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4)

in kr •  6 years ago 
☐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페리클레스 (4)


페리클레스는 한고조 유방과 마찬가지로 토사구팽의
권모술수를 서슴지 않는 냉정하고 노회한 책략가였다.

키몬의 귀환은 페리클레스에게 한 가지 가볍지 않은 골칫거리를 안겼다. 그것은 키몬을 국외로 축출하는 데 앞장섰던 에피알테스의 거취와 관련된 일이였다. 이 문제는 에피알테스가 아리스토디코스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이도메네우스는 이 사건에 페리클레스가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에피알테스는 친구이자 동지인 페리클레스의 명성을 곧 따라잡을 정도로 민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미구에 그의 권좌를 위협할 가능성이 큰 잠재적 경쟁자가 사라진 셈이니 페리클레스로서는 화장실에서 몰래 웃었을 거라는 의심을 충분히 살 만도 했다. 머잖아 그가 드러내놓고 웃을 수 있는 일이 생겼다. 키몬이 키프로스 원정 도중에 사망한 것이다.

키몬의 죽음을 계기로 귀족들은 페리클레스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겠다는 생각을 사실상 단념했다. 그들은 페리클레스의 권력을 일정한 선 안에 가둬놓는 쪽으로 목표를 변경했다. 그의 독주를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페리클레스가 왕정을 수립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페리클레스의 대항마로서 그의 친척이기도 한 투키디데스를 내세웠다.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와 비교해 이름값은 떨어졌지만 능숙한 연설가이자 분별력 있는 정치인이었다. 정권을 효과적으로 견제해 한 사회의 균형을 잡아주는 야당 당수로서의 역할을 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투키디데스는 뿔뿔이 흩어져 있던 귀족파를 결집시켰다. 그는 사람들을 단순히 모으는 데만 치중하지는 않았다. 모은 사람들을 추리고 가려내 레닌의 볼셰비키 같은 소수정예의 열혈 당원들을 만들어냈다.

투키디데스가 귀족파를 이끌게 되면서 페리클레스가 영도하는 민중파와의 갈등은 한층 격화되었고, 이와 정비례해 아테네 사회를 갈라놓은 단층선은 더욱 깊고 뚜렷해졌다. 페리클레스의 파벌은 데모스 즉 민중으로 불렸다. 투키디데스의 도당은 올리고이, 곧 소수파로 호명되었다. 투키디데스의 파벌은 머릿수에서는 밀렸지만, 재력에서는 앞섰으므로 양파의 대립은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간의 항쟁으로 볼 수도 있었다.

페리클레스는 귀족층의 활발해진 정치적 움직임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는 민중을 위한 빵과 서커스를 만드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행사와 축제를 기획했고, 매년 60척의 삼단노선을 동원해 시민들을 뱃사람으로 훈련시켰다. 훈련수당이 지급된 이 항해에는 선상여행(Cruise)의 성격도 가미돼 있었다. 그는 해외이주 정책에도 열성을 기울여 에게 해 곳곳은 물론 멀리 이탈리아 반도에까지 이주민을 보냈다. 자칫 불온세력으로 변할 수도 있는 과잉인구를 해소함과 아울러 믿을 수 없는 동맹국들 주변에 아테네 주둔군을 배치해놓는 것이 목적이었다.

페리클레스가 아테네의 영광과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특별히 심혈을 기울인 일은 대규모 건설 사업이었다. 그가 아테네를 화려하게 장식하고자 다수의 신성한 건축물들을 짓자고 제안하자 반대파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거센 비난과 격렬한 공격을 가해왔다.

그들이 집중적으로 비판한 부분은 재원조달 문제였다. 페리클레스의 구상을 실천에 옮기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그 돈은 델로스에 있는 금고에 손을 대야만 마련이 가능했다. 문제는 금고 속의 돈이 그리스인이 공동으로 조성한 재원이었다는 점이다. 페리클레스 정권이 그 돈을 임의로 쓸 경우 엄청난 모욕감을 느낀 다른 도시국가들이 아테네를 폭군 같은 존재로 여길 것임은 자명했다.

페리클레스는 역할 분담론으로 반대파의 논리를 제압하려 시도했다. 그는 다른 나라들은 군마 한 필, 전함 한 척, 중장보병 한 병 내놓은 적이 없다며 그리스를 위해서 전쟁에서 피를 흘린 아테네가 돈을 독차지하는 것은 대단히 적절한 조치라고 항변했다.

언뜻 보면 페리클레스의 주장은 꽤 일리가 있었다. 다른 폴리스들은 돈으로 피를 대신했던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아테네가 전쟁에서 피를 흘린 것이 본질적으로 아테네 스스로의 이득을 위해서였듯이, 다른 도시들이 기꺼이 전비를 갹출해 부담한 일은 궁극적으로 그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였다.

다른 도시들은 그리스 세계의 공동금고에 함부로 손을 댄 아테테의 독단적 행동을 잊지도, 용서하지도 않았다. 이 사건은 나중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아테네와 비교해 더욱 많은 동맹국을 끌어 모으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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