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흐린 하늘을 여느라 잔뜩 가라앉은 채 가을을 재촉하는 비를 뿌리고 있다. 촉촉한 아침 공기를 음미하며 나는 빛 바랜 사진을 보고 있다. 전날 다녀간 초등학교 동창인 육촌 여동생이 놓고 간 것이다.
칠십이 년 전의 사진을 내밀 때 처음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당황했다. 초등학교 일 학년 이른 봄 창경원 소풍에서 육촌 여동생의 어머님, 나에겐 당고모님이 찍은 사진이다. 사진 속에는 단발머리 여동생과 내가 웃고 있고 뒤에 또 한 소녀가 바위에 앉아 있다. 우리 셋은 집 안끼리 잘 아는 처지여서 친하게 지냈다. 두 집안이 6.25 때 가재도구를 모두 잃었기에 사진 한 장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하고 귀했다. 우리는 옛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 살 차이로 내가 언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언니’라 부르지 않았다. 나 역시 동창이니 편하게 친구로 지냈다.
그런데 고모님은 그렇지 않았다. 늘 나를 가리키며 “언니 좀 봐라.”하셨다. 내가 듣기 싫은데 그도 듣기 좋았을 리 없었다. 그래서 나를 싫어했단다. 그는 딸 넷에 아들 둘의 맏딸이었고 나는 아들 셋의 고명 딸이었다.
고모님은 어머니와 여고 동창으로 두 분 다 담임선생님이 중매하여 시누이 올케가 되었으니 생전에 두 집안은 사이가 좋으셨다. 특히 고모님은 나를 귀여워하셨다. 친정 사촌오빠이신 나의 아버님이 동아일보 기자로 계셔서 시골에서 유학 온 고모님의 후견인으로 돌보셨기 때문에 늘 ‘오빠, 오빠’ 하시던 고모님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아니었단다. 늘 맏딸이라는 이름으로 고모님은 자신에게 엄하게 하셨단다. 동생들 몫까지 야단을 맞아서 나까지 싫었단다. 우리는 자주 왕래는 하지 않았지만 잊지 않고 소식을 전하며 지냈다. 나는 이제 우리 나이에 그러지 말고 다음 번 만날 때는 동생들도 같이 만나자고 했다. 나의 어머님은 내가 외로울까봐 늘 여자 형제 많은 고모 댁에 보내셨고 내가 딸을 넷 나으니 “너 외롭지 않아 내가 편히 눈을 감겠다.”하셨다.
당시 우리는 동아일보사 뒤 서린동에 살았고 친구네는 한국일보사가 있는 증학동에 살았다. 우리는 지금 종로구청 자리의 수송초등학교에 다녔다. 나는 일제 때 도로확장공사로 철거된 돈의문 근처, 지금의 기상대 아래 평동의 언덕을 굽이굽이 돌며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이모님 댁에, 그리고 역시 일제 때 허물어진 서소문에, 안국동을 지나 비원, 창경원 돌담을 돌며 고갯길을 넘어 외삼촌 댁에도 심부름을 다녔다. 서울의 사대문 안이고 지금같이 복잡하지 않아서 그런지 걸어서 잘도 다녔다. 특히 자라면서는 고모님 댁에 가는 것을 더욱 좋아했다. 고모님이 귀여워해주시는 것이 부담은 되었지만 그 곳 사랑방에는 내가 보고 싶은 책들이 두 벽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모부님은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교수이셨다. 집에 계시는 날은 책상에 앉아 늘 책을 보고 계셨고 인사를 하면 “왔느냐”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나는 아버님께 항의를 한 적도 있었다. 고모님 댁에는 책이 많은데 일본 유학까지 다녀오신 아버님은 셰익스피어 전집, 세계문학전집도 몇 권 밖에 없느냐고 했더니 일제시대였으니 불온서적이라고 돌아오는 짐에서 빼앗기셨단다.
그 친구와 내가 6.25를 겪으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정세에 국군이 낙동강 하류까지 밀리자 양쪽 부모님은 안절부절하셨다. 정들어 살던 서울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낯선 부산까지 간 우리는 모든 꿈을 접고 결혼이라는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둘이 지금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우린 팔십 고개를 훌쩍 넘기고도 이처럼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염색하지 않은 흰 머리를 휘날리며 적당히 자리잡고 있는 주름이 귀태 나는 고모님 모습 그대로이다. 그도 아들 넷에 딸 하나, 나는 아들 하나에 딸 넷으로 자식들 모두 자신들의 둥지 찾아가서 알콩달콩 잘 지내고 있다.
또 다른 한 친구는 미국 유학을 떠나 공부하고 돌아와 당연히 결혼이 늦어져 아직도 아들 둘 의 뒤치닥거리에 바쁘단다. 우리에게 6.25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운명이 달라졌겠지, 분명히… 삶의 농간인가, 운명의 장난인가!
잔뜩 찌푸렸던 하늘도 환한 밝음과 함께 걷히고 시야에 봉은사의 소나무가 눈부시다. 잠시 멈춰 서서 책 속에 묻혀 길을 찾고 있는 나는 녹슬어가는 머릿속 꿈의 파편을 찾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예지력이 없음은 마음이 탁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끝없는 도전으로 차근차근 미래를 두드릴 것이다.
어느 책에서 읽은 것이 생각난다. 소크라테스의 원숙한 철학은 칠십세 이후에 이루어졌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벽화 ‘최후의 심판’을 60세에 시작하여 66세에 탄생시켰으며 80세가 넘어서까지 대성당의 벽화를 그렸다. 시인 괴테는 대작 <파우스트>를 60세에 시작하여 82세에 완성했다. 그럭저럭 살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확실히 알고 그 길을 향해 죽는 순간까지 달렸다는 것이다.
시간은 한없이 나에게 주어진 선물인 줄 알았다. 내가 숨 쉬고 있는 한 무한히 깔려있는 길인 줄 알았다. 나이가 들었다고 꿈까지 늙지는 않았으니…
2009. 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