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동남 아시아의 역사, 클라이브 크리스티
18세기 이전 동남아시아의 지역에서 버마족은 에야워이 계곡, 라오족은 메콩강 유역의 북부와 중부, 베트남 동부 해안 지역에 있는 저지대의 현재까지 이르는 유일한 다른 민족은 캄보디아의 크메르족이었다.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는 식민지 개척의 일환으로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열강들이 유럽을 벗어나 식민지를 개척한 원인에 대해서는 첫째 18,19세기 유럽과 북미에서 일어난 과학, 산업, 기술, 행정 부문에서 혁명 때문이었다. 둘째 식민지 확장은 유럽의 모든 강대국이 확대된 시장과 투자 기회를 제공했다. 셋째 원자재를 공급하게 되고 국내의 인구 과잉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전체로서의 이 지역의 근현대 역사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통일성을 어느 정도 논증할 수 있느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와 2차 세계 대전 중의 일본의 지배에 따른 외부로부터의 공통적 경험이다.
- 민족주의에 의한 탈식민화, 반식민운동과 민족주의 해방운동
- 냉전 시대의 동남아시아의 분열, 공산주의와 반공산주의의 대결 구도
- 미국의 배후로 인한 반민주주의와 지역 세력과 반공의 집단적인 정체성
두번째 질문은 근대 이데올로기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이데올로기는 역사가 전개되는 각기 다른 단계에서 주요한 정치적인 세력들과 개인이 지니고 있던 선입견과 우선적인 가치를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안내자 역할을 했다. 이에 따라 역사적인 시각(학문적 견해)와 관찰자들의 균형 유지를 위해 다양한 시각의 글을 함께 수록했다. 그러나 저자의 질문에 불구하고 아시아 내부의 시선은 없고 서구적 관점으로 지나치게 바라보았다..
식민 열강과 토착 지역 엘리트와의 동반 관계 형성
식민지배자들은 근대 교육을 통해 서구적 세계관를 주입시키려 했다. 이전 세대의 지도자들, 군수, 관리, 지방 행정관, 종교지도자는 19세기 전통 지배를 공고히 하며 반식민지 운동 전개했으나 그러나 방어적 태도였다. 그에 반해 신세대 엘리트는 식민 세력에 협력하며 서구의 가치 체계와 문화를 수용하는 자세를 보였다.
동남 아시아에서 근대 국가를 형성하는 기초 이념은 민족주의였다. 18세기 유럽에서 등장한 민족 국가 사상은 18-19세기 유럽에서 형성된 개념으로 문화, 정치 변혁 운동과 결속의 가장 중요한 이념이다. 민족주의는 지배계급인 위로부터 강하고 통일된 국가 정체성 확립하고 아래로부터 대중의 독자성을 구축하는 목적을 지녔다. 그러나 계급 체계의 동적 결합 또는 긴장 관계로 인해 사회 구성원을 통합 또는 분열하는 도구가 되었다. 동남 아시아의 민족주의 문제는 20세기 초반의 교육 받은 엘리트들은 새로운 도시와 광대한 농촌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이념과 견해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이질적인 행정과 낯선 이국의 경제 체제 변환에 따라 농촌에서는 거부감 발생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민족 ‘자결권’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레닌은 <민족과 식민 민족에 대한 테제>에서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의 세계적 확장 판으로 서구 노동 계급의 이해와 식민화된 세계의 반식민 세력의 이해는 일치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1919년 공산주의 인터네셔널, 코민테른의 설립했다. 민족주의 + 코민테른의 공통점은 식민주의를 청산하고 독립된 아시아를 건설함에 있었다.
코민테른은 민족주의 세력을 동력화하여 기본적으로 전세계적인 사회 혁명을 일으키는 목적으로 편입 보다는 연합의 논리가 우선이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세계 전략의 딜레마를 지니고 있었다. 동남아시아의 식민 사회는 산업화의 과정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후진사회로 주요 계층 대립은 자본가와 무산가가 아닌 지주와 농민이었다. 혁명 노선이 민족주의 엘리트들과 연합 시에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식민 제국을 일조한 후에 민족주의 구체제의 복원의 위험이 있었다. 즉, 이는 일시적이고 전략적인 차원에서 진행될 뿐이었다.
대동아 공영권, 일본의 동남아시아 점령
일본은 1943년 중반까지 버마와 필리핀에 독립 정부가 들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전 과정에서 식민 강대국에 동참하여 일했던 행정가들을 고용하고 의존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민중들은 일본의 또 다른 식민 통치와 자원 착취, 징발에 따른 수난으로 일본에 적대적 감정을 품게 되었다. 일본의 점령 과정에서 민중들의 지지와 반 파시즘 노선을 내세운 공산주의 좌익 운동이 반 일본 활동을 주도했다. 1941년 인도 차이나 공산당인 베트민은 베트남의 해방을 위해서, 1942년 필리핀에서 후조알라합 게릴라 운동, 말라야(말레이시아)에서 말라야 반일 인민군, 버마의 반파시트 조직과 반파시스트 인민 자유동맹, 인도네시아에서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자바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며 항일 투쟁에 참여했다. 2차 세계 대전 후에 이 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들이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의 패전과 2차 세계 대전 후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제국주의 테두리를 유지하기 위해 동남 아시아로 다시 돌아 왔다. 일방적 지배보다 ‘파트너 쉽’ 이전의 제국주의 세력이 상당한 주권을 행사하면서 정치 안건을 통제하는 걸 재 규정했다.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연방안, 네덜란드의 인도차이나 연방안, 영국의 버마 독립 연기안, 영국령 말라야 연합안, 협상을 내세우며 무력 행사를 통해 협상에 임했다.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서구 식민지 세력과의 독립 협상을 통해 이해 관계를 관철시키고 위상이 강화되었다.
미국의 동남아시아 패권 정책과 소련과의 각축으로 인한 신식민주의
한편 이에 반대하는 비주류 세력이 등장했다. 첫째 소수 민족과 주변 지역 사회로 각 민족 국가에 편입되며 비주류화되었고 신생 정부에 대항하여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 분리주의 반란을 일으켰다. 둘째 일정한 이념으로 무장한 집단으로 인도네시아의 무슬림 지도자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세력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서구의 침략자들이 지지하는 민족주의자들의 포괄적인 정치 선언에서 배제 당했었다. 국제사회, 특히 2차 세계 대전 이후 패권국인 미국의 지원이 필요했으나 냉전으로 인한 이념의 대치가 결정적이었다. 이로 인한 냉전의 한 축인 소련의 지원은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민족주의 운동과의 대치 전략을 구사했다.
냉전 시대의 패권국가인 미국은 전략적으로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뉴질랜드, 파키스탄, 필리핀, 타이, 영국과 함께 남 아시아 조약기구를 설립했다. 이는 신식민주의의 탄생이었다. 미국은 타이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제네바 협정으로 라오스는 냉전 중립 지역이 되었지만 반공산주의 정책을 펼쳤다. 또한 남베트남에 반공산주의 조건으로 괴뢰 정부를 지지하고 지원했다. 이에 반해 동남아시아 신생 국가들은 양 진영에 속하지 않는 ‘비동맹’ 정책을 선호했다. 이로 인해 동남아시아 1950년대 후반부터 인도네시아, 캄보디아와 미국과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냉전시대의 거대한 사명으로 제 3세계에서 신생 독립 국가가 식민 강대국 정권을 대체하고, 효율적인 행정 조직 건설로 가난과 후진성에서 탈피하기 위한 경제 정책을 수립했다. 아시아 지역의 대립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 대리 전 양상을 띄게 되었다.
군사 쿠데타에 의한 권위주의 정권의 등장과 독립 정권의 종말
1962년 버마에서 군사 쿠데타
1963년 남베트남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군사쿠데타
1969년 말레이시아에서 정치제도 재조정
1970년 캄보디아에서 군이 역할을 맡은 쿠데타
1972년 필리핀에서 군에 의해 비상 계엄령 선포
독립 운동 후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들과 대중 운동은 행정 엘리트와 군대가 장악한 권위주의적 정권에 자리를 내주었다. ‘혁명’이라는 어용된 구호로 진행되었고 위로부터의 강제적인 쿠데타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인도네시아의 게스따뿌 사건이었다. 수카르노가 정치적 카리스마로 ‘교도 민주주의’로 좌파 사회주의 운동에 접근해 갈 무렵 독재자 수하르또가 군의 조작을 명명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공산주의 사회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을 집단 대량 학살했다. 근 현대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대규모 폭력을 불러왔고 강력하게 국가 제도를 구축하는데 이용되었고 시민 사회를 억압했다. 한편 공산주의는 소련과 중국 노선으로 내분이 일어났다. 베트남 전쟁 이후 베트남은 소련과 함께 세계노선을 추구하며 캄보디아를 점령했다. 이에 중국은 소련과 대립하며 캄보디아를 지원했다. 크메르루즈의 집단 학살 이후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으로 달아났던 크메르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했다.
반민주적인 동남 아시아 정권의 권력 기반
권력 위주의 정부 수립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정치적 후퇴를 양태했다. 군대, 기업, 지주, 행정 관료 및 기술 관료 엘리트들도 이들의 이해 관계는 착취와 부패를 용인하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현상 유지에 부합했다. ‘공공 정책’은 국가가 사회적이고 경제적으로 우선권을 두겠다고 선언에 의해서라기보다 도시에 기반을 둔 소수의 고소득 집단의 이해 관계에 결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버마, 말레이시아에서 일어났던 민주화 운동은 절대 권력자들에게 커다란 탄압을 받았다. 동남아의 현대사는 19세 이후 지배권력과 피지배자의 식민주의의 연장선 상이었다.
현재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필요한 요건은 빈곤 척결과 주변 긴장을 해소하는 것보다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시민 참여의 정치 발전이다. 아세안 국가의 경제적 성공은 권위주의적 정권만이 제공할 수 있다는 지배 이데올로기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국가 탄력성’의 부재로 인해 민족-국가제도였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근대적 민족 국가의 국경선을 그었던 건 유럽 식민 국가였다. 외견상 동남아시아는 문화, 종교, 언어, 역사, 민족, 지리적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분열에 의한 분쟁과 불안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에 다른 지배의식은 안정된 환경을 유지하려는 주된 담보로 강력하고 권위적인 민족-국가를 담보로 여긴다. 제도화된 부패, 전체주의, 독재의 일방주의로 치달을 위험을 지닌다. 이를 위해 시민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의 발현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의견을 개진하면
아시아의 공통적인 역사는 위에서 언급한 유럽의 식민지배와 일본의 식민 침략, 냉전시대로 인한 이념 대립, 군부 독재에 의한 통치, 민주주의 정치 제도의 혼란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굴곡 있는 근현대 역사를 지니고 있다. OECD 국가 진입으로 아시아 국가의 경제 발전 모델이 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역사의 본보기로 중심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한국의 권위주의적 정부는 자신들의 체제 유지를 위해 신냉전 시대에 미국의 아시아 대변인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참전은 결정적이었다.경제 발전을 제외한다면 아시아의 롤 모델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모든 아시아의 국가들이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통합의 정치를 보여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 경제 극복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뿌리내린 커다란 공헌에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 침략의 공통적인 아픔을 지닌 아시아 국가들에게 단지 미국의 하수인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이 후의 외교 정책에서도 한국은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의 선봉에 있었고 아시아의 보편적인 민주주의 확립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중국이 제3세계에서 실리적 세계 외교 정책으로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한 지역을 잘 알기 위해서는 역사와 언어를 잘 알아야 한다. 우리는 동남아시아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런 의미로 역사에 대해 관심을 지녔으면 한다. 스스로의 역사마저도 외면하며 정체성을 회피하는 상황에서 남의 역사까지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P.S) 동남아의 현대사에 관한 책 정문태의 <현장은 역사다>를 추천한다.
주1권 독서하고 서평쓰기 챌린지 #48 성공보팅입니다. (최근 3게시글에 $0.75씩 3번 보팅했습니다.)
나머지 한번 보팅을 위해 이 댓글 아래에 대댓글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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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다음주에도 열심히 독서해서 서평 써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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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시글에 $3을 찍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스팀파워가 모자라서요 ^^
네개의 게시글에 나눠찍는 점 이해해주세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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