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당의 차 이야기 22.
1996년 한창기 사장의 갑작스런 사망은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화두(話頭)를 던졌을 것입니다. 그가 보여준 삶의 형태가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그가 운영했던 잡지만 해도 세인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정치 사회적 이슈 보다는, 주로 인간 삶의 문제나 문화를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한마디로 돈 보다는 자신이 꼴리는 대로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한국에서 문화계의 대부로 인정받았을 것입니다.
(선암사 법당의 탱화)
어쨋거나 그는 1996년 2월, 6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49일이 지난 후 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제(祭)가 선암사 대웅전 법당과 앞마당에서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애도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의 어떤 점이 이 많은 사람들을 남도땅 산속까지 오도록 만들었던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그를 깊히 설명할만큰 그를 잘 알지 못합니다. 함께 시간을 보낼 일이 그리 많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임종 전에 내가 목격한 그의 마지막 모습으로 그 삶의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의 코미디 같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병실에 들어갔을 때, 갑자기 ‘모두 썩 나가라!’라는 한사장의 고함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여러사람들이 우루르 몰려나왔습니다.
“아니 무슨 일이요?”
“내 앞에서 계속 찬송가를 불러대고 있으니 견딜 수가 있나. 저놈의 예수쟁이들 꼴보기 싫어서 빨리 죽어 버려야 겠구만,”
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기독교 신도인 친척 하나가 성가대를 데리고 와서 딴에 한 사장을 위로해 주겠다고 한 짓이었던 모양인데 그는 한 사장장을 한참 모르는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도 이렇다 할 여성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어떤 종교에도 깊이 빠지지 않았던 그였음을 가까이서 본 나도 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우리 문화를 사랑했고, 그같은 애정을 골동품 가게를 구경하는 것으로 표현했던 괴팍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나는 그 교회 성가대를 쫒아내는 장면을 떠올리며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그를 진심으로 극락행을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그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 다시 그와 얼키게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제(祭)가 끝난 다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돌아가기 시작할 즈음 허름한 작업복을 걸친 사람 한명이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모리거사님이시죠? 나는 한상훈이라 합니다. 거사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나에게 말을 걸었던 사람을 바라본 순간 그가 말로만 들었던 한창기씨의 동생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형이 임종하기 전 선암사에 가서 나를 만나보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는 것입니다.
“차 공부 때문에 선암사에 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원하신다면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한 사장은 자기 때문에 선암사까지 내려 갔음에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내 말에 부채의식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난 한상훈씨의 이같은 말을 들었을 때, 한창기란 인물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망을 안타까위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지요.
결국 한 사장의 49제가 끝난 며칠 후 나는 선암사를 떠나 ‘한상훈’씨가 살고 있는 벌교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창기 사장과의 인연(因緣)에서 시작된 나의 차 인생은 그가 추구한 삶의 철학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깨닫기 까지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내가 머물게 된 곳은 벌교 지곡리 마을에서 꼬불길로 한참을 산으로 올라야 하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 산의 이름이 그 유명한 ‘부용산’이었는데, 그곳은 한국전 당시 빨찌산 대원 한 명이 자신의 동지이자 애인이었던 시신(屍身)을 묻었고 노래했다는 그 유명한 산이었습니다.
한상훈씨는 이 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한씨 문중의 제실로 날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은 행랑채와 본채가 독립적으로 지어져 있었고, 폭넒은 마루도 함께 붙어있는 전형적인 구들방 한옥이었습니다. 더구나 높은 축대 위에 지어진 본 채는 세칸 집으로 중앙에 제를 지낼 수 있는 큰 대청을 포함하고 있는 다포집 지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아름답게 쌓아놓은 토담과 잘 생긴 대문까지 만들어 놓고 있어, 산속에 이같은 제실을 지었다는 점으로 보아 한씨 문중도 제법 잘나가는 집안이었던 모양입니다.
“어떻습니까? 머물만 해 보입니까? 집 주변에 차 나무들도 널려 있으니 공부하기도 적당할 것 같아 이곳으로 모신 것입니다”
“좋습니다. 멋진 곳 같습니다. 게다가 내가 머물던 덕유산의 모릿제와 비슷한 분위기라 더욱 마음에 드는군요.”
나는 고마움을 전하며 승낙했습니다. 비록 마을과 떨어져 혼자 귀신과 함께 논다는 점에서 모릿재와 비숫했지만 주변 환경이 거칠지 않고 안정감이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덕유산 모릿재 보다는 더 훌륭해 보였습니다.
“형님 산소를 올라오는 길 목에 모셨고 아직 주변 단장이 마무리 되지 않아 선생님도 자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부용산 모릿재 생활이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전통차 만드는 법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역시 자신의 형이 죽은 후 정확히 일 년만에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맞게 되었고 그의 시신마저 그 산 밑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한상훈씨와 어울렸던 부용산 생활은 차 인생을 살아가도록 안내해 주는 계기를 만들었고, 비록 두어 살 위였지만 친구이자 동지로써 우의를 나누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부용산 중턱에 형님과 함께 뼈를 묻히게 되었을 때, 부용산 노래가 떠올려 졌습니다.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안타깝게도 그가 사망한 후에서야 그의 진면목(眞面目)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천연 염색법, 옹기 제조법, 전통차 제다법 등 사라져가는 민족문화의 맥을 찾아내어 이를 되살리려 해왔던 장인(匠人)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창기씨 역시 이같은 동생이 있었기에 문화적으로 풍성한 잡지를 만들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쨋거나 그는 자기 형님이 임종하기 전 자신에게 준 과업을 완수했고, 덕분에 난 그로 부터 전통차 법제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더 연장되지 못한 것이 진한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