텀블러 둘, 손수건 셋, 우산 둘.. 올 여름 내가 흘리고 다닌 것들이다. 예년에 비해 무덥고 비는 덜해 잃어버린 우산 수는 줄었고 손수건 수는 늘었다. 텀블러는 생각보다 유용하지 않았다. 지하철이며 은행이며 동사무소며 시내 곳곳에 급수시설이 있어 멀리 갈 일이 아니면 굳이 들고 다닐 일이 없었다. 딱히 환경보호니 뭐니 하는 그런 선한 이유로 텀블러를 들고 다닌 것도 아니었으니 가방 없이 다니는 날에는 오히려 손이 거추장스러웠다. 따지고 보면 그냥 오백원짜리 생수를 사먹는 게 이득인 셈이었다. 어쩌면 그런 무의식이 텀블러를 흘리게 만든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손수건은 한 장에 천원짜리였고 우산도 기껏해야 오천원을 넘지 않았다. 그래서겠다. 귀하고 소중하다 여기지 않았으니 툭하면 흘리고, 흘리고도 크게 자책하지 않은 이유가.
오늘 아침에는 아무리 찾아도 무선 이어폰이 보이지 않았다. 이 주머니 저 주머니, 이 가방 저 가방을 다 뒤졌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책상 한 모퉁이에서 발견되기도 했으니 아직 잃어버렸다 단정할 일은 아니다. 다만 찜찜한 건 최근 일주일 사이 필름이 끊긴 게 두 번이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적나라한 참자아의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그렇게 사라져간 안경, 시계, 지갑, 합장주는 또한 몇 갠가. 며칠 기다려보고 나타나지 않으면 무선 이어폰도 내 무아의 틈을 타 제 살 길 찾아 떠난 것이라 믿어야지 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럴 땐 또 합리화시키는 방법이 있다. 충전하기도 귀찮고 음질도 별로였다고, 유선이 훨씬 낫다고 자위하는 거 말이다.
하찮거나 귀하다는 건 대체 무슨 차이일까. 흔하다고 해서 귀하지 않은 걸까. 남에게 귀하다고 해서 내게도 귀한 걸까. 물론 돈으로 환산하면 그 답은 명백해진다. 하지만 경험칙상 돈으로는 무용하지만 잃어버리고 나면 한동안 가슴 한켠이 텅 비어버리는 것도 있었다. 스무살 무렵 그녀와 나누어 낀 몇 천원짜리 스뎅 반지라든가 꾹꾹 눌러쓴 오래된 편지 같은 거 말이다. 또 어떤 건 하찮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귀해지는 것도 있었다. 오래 신어 밑창을 세 번이나 갈았지만 이제는 내 발에 가장 잘 맞는 구두나 어느 날 책상 맨 아래 서랍에서 나온 대학시절 F 줄줄이 새겨진 성적표 같은 거 말이다. 그때부터 남에게는 아무 소용도 의미도 없겠지만 자신에게는 귀하고 소중한 가치가 되는 것들이다. 사람은 어떨까..
그래, 사실은 ‘사람’ 이야기를 하려고 시작한 글이 ‘물건’ 이야기만 하게 됐다. 아니, 사람 이야기는 아직 할 때가 아니라는 걸 물건 이야기 하다 보니 알게 됐다는 게 맞는 말일 거다. 세상에 하찮은 사람이 어딨고 귀하고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겠나. 그저 나와 잘 맞고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겠지. 천하의 악당도 그 자식에게는 가장 훌륭한 아버지가 되는 것을 많이 보지 않았나. 그러니 사람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은 언젠가 귀하고 소중해질지도 모를, 지금은 하찮아 보이는 내 물건이나 잘 챙길 일이다. 유실물 보관소에서 안락사를 기다리게 하지는 말자. 다행히 오늘의 손수건은 제자리에 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