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에 쏟아지는 저주에 대해...(1)
by @ninetempo
그야말로 역대급이다. 한 드라마가 시작전부터 욕을 먹기 시작해, 시작한 직후 마치 방영이 끝난 듯 비난 세례를 받는 경우가 또 있었나 싶다. 친일파 옹호를 하면 비슷하게 욕을 먹으려나?
연일 쏟아지는 나의 아저씨에 대한 비난은 저주라는 말이 모자라지 않는 수준이다.작품의 설정이나 특정 장면에 대한 불호로 인해 발생하는 불특정 대중의 비토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진지한 평론을 업으로 삼는다는 자들이 그 분위기에 올라타 이렇게까지 저주를 퍼부어 대는것은 광기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그들의 비판을 요약하자면 대강 이렇다. 아저씨라는 단어가 표상하는 중년 남성의 입장을 옹호하며 합리화하고 있다는 말이다. 일단 중년남성의 입장이 대변되거나 합리화 되면 안되나? 라는 점이 의문이지만 이 부분은 패스하자...
<나의 아저씨>는 중년 남성들의 행태를 합리화한다기 보다는 주구장창 그들의 한심함과 부조리를 전시하고 있다. 이 작품 안에서 주체적으로 상황을 대하고 일관성을 지켜나가는 사람은 여자주인공 이지안 뿐이다.그에 반해 남자 캐릭터들은 남성성을 상실했거나 권력을 알량한 정치질에 휘두르는 비호감 남성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안에서 도대체 어디에 한남-기득권 옹호가 존재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중년 남자 시청자들이 작품을 통해 위로 받는다고 해보자. 그런다 한들 뭐가 문제인지? 대중 매체를 통해 받는 위안에서 중년 남성이 배제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모두 기득권-한남이라서?
이 비판이 성립하려면 저 남자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기득권-한남에 대한 대표성을 띄어야 할 것이다. 고용 불안에 시달리다 내쳐진 큰형, 회사내 권력 투쟁에서 배제된 작은형, 주류에 진입하지 못하고 나이만 먹은 막내. 이 셋이 기득권-한남을 대표한다고?
작품 내에서 실제 세계의 한남-기득권에 부합하는 캐릭터들은 악역을 차지하고 있다.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는 회사의 간부들, 극악한 폭력을 휘두르는 사채업자가 그들이다. 설마 나의 아저씨가 그 악역들을 위무하고 합리화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아니겠지?
이선균과 삼형제로 대표되는 찌질한 중년들과 김영민(도대표)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중년의 캐릭터에 대한 구분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공통점은 나이와 성별만 남는다. 나이와 성별 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캐릭터를 한데 뭉뚱그려 배척 해야한다면 그건 인종차별의 논리와 도대체 뭐가 다른가? 좋은 한남은 죽은 한남 밖에 없다고 말할텐가?
그래놓고 나니 결국 한다는 소리가 ’마흔 넘어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아저씨 마을을 꿈꾼다’며 비난한다. 그 장면들은 해당 캐릭터의 망상을 통해 그들이 상실한 남성성과 자기연민에 빠진 한심함을 묘사하는 장면이지, 작품 자체가 어떤 당위를 주장하는 장면이 아니다. (이런 소리까지 해야하는게 정말 참담하다.) 삼형제를 통해 보여지는 것은 (황진미의 표현대로) 돌봄노동에 의존해 살고 있는 한남들의 한심함일 뿐이다.
한심한 인물의 한심함을 보여주는 것이 한심함과 인물에 대한 옹호이자 합리화라는 해괴한 논리를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악역의 악행을 보여주는게 악행에 대한 옹호라고 할 사람들이다.
'어떻게'가 중요하다고? '어떻게'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꽃미남 배우를 캐스팅해 재벌로 설정하고 폭력적인 연애행각을 묘사하는수많은 ‘여성향’ 드라마들의 한남-주인공들이야 말로 ‘합리화와 옹호’라는 주장에 부합할 것이다. 설마 <나의 아저씨>를 통해 박호산 같은 캐릭터가 공유처럼 인기를 끌게 될거라 믿는건가?
남성이 찌질하니 여성을 더 비참하게 만들어 로맨스를 합리화하려 한다는 주장은 더 어이가 없다. 여자 주인공 보다 나은 조건의 남성 캐릭터를 로맨스의 대상으로 소구하는 것은 남성의 욕망일까 여성의 욕망일까 라고 묻는다면 답은 간단해진다. 상황이 비참해도 어린 여성이니까 그만한 값을 한다는 미친 소리를 하진 않겠지? 로맨스를 등가교환의 원리로 해명하려는 저 속물적인 태도는 도대체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드라마 좀 작작들 보고 연애 좀 하세요...
(이선균-아이유 사이의 로맨스가 없다는 제작진의 읍소에 가까운 해명에도 불구하고 하는 소리다...)
황진미를 위시한 반대자들은 이런식으로 (지극히 자의적인 기준의) 현실과 픽션을 구분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내용과 의도를 의도적으로 오독하는 유치원생 코스프레를 한다. 그야말로 극단적인 지적 퇴행이다.더 가관인 것은 지적 퇴행의 와중에 작품의 유해 여부를 따지며 도덕적 심판관을 자처하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이런 유치함에 부끄러움도 못느끼는 것은 아마 본인들이 도덕적 당위를 대변한다 믿기 떄문일 것이다. 완장질 중독에는 약도 없다.
...2편은 내일 업로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