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에세이]
뚜르 드 몽블랑(Tour de Mont-blanc, TMB) 트레킹
- TMB : 알프스의 몽블랑(4810m)둘레를 한 바퀴 일주하는 트레킹 코스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3개국에 걸쳐 있다.
흰 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걸을까. 멈춰서서 힘없이 고개를 든다. 주위를 기웃거리지만 인기척이 없다. 시선 앞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조용한 개울 소리 위에 쌓인다. 그늘진 길 위에 어둠이 빠르게 드리운다. 하얀 눈이 어둠과 함께 오니 기묘하다. 부드럽게 내려앉아 각진 십자가에 물든다.
어디쯤일까. 처음으로 와보는 길 위에서 몸이 떨린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자, 그렇더라도 기도하면 좋은일이 있지 않겠냐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다. 십자가 앞에서 고개를 내린다. 길 위의 나는 정말 괜찮을까. 이름도 모르는 그들에게 기도한다.
‘신이시여, 부디. 저를 지켜 주소서.’
평소라면 포르투는 그저 아름다운 도시였을 것이다. 도루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붉은 지붕들은 그 곳에서 마시던 와인의 색과 같았다. 떠오르는 기억들에, 코르크 모서리를 괜히 쥐어 뜯는다.
전에 말라가에 갔었다. 꼬여버린 일정 때문에 늦은 밤에서야 호스텔에 도착했다. 옥상에서 하루를 정리하는데, 반대편 테라스에 홀로 라면을 먹던 그녀가 있었다. 내 옆을 지나가던 그때. "혹시, 괜찮으시면....", 흔하고 흔한, 그런 시작이었다. 하룻밤만 있으려던 그녀를 잡았다. 서로의 시간들을 밤마다 테라스에 모았다.
이틀이 더 지났다. 오늘은 헤어지는 날이다. 알함브라 궁전을 보고 싶어, 그라나다로 가는 계획을 세웠다. 이제 나는 그라나다로, 그녀는 세비야로 간다. 다른 목적지로 가기 위해, 함께 정류장으로 간다.
뭔가 이상했다. 정류장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물어보니 공휴일인 노동절이란다. 문제는 그라나다로 가는 버스가 매진이다. 대안이 없었다. '오늘, 나는 그라나다로 간다.' 이것이 내 여행 계획의 전부였다. 버스가 없어 발만 구르던 내게 그녀가 말했다. "내가 밥 사줄게, 같이 가자!".
어쩌면, 버스를 확인한 순간부터 그 말을 기다렸던 것 같다. 당장 머무를 숙소부터 걱정해야 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더 이상, 그라나다의 나는 없었다. 우리는 세비야의 태양아래 있었다.
누군가 세비야에 대해 묻는다면 '전부 다 붉어'라고 대답할 거다. 정말 모든 것이 그랬다. 심지어 세비야의 밤도 붉은 빛을 가졌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붉게 물들었다.
여기서 또 이틀. 그녀의 여행은 여기까지였다. 한국으로 간다던 그녀를 뒤로하고 버스에 오른다. 빠르게 멀어지는 버스가 야속하다. 밤을 꼬박 달려서 리스본에 도착했다. 어디로 가야하나 살펴보는데 비가 온다. 추적추적 내린다. 기분 탓일 거다 생각하며, 숙소에 찾아갔지만 이른 아침이라 문이 닫혔다. 계단에 앉았다. 한 시간여를 기다렸다.
그렇게 혼자하는 하루의 시작이다.
파도가 왔다 간다. 바닷가에 앉아 멍하니 바라본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무기력만 남았다. 휴식을 취해도 힘이 없다. 어쩌다 이곳까지 왔을까. 여행의 목적을 찾으려는 나는 혼란스럽다. 그런 상태로 포르투로 떠날 준비를 마친다. 리스본의 마지막 밤길을 홀로 걷다 떠올린다. 언젠가 여행 잡지를 봤다. 알프스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뚜르 드 몽블랑(Tour de Mont-blanc, TMB)에 가자.
샤모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트레킹을 시작한다는 것이 TMB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였다. 정말로 나는 아무 대책이 없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불어로 쓰여진 안내책자를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결국 지도 하나와 가스 몇 통을 준비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다음 날, 출발을 결심했다. 숙소를 나서다 사장님을 찾았다. 짐을 맡아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지금 트레킹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사장님이 놀란다. 그렇게 갈 거냐며, 아이젠은 있냐며, 지금은 위험하다며 질문이 쏟아진다. “괜찮을 거에요. 버스타는 곳이 어디죠?” 못말리는 나에게 조심히 다녀오란다. 숙소 앞까지 나와서 위치를 짚어주신다.
포르투에서 바르셀로나로. 바르셀로나에서 제네바로. 제네바에서 샤모니로 오기까지. 부끄럽지만 나는 실패를 의심한 적 없다.
흰 산.
정말이다. 점점 바람이 차다. 더 깊은 산골로 가는 중이다. 이제는 '가기 싫다'고 몇 번이나 혼잣말했는지 모른다. 다른 선택이 없다. 앞의 흰 산을 돌아가려면 몇 일을 더 걸어야 한다. 지도의 범위를 한참 벗어나는 구역이다. 일정을 고민하는데, 작은 우박이 머리를 두드린다. 구름이 몰려온다. 당장 가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내몰며 오르기 시작한다. 얼어버린 흙길이 발걸음을 힘들게 한다. 네 시간쯤 올랐을까, 정상에 가까운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엄청난 바람이 사방에서 분다. 눈보라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숙인 채, 발 밑만 본다. 누군가의 어지러운 발자국을 찾아 걷는다.
조그만 표지판 뒤에 웅크려 가쁜 숨을 몰아쉰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기뻐야 하지만 기쁘지 않다. 거센 바람에 더 이상 앞으로 가는 발자국이 없다. 길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 내려가는 것이 위험하다면 이곳에서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일에 생각한다. 마음 한쪽에서 갈등을 시작한다. 텐트는 이 바람을 버티지 못할 거다. 이런 날씨에 사람들은 오지 않을거다. 불안감이 커진다.
어떤 이유에서건 나는 이곳에 머물 수 없다고 확신한다. 이제, 어느 방향으로 갈지 선택해야 한다. 앞은 더 높은 산으로 가는 길이고, 뒤는 내가 왔던 길이다. 양 옆에는 눈이 깎여 생긴 얕은 절벽이 있다. 그 외엔 보이지 않는다. 숨을 크게 마신다. 이제는 어떤 흔적도 없다. 지도를 꺼낸다. 쉽지 않다. 바람에 찢길 것만 같다.
위치를 확인한다. 내가 가려고 하는 길은 한쪽은 폭포가 흐르는 골짜기이며, 다른 쪽은 알프스 산맥 중심으로 가는 골짜기다. 어느 쪽으로 내려가던지 이 정상을 다시 오르는 일은 불가능하다. 아찔함에 눈앞이 캄캄하다. 최악의 경우 되돌아가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뒤를 보는데 걸어왔던 발자국마저 없어진다. 공포는 이미 한계치다. 의외로 무덤덤하게 선택한다.
오른쪽으로 뛴다.
얼마나 내려왔는지 모르겠다.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저 멀리, 사람이다. 나는 반가워 소리지른다. 팔을 흔들어 보지만 반응이 없다. 바람 소리때문인가 싶어 가까이 간다. 걸음마다 눈이 다리를 덮지만 힘들지 않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깜깜해졌다. 그 곳에는 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 사람 밑에서 급경사의 내리막을 만난다. 부푼 기대만큼 깊은 절망감에 빠진다. 잘 내려갈 수 있을지 걱정이 크다. 걸어 내려가긴 힘들겠다싶어 뒤로 누워 미끄럼을 타기로 했다. 일단 천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속도가 붙자 조금 무섭긴 했다.
갑자기 옆에서 느껴진 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토끼가 나를 본다. 실망과 반가움 사이에서, 앞을 보고 일어서는데, 밑에 눈이 녹아 생긴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어쩌면 폭포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인사라도 하려는데 토끼는 말없이 제 갈 길을 갔다.
넘어지고 일어서길 수십 번, 진짜 사람의 흔적을 찾았다. 다시 걷기를 두어 시간. 흩날리는 눈발 속에 스위스 국기가 펄럭인다. 길 위에서 홀로 소리를 질러본다. 기쁨도 잠시, 낮아진 고도에도 여전히 날씨가 좋지 않았다. 온몸이 젖어버린 탓에 쉼 없이 걸어 캠핑장을 찾는다.
무거운 문을 두드린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중년의 여부인이 인사한다. 내 몰골을 보고 잠시 놀란다. 따뜻한 커피를 먼저 내어준다. 여정에 대해 묻다가 TMB 전용 대피소로 안내해준다. 프랑스에서 온 한 팀이 있단다. 두시간 후에 올 거란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문명 속에 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자,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퍼진다. 우의를 덮어쓰고 눈덮인 잔디밭을 걷는다. 저 멀리, 구름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산. 실감이 나질 않는다.
천장의 삐걱대는 전등이 멀리 퍼질 무렵, 그들이 왔다. 여덟 명이었다. 간단히 소개를 한다. 그들도 TMB를 걷고 있다고 한다. 다만,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왔단다. 오늘 내가 내려왔던 산에 오르려고 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계획을 보류했다며, 산 위의 상황은 어떤지 묻는다.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자 정말 수고했다며, 나를 보듬는다. 그렇게, 오늘이 깊어진다.
나는 '흰 산'에서 무사히 내려왔다.
다음날, 다시 길을 걸었다.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다. 나는 혼자일 수 없게 됬다.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하다 생각했다. 달리자. 그래서 마을이 있는 곳에서 잠을 자자. 끝내자.
추운 날 한없이 멍하니 있다 생각한다. 그 여행은 혼자하는 선택의 연속이었다. 순간마다 '만약'을 붙여 본다.
한 번은, 산에서 내려오다 세 갈림길을 만났다. 옆에 부러진 표지판이 있었다. 고민을 거듭하다 선택했다. 나는 결국 길을 잃었고 엄청나게 걸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울 것만 같은 마을을 걸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길 위의 사람들이었다. 그저 걷기만 하는 나에게 인사하며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언제나 좋았던 기억들 속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말 뒤에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텐데'가 있다. 어쩌면, 살면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옆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의 존재만으로 행복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옛날 영화의 마지막을 떠올린다.
Happiness only real, when shared.
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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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 하루 마무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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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다 왔더랬죠. 아마 제 인생에서 죽음에 가장 가까웠던 순간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이야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저때 죽었으면 시신도 못건졌을테니까요. badasori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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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트레킹하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스달 잘 받았습니다!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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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모험이 되었군요.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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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저 모험(?)이 지금 큰 경험이 되더라구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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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got a 9.32% upvote from @upyou thanks to @hoo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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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팅봇은 이벤트 당첨으로 제가 부른 보팅 봇입니다.
@mohomogu님이 사용한 것이 아니니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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