들어왔다. 카이사르는 쳐들어온 게르마니아 인들을 격멸한 일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최초로 라인 강을 건넌 로마인이라는 월계관을 쓰고 싶었다. 그는 홍수로 물이 불어난 라인 강을 도강하는 데 필요한 부교를 불과 열흘 만에 완성시켰다.
그가 이끄는 로마군이 라인 강 동쪽의 게르마니아 땅에 머문 기간은 통틀어 18일에 지니지 않았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로마인에게는 긍지와 자부심을, 게르마니족에게는 충격과 공포를 안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