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도 저녁이면 노을이 진다 day5

in kr •  7 years ago 

아름다웠다. 눈 부시는 햇살 속에 새하얀, 파리의 그것과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는 사람들이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것이 보였고, 수백 채는 되어 보이는 동화에나 나올 법한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약간은 추울 법한 바람이 얼굴에 부딪혀왔다. 한시라도 빨리 나가보고 싶었다.

다른 날보다 조금 늦게 일어나 일층으로 올라가니 가족들은 막 식사를 하려던 것으로 보였다. 앙뚜앙의 아버지께서는 그 인상만큼이나 재미있는 분이셔서 다행이었다. 농담도 하셨고 영어도 곧잘 하셨다. 크로와상과 초코렛 빵을 먹자 모두들 내가 스키복을 입기를 기다리는 듯 했다. 나도 일사천리로 나갈 준비를 하여 앙뚜앙, 쟌과 함께 차를 타고 스키장으로 갔다.
앙뚜앙은 나 때문인지 일부러 스노우 보드를 타기로 했고, 난 내 몸이 보드를 기억하기를 바라며 차에서 내렸다. 앞에 있는 리프트를 타는데 친구들이 알프스에 대해 말해주던 것들이 생각났다. 수많은 사상자들, 아찔한 낭떠러지들. 알프스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위한 공간처럼 들렸다. 내 말에 앙뚜앙은 걱정 말라며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게 많이 죽지는 않는다고. 그렇게 많이 죽지는 않는다니. 내가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건가.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가운데 난 리프트가 십오 분 째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걸 깨달았다. 이것이 초급 코스라니.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절경은 까마득했다. 앞으로 가는 것도 안 되었는데 이 산을 내려가야 한다니. 양옆에는 우리나라 스키장의 안전 그물망이나 벽 대신 절벽이나 숲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불안해지며 넘어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하였다. 그만큼 넘어지니 앞으로 가는 것이 좀 수월해졌지만 행여나 눈 위로 엎어질까 두려워 발가락과 다리에 힘을 꽉 주고 내려갔다. 한 삼십분을 내려온 것 같다. 무사히 지상을 밟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앙뚜앙은 이제 초급 코스를 마쳤으니 중`상급 코스로 가자며 위태로워 보이는 리프트로 날 이끌었다. 난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

중급코스는 깎아지른 듯한 언덕이었다. 리프트에서 내리며 넘어져서 굴렀던 나는 산을 정복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전혀 없고 걱정만 앞섰다. 앙뚜앙에 이어 이제 도착한 앙뚜앙의 아버지께서도 카메라로 나를 찍어주시며 부담감을 고조시켰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넘어지는 걸 반복하니 다리가 감을 잡은 것인지 더 이상 넘어지지 않았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힘을 빼는 순간부터 난 산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앞뒤로 도는 것도 가능해졌고, 급기야는 멈추거나 넘어지지 않고 언덕을 통과하는 것도 성공했다.

점심 먹을 때가 되자 앙뚜앙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리프트 타는 곳 바로 옆에 있는 큰 레스토랑에 데려가셨다. 그 레스토랑은 앙뚜앙의 고모와 고모부께서 운영하시는 가게였는데 모든 음식을 공짜로 맛볼 수 있었던 데다가 Elissa 라고 하는 앙뚜앙의 이쁜 사촌도 있었다. 음식으로는 치즈 스파게티와 비슷한 외관을 가지고 있으나 면 대신 구운 빵과 채소가 곁들여진 그라탕 비스무레한 음식을 먹었다. 내가 프랑스에서 먹어본 요리 중 으뜸가는 맛이었다.

식사 후에 슬로프를 타던 나는 마침내 초보자 중에서는 어렵다 할 수 있는 스키점프 코스에서 내려오는 걸 도전했는데 마지막 언덕에서 넘어질 때 발을 세게 부딪혀 발톱이 부서져 버렸다. 내 자만심이 초래한 결과라 생각해도 걸어 다닐 때마다 통증이 느껴져 더 이상의 스노우보드는 무리인 듯 했다. 어차피 저녁때는 앙뚜앙 할아버지의 장례 뒤풀이 행사에 참여해야 해서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몸을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에 있는 교회에 가야 한다고 앙뚜앙의 아주머니께서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차를 타고 도착한 교회에는 점심 때 만났던 엘리자와 앙뚜앙의 고모, 고모부 말고도 많은 일가친척들이 와 계셨다. 앙뚜앙의 할머니도 계셨는데 내가 이번 국제 교류를 신청하기 막 일주일 전쯤에 앙뚜앙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나도 장례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로선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검은 옷을 입고 왔을 걸 하고 후회했지만 예상 외로 교회 내부는 숙고하다기보다는 즐거운 분위기였다. 웃고 떠들기도 했고, 목사님께서 식을 진행하시는 동안 울거나 굳은 표정을 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초상집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였다. 이미 이승을 벗어난 사람을 위해 모두가 웃어주려 한다는 느낌이었달까. 한 시간정도 프랑스어로 찬송가를 같이 부르고 난 뒤에는 여덟 명 정도의 가족이 모여 Morzine 시내에 있는 큰 레스토랑에 갔다.

앙뚜앙의 사촌남동생들인 Bart와 Arthur 가 같이 갔는데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아쉽게도 엘리자는 오지 않았다. 메뉴를 시킬 때가 되자 나는 치즈 퐁듀와 이름 모를 음식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했다. 난 어느 것이 어떤 음식인지 전혀 몰랐기에 그냥 둘 다 시켜서 다 같이 먹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퐁듀는 냄비에 모짜렐라 치즈를 한가득 담아 온 뒤에 빵을 그 안에 넣었다 빼서 먹는 것인데 그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고얀 빛깔의 치즈는 맛이 일품이었다. 이름 모를 음식은 큰 치즈를 조금씩 녹여서 그 녹아내린 치즈와 감자를 섞어 먹는 것이었는데 매우 독특한 경험이었다.

디저트로 먹을 것이 메뉴판에 나와 있었는데 난 쟌에게 괜찮은 아이스크림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작은 와플과 휘핑크림이 함께 섞인 샤베트가 나왔는데 생긴 것만큼 기막힌 맛이었다. 그때 바트가 나에게 휘핑크림이 너무 느끼하지 않냐고 묻길래 나도 어느 정도 동의 한다고 해 버렸는데 그 말을 들은 모두가 쟌에게 눈을 흘기는 것 같아서 내가 오히려 미안해졌다.
긴 긴 식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자 별로 피곤한 마음이 없었다. 아무래도 평일에 베르사유 궁전이나 오르세 미술관을 관람했던 것에 비하면 그날의 스노우보드는 약과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내 침대에 누워 만화를 읽다가 잠에 들었다. 이 여행도 얼마 안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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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뵙지도 못한 엘리자씨가 강렬하게 남는 글이에요..!!
스키 묘사 장면은 글만으로도 다이나믹함이 느껴지네요 : D
재밌게 읽고 갑니댱 day6도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