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는 리더, 승리하는 리더십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마르쿠스 카토 (14)
재테크의 귀재 카토는 노예들에게까지도 부자가 되라고 권했다
카토는 농사 이외의 방법으로도 재산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증식시킬 수 있음을 알고는 이곳에 자금을 착실히 투자했다. 그는 재테크의 귀재답게 좀처럼 손해를 보지 않았다.
그 비결은 카토가 “유피테르도 망칠 수 없다”고 표현한 사업들에 손을 뻗은 데 있었다. 카토는 급전이 필요한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했는데, 채무자들을 관리하는 별로 떳떳치 못한 일은 해방노예인 퀸티오가 카토를 대리해 처리했다.
카토는 재산을 말아먹는 짓은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며 노예들에게도 부자가 될 것을 다그쳤다. 카토로부터 종자돈을 빌린 노예들은 그 돈으로 어린 소년들을 산 다음 그들을 1년 동안 훈련시켜 노예로서의 부가치기를 높인 후에 더 비싼 값으로 팔아 목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수익의 상당한 몫은 원청업체격인 카토에게 당연히 돌아갔다.
카토가 제법 나이가 먹었을 무렵 아카데메이아 학파의 거두 키르네아데스와 스토아 학파의 유명한 석학인 디오게네스가 인솔하는 아테네의 사절단이 로마에 도착했다. 이들이 로마에 온 목적은 아테네인들에게 부과된 5백 탈란톤의 벌금을 무효화하려는 데 있었다. 아테네 철학자들은 도착 즉시 로마의 젊은이들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이들 노련한 아테네 지식인들의 세련된 변론에 로마인들은 차례차례로 정신적 무장해제를 당했다.
대부분의 로마인들과는 다르게 카토만은 로마를 점령한 아테네판 한류를 영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카토는 젊은이들이 헛된 말재주와 공허한 사상을 중시한 나머지 전장에서 조국을 위해 실제로 땀과 피를 흘리는 일을 소홀히 할까봐 무척이나 걱정이 되었다.
아테네의 철학자들을 어떻게든 빨리 로마에서 쫓아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원로원에서 발언권을 얻은 다음 “그리스 출신의 이 고귀한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들을 기르는 일에 매진할 수 있도록 어서 결정을 내립시다”라며 조속한 판결을 촉구했다. 그는 아테네 사절단이 재심을 청구한 사건의 재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 많은 로마 청년들이 그리스의 불건전한 담론과 풍속에 오염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토는 개인적 원한관계 탓에 아테네 철학자들을 미워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로마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애국자였고, 따라서 그리스에서 건너온 문물들이 하찮게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그가 소크라테스를 전통을 무시하고 법을 지키지 말라고 시민들을 선동함으로써 독재자가 되기를 꿈꾼 사악한 인물로 평가절하해놓은 경우에서 보이듯이 카토는 그리스적 사고와 삶의 양식이 로마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스인이었던 플루타르코스는 로마가 그리스의 학문과 문화를 열심히 흡수한 덕택에 강대한 제국으로 발전했다면서 카토의 호들갑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결합물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점진적 붕괴와 최종적 해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사실을 감안하면 카토가 쓸데없는 기우에 빠졌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카토는 그리스 출신이라면 의사들까지 의심했다. 히포크라테스는 그리스인의 적에게 의술을 베풀 수는 없다며 페르시아 대왕을 진료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일이 있었다. 카토는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서 그리스 의사들이 로마인 환자들을 과연 성심성의껏 돌봐줄 수 있을지 미심쩍어했다.
그리스는 의학이 발달한 나라였다. 그리스 의사들을 퇴짜 놓은 카토가 대안이랍시고 내놓은 방책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의학서적을 직접 집필한 다음 거기에 적힌 방법대로 가족들의 건강을 관리할 것을 고집했다.
카토는 그가 개발한 식이요법을 충실히 실천한 덕분에 식구들이 건강을 지킬 수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말은 절반은 맞았고 절반은 틀렸다. 카토 스스로는 세월의 공격을 이겨내며 나이가 들어서도 정력적으로 활동했으나, 그의 아내와 아들은 카토의 곁을 먼저 떠났기 때문이다.
- 인내와 믿음의 리더십 : 마르쿠스 카토 (14)
재테크의 귀재 카토는 노예들에게까지도 부자가 되라고 권했다
카토는 농사 이외의 방법으로도 재산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증식시킬 수 있음을 알고는 이곳에 자금을 착실히 투자했다. 그는 재테크의 귀재답게 좀처럼 손해를 보지 않았다.
그 비결은 카토가 “유피테르도 망칠 수 없다”고 표현한 사업들에 손을 뻗은 데 있었다. 카토는 급전이 필요한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했는데, 채무자들을 관리하는 별로 떳떳치 못한 일은 해방노예인 퀸티오가 카토를 대리해 처리했다.
카토는 재산을 말아먹는 짓은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며 노예들에게도 부자가 될 것을 다그쳤다. 카토로부터 종자돈을 빌린 노예들은 그 돈으로 어린 소년들을 산 다음 그들을 1년 동안 훈련시켜 노예로서의 부가치기를 높인 후에 더 비싼 값으로 팔아 목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수익의 상당한 몫은 원청업체격인 카토에게 당연히 돌아갔다.
카토가 제법 나이가 먹었을 무렵 아카데메이아 학파의 거두 키르네아데스와 스토아 학파의 유명한 석학인 디오게네스가 인솔하는 아테네의 사절단이 로마에 도착했다. 이들이 로마에 온 목적은 아테네인들에게 부과된 5백 탈란톤의 벌금을 무효화하려는 데 있었다. 아테네 철학자들은 도착 즉시 로마의 젊은이들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이들 노련한 아테네 지식인들의 세련된 변론에 로마인들은 차례차례로 정신적 무장해제를 당했다.
대부분의 로마인들과는 다르게 카토만은 로마를 점령한 아테네판 한류를 영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카토는 젊은이들이 헛된 말재주와 공허한 사상을 중시한 나머지 전장에서 조국을 위해 실제로 땀과 피를 흘리는 일을 소홀히 할까봐 무척이나 걱정이 되었다.
아테네의 철학자들을 어떻게든 빨리 로마에서 쫓아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원로원에서 발언권을 얻은 다음 “그리스 출신의 이 고귀한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들을 기르는 일에 매진할 수 있도록 어서 결정을 내립시다”라며 조속한 판결을 촉구했다. 그는 아테네 사절단이 재심을 청구한 사건의 재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 많은 로마 청년들이 그리스의 불건전한 담론과 풍속에 오염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토는 개인적 원한관계 탓에 아테네 철학자들을 미워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로마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애국자였고, 따라서 그리스에서 건너온 문물들이 하찮게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그가 소크라테스를 전통을 무시하고 법을 지키지 말라고 시민들을 선동함으로써 독재자가 되기를 꿈꾼 사악한 인물로 평가절하해놓은 경우에서 보이듯이 카토는 그리스적 사고와 삶의 양식이 로마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스인이었던 플루타르코스는 로마가 그리스의 학문과 문화를 열심히 흡수한 덕택에 강대한 제국으로 발전했다면서 카토의 호들갑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결합물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점진적 붕괴와 최종적 해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사실을 감안하면 카토가 쓸데없는 기우에 빠졌다고만 보기는 어렵다.
카토는 그리스 출신이라면 의사들까지 의심했다. 히포크라테스는 그리스인의 적에게 의술을 베풀 수는 없다며 페르시아 대왕을 진료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일이 있었다. 카토는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서 그리스 의사들이 로마인 환자들을 과연 성심성의껏 돌봐줄 수 있을지 미심쩍어했다.
그리스는 의학이 발달한 나라였다. 그리스 의사들을 퇴짜 놓은 카토가 대안이랍시고 내놓은 방책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의학서적을 직접 집필한 다음 거기에 적힌 방법대로 가족들의 건강을 관리할 것을 고집했다.
카토는 그가 개발한 식이요법을 충실히 실천한 덕분에 식구들이 건강을 지킬 수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말은 절반은 맞았고 절반은 틀렸다. 카토 스스로는 세월의 공격을 이겨내며 나이가 들어서도 정력적으로 활동했으나, 그의 아내와 아들은 카토의 곁을 먼저 떠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