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후 남한과 북한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인물은 이승만과 김일성이지만, 1945년 8월 15일 이전부터 조선의 독립을 예상하고 대비책을 구상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 중 일부는 이승만이나 김일성에게 합류했지만,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남한을 이끌었 던 이승만은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골라서 사용했고,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 에게 가차없이 철퇴를 가했다.
당시 북한을 이끌었던 김일성 역시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는 계파 를 친일파로 몰거나 민족반역파로 몰아서 처벌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는 당시 미국과 소련을 중 심으로 하는 냉전이 주요 원인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이념 갈등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사회주의를 주요 이념으로 선택했고, 이승만은 자본주의를 택했기 때문에 북 한은 중국과 소련과 우방이 되었고, 남한은 미국과 유엔 측과 우방이 되었다. 해방 직후 이데올로 기 갈등은 꽤 심각한 상태였다. 그래서 남한과 북한 양측 모두 통일을 원했다. 남한은 남한대로 자주성과 국가 우선적인 통일정책을 마련했고, 북한은 북한대로 자주성과 국가 우선적인 통일정 책을 마련했다. 당시 양측 통일정책의 공통점은 무력 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외국의 협력과 공조, 평화보다는 자신이 속한 세력의 힘을 믿고 지나치게 무력통일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 결과 6.25 전쟁이 발발했고, 전후에도 꾸준히 크고 작은 마찰이 있었다.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까지의 남 북 통일정책의 특징을 읽으면서, 통일 방법의 우선순위는 평화라는 것을 느꼈고, 국제협력을 전제 로 한 자주적 통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북한은 1940년대에 남한보다 안정적인 사회구조를 설립했다. 김일성은 같은 좌익 세력들 에게 모스크바 3국 외상 회담에서 제안된 신탁 통치를 찬성할 것을 강요했고, 자신의 뜻에 반하 는 세력들을 반역자로 몰아서 제거했다. 일차적으로 세력정리를 한 김일성은 경제력과 국력을 강 화했다. 토지 개혁, 산업 국유화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김일성은 남한을 통일시킬 계획을 준비 했다. 6.25 전쟁 전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적지 않은 규모의 지원과 원조를 받았다. 김일 성은 ‘민주기지론’을 주장하면서 북한을 공산주의 혁명 거점으로 세우고, 무력으로라도 적화통일 을 시도했다. 결국 그는 남한을 침공했지만, 그의 야심찬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전후 남한을 적 화통일을 하겠다는 시도가 물거품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그의 지배체계를 굳건히 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주체사상을 주장하면서 그의 절대성을 강조했다. 북한에서 자신 외 다른 세력 들을 견제하다가 결국 모두 제거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온건한 남북한 자유 총선거를 주장했고 당시 더 가난했던 남한의 국민들을 해방시킨다고 했지만, 실질적 으로 그는 독재자가 된 것이다. 또한, 김일성은 겉으로는 한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면서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는 전쟁을 하기 위해서 소련과 중국의 물자에 꽤 많이 의존했다. 결 국 그가 행한 행동은 국가 우선주의에 훨씬 가깝다. 초반에는 북한 주민들이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김일성은 1950년대 중후반부터 사회 주의를 숭상했다. 그와 동시에 주체사상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우상화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통일 정책을 위해서 자국민을 이용했을 뿐 진정한 후생을 발전시키진 않았다.
남한은 당시 북한보다 사회가 훨씬 혼란스러웠다. 북한에서는 좌익과 우익 세력 간의 갈 등이 남한보다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남한은 좌파와 우파의 대결이 매우 격렬했다. 중도파 들도 서로 의견이 조금씩은 달랐다. 특히 해방 후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이 있었 다. 그러한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이승만은 일단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을 인정하기보다는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그는 북조 선과는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았으며,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서 무력으로써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그는 다른 인사들의 여러 의견들을 묵살했고,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강제 로 진압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승만은 반공주의 세력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들과 연대한 이승만 은 북진 통일론을 주장했다.
실제로 6.25 전쟁 발발 중에 그는 꾸준히 북진통일을 위해서 미국의 지원을 요구하였고, 정전협상도 찬성하지 않았으며, 한반도 분단을 전제한 평화 제안도 반대했다. 그는 그저 자유주의 체제하의 민족해방을 원했던 것이다. 일련의 과정들을 살펴보면, 이승만은 미 국 이외의 다른 국가들과의 협상은 일절 원하지 않았으며, 표면적으로만 민족우선의식을 강조했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국민들에게 북한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서 자유주의와 북진통일만이 정답이라고 명백히 주장했다. 하지만, 그러한 방법은 남한 국민의 피해는 자연스럽게 수반된다. 실제로 전쟁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고, 전후 상황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희생자가 나 왔다. 따라서, 이승만은 국가를 위해서 국민들을 도구로 사용한 셈이다.
남한과 북한의 1940년대와 1950년대 통일 정책에는 비슷한 면이 많다. 두 진영 모두 무 력통일을 시도했고, 표면적으로 민족자주성을 강조하였지만 그 이면엔 국민들의 희생이 따라왔다 는 것이다. 그렇다고 차이점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은 해방 후부터 1960년까지 남한 보다 사회·경제적으로 안정적이었다. 김일성은 이러한 점에서 북한이 남한보다 우월했기 때문에 당시 더 가난했던 남한의 인민을 해방한다고 주장했고, 무력통일을 시도했다. 북한은 근거가 있는 자신감으로 적화통일을 시도한 반면에 남한은 미국의 지원이 없이는 북진정책을 실행할 수 없는 근거 없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저 자유 체제하의 국가건설을 할 계획이라고, 그리고 UN이 인정한 국가라고만 할 뿐이었다. 그들은 올바른 국가 체제 형성을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이 해왔던 행 동은 올바르지 않았다. 그러한 정책들은 오히려 그들의 독재를 도와주었으며, 국민들은 독재를 위 한 도구로 전락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승만과 김일성은 민족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상대를 적대시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민족 내의 이데올로기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 과정과 결과로 부터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이제 국가의 체제만을 중시하는 통일정책은 지양되어야 할 것 이며, 무력 사용 또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책의 방향성을 필수적으로 바꿔야 한 다는 것이다. 현세대에는 통일을 위해서 주변국들과 외교 정책에 더 신경을 써야할 것이며, 가능 하면 우리 민족 내에서 평화적으로 통일을 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해야 할 것이며, 정치·경제·사 회·문화적으로 더 안정된 남한이 북한을 원조하면서 통일 정책 마련을 선도해야 할 것이다. 비록 이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한민족이라면 화해와 협력을 통해서 통일은 이뤄내야 할 필수 과제이다.
잘보고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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