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그 해 겨울

in kr •  7 years ago  (edited)

그냥...
옛날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문득 생각난, 마치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드니 갈피에서 툭 떨어진 빛바랜 사진 또는 낙엽같은 그런 이야기...

음...
그러니까, 이십 몇 년 전...
제가 대학 편입을 준비하던 그 때 있었던 일입니다.

며칠 전, 같이 편입 준비를 하던 화실 동기들을 만나서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그 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다가, 너무도 어린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그 애 이야기가 나왔었죠.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 애에게 참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아이는 "오빠, 나 잊지마."라는 마지막 부탁을 내게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작아지고, 언제부턴가 그 아이를 기억하는 시간보다 잊고 지내는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이 못내 미안했습니다.
더 잊기 전에, 나중에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 미안함을 갖게 되기 전에...
그 아이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 해 겨울

대학 편입을 위해 화실에 등록을 했다.
당시 나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군 제대를 한 후 직장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컴퓨터그래픽을 접하게 되었다. 90년대의 국내에서는 생소한 분야였던지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아는 분이 공학 전공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편입을 해서 전공을 바꾸면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해주셨고 결국 편입을 하기로 결심을 굳힌 것이다.

화실에서의 생활은 참 난감했다.
편입학을 목적으로 하는 화실이다 보니 대부분 그림 실력은 어느 정도 되는 수준이었고 데생조차 생경한 나는 그들과의 실력차이에 좌절하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 화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금요일은 화실 동료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날이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화실을 24시간 개방을 하기 때문에 일찍 가서 좋은 자리를 선점할 필요가 있다.
일 때문에 늦게 화실에 도착한 나는 좋은 자리에 대한 기대는 버리고 있었다.

“오빠! 왔어? 일루 와. 내가 좋은 자리 잡아뒀거든.”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수정이가 환하게 웃으며 손짓을 한다.
수정이는 당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위해 재수를 하고 있었다. 편입을 목적으로 하는 화실과는 성격이 맞지 않았다.

수정이는 길을 걷다가 눈에 띈 화실에 상담을 받으러 왔었고, 사람 잘 사귀는 성격 덕분에 저녁에 화실 선생님들과 술자리를 가졌다고 했다.
수정이는 썩 유복하지 않은 가정 형편과 지방에서 공부를 하려고 올라와서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아서 화실에 등록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런 설명을 들은 선생님들의 마음이 움직였나보다.
수정이는 사무보조를 하면서 용돈도 받고, 그림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명랑한 성격, 붙임성 좋은 수정이는 어느새 화실의 막내 대접을 받으며 우리들의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오늘처럼 자리경쟁이 심할 때는 적당히 알아서 자리도 잡아주는 센스 있는 막내였다.

일 년 내내 입시준비를 위해 그림을 그리다보면, 게다가 연말이 가까워지면서 편입 공고가 나오는 시기가 되면 다들 신경이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하루에도 몇 장씩의 그림을 그려내야 하고, 짬짬이 이론 공부도 해야 했다. 게다가 영어 역시 넘어야 할 관문이었다.

편입학은 대학별로 실시하기 때문에 원하는 대학이라고 해서 무조건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원하는 대학에서 편입 공고를 내지 않으면 그만이니 말이다.
게다가 설령 모집을 한다고 해도 결원 충원 정도이기 때문에 학교 별로 많아야 두세 명 뽑는 것이 고작이다.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경쟁률을 기록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사립대학 두 군데 시험을 치렀다. 경쟁률은 각각 18:1, 23:1, 너무나도 당연하게 둘 다 불합격했다.
마지막으로 시험을 치른 학교는 편입 준비생들에게 가장 큰 목표가 되는 서울산업대학교였다. 이 학교는 1학년 신입생 모집인원과 같은 수의 편입학생을 뽑는다. 엄청난 수의 수험생들이 몰린다.
시험을 치르러 서둘러서 학교에 갔다.
12월 말, 새벽의 차가운 공기는 제법 매서웠다.

“오빠! 시험 잘 봐.”
수정이가 교문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 너 언제 왔어?”
수정이는 화실 선생님 몇 분과 함께 시험을 치를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커피 따뜻하다. 한 잔 하셔. 긴장하지 말고 시험 잘 봐.”

그 해, 수정이도 나도 시험 결과는 낙방이었다.
우리는 고민할 것도 없이 재수를 준비했다.

“선생님, 수정이 어디 갔어요? 며칠째 안 보이네요.”
대학입학 시험을 치르고, 며칠 휴가를 받아서 집에 갔단다.
언제부턴가 피곤하다는 말을 자주하고 몸이 붓기도 하는 게 걱정되어서 병원에 가서 검사라도 받으라고 했더니 별 일 있겠느냐며 집에 며칠 갔다 오겠다고 했단다.

신학기가 되었다.
난 여전히 직장 생활을 하면서 화실에 다니고 있었고, 수정이는 새로 등록한 편입준비생들에게도 붙임성 있는 막내노릇과 사무보조를 하며 그림을 그렸다.

수정이는 꽤 다양하고 독특한 감성을 갖고 있는 친구였다.
나에게는 시끄러운 소음처럼 들리는 헤비메탈이니 하드락에 푹 빠져 사는 매니아였고 수정이가 온 이후로 화실에서는 종종 귀를 찢는 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주말, 밤을 새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제품디자인을 선택한 나는 다양한 첨단기기의 디자인 공부를 해야 했다.
수북이 쌓아놓은 관련 책들을 들여다보며 스케치와 렌더링을 하는데 그날따라 영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서 끙끙대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아무래도 사소한 것에도 신경이 쓰이게 마련이다. 그날따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날카로운 괴성이 거슬렸다.

사무실로 가면서 보니 수정이는 비슷한 취향의 화실 친구들 몇 몇이 둘러서서 머리를 흔들어가며 음악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사무실 오디오의 전원을 껐다.
“오빠! 끄지 마. 제발... 지금이 하이라이트란 말야. 조금만 더 듣다가 내가 끌게.”

시간은 참 덧없이 흘러간다고 말을 한다.
첫 해 시험에서 떨어진 후, 눈물까지 흘려가며 재수를 결심한 이후로 도대체 시간이라는 놈은 어떻게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매일 두어 장의 그림을 그리고, 이론 공부를 했다. 영어는 워낙 젬병이라 자주 나온다는 필수단어만 외우고 있었다.
계절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느끼지 못하고 지나던 어느 날 문득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겨울... 이제 또 다시 시험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이번에는 일반대학에는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단 한 군데만을 목표로 한다는 건 그만큼 위험부담이 크지만, 일반대학을 같이 준비할 정도의 실력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 대학은 데생이나 구성, 정밀묘사 등을 실기시험으로 채택하고 있었고, 서울산업대학교는 전공실기를 따로 본다.
내 경우는 공업디자인을 전공할 계획이므로 제품 디자인 렌더링이라는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시험을 치르는 날, 왠지 마음이 편했다. 만일 이번에 또 떨어지면 더 이상 매달리지 않고 깨끗이 포기하기로 결정을 했는데도 그다지 긴장되지 않았다.
시험을 치르기 위해 학교에 도착하니 역시 화실 선생님 몇 분과 수정이가 새벽부터 나와서 우리를 맞이했다.
“오빠! 이번에는 둘 다 좋은 결과가 나올 거야. 그렇지?”
“너도 시험 준비해야 하는데 이렇게 나와 있으면 어떡해?”
“괜찮아. 시험 시작하면 바로 화실로 갈 거야.”
시험을 앞두고 피곤했는지 수정이의 얼굴이 까칠해보였다.
“수정아. 이번에 시험 끝나면 우리 모두 거하게 회식 한 번 하자.”
“아, 시험 볼 사람이 별 소리를 다 한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빨리 들어가.”

시험 과제는 “모바일 폰” 디자인이었다.
일 년 동안 시험 준비를 하면서 적어도 한 달에 두세 번은 그려본 주제다. 익숙한 주제이다 보니 자신이 생겼다.
필기시험에서 원하는 정도의 점수가 나오기 힘들 것 같아서 실기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익숙한 주제가 나오니 일단 마음이 편해졌고 큰 실수 없이 실기시험을 무사히 끝냈다.

편입시험이 끝나고 며칠 후, 수정이의 입시 실기시험이 있었다.
요 며칠 동안 수정이는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고생 중이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쓰러진 적도 있었다.
수정이에게 시험 끝나면 바로 병원 가서 검사를 받아보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시험 당일에도 수정이는 너무 몸이 안 좋아서 화실 선생님께서 차로 시험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수정이가 아픈 것이 마음에 걸려서 화실 선생님과 나는 수정이 시험이 끝날 때까지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차도 마시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시험이 끝나고 아무리 기다려도 수정이가 나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서 수위 아저씨한테 물었다.
“아저씨, 시험 보러 들어간 수험생이 아직 안 나왔는데요. 들어가 보면 안 될까요?”
“그래요? 벌써 다들 갔을 텐데...”
“그러니까요. 시험 끝나기 전부터 여기서 기다렸는데 아직도 안 나오네요. 시험 끝나면 여기서 만나기로 했었거든요. 몸이 안 좋아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래요? 이름이 뭐죠?”
“황수정이요.”
수위 아저씨는 책상 위에 놓인 노트를 뒤적거리다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황수정? 아까 시험 보다가 여학생 하나가 쓰러져서 구급차가 왔다 갔는데... 그 친구 이름이 황수정이라는데?”
“네? 수정이가 쓰러져요? 언제요? 어느 병원으로 갔어요?”
“동대문 이대부속병원으로 갔다고 하던데...”
우리는 서둘러서 병원에 갔다.
병실에 들어가서 보니 환자복을 입은 수정이가 침대에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수정아!”
“오빠, 나 어떡해. 시험도 다 못 끝냈는데...”
수정이는 굵은 눈물을 흘리면서 운다.

“병원에서는 뭐래? 왜 그렇대?”
“몰라. 아직 검사를 더 해야 한대.”
우리는 서둘러서 담당 의사를 만나러 갔다.

“글쎄요.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의사는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니까 기다리라고 했다.

수정이의 집에 연락을 했다.
몇 번을 전화를 걸어서 겨우 연락이 닿았다.
“수정이가 아파요? 왜 그런대? 공부하러 갔으면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왜 아프고 지랄이래?”
전화를 받은 사람은 수정이의 고모라고 했다.
수정이 엄마는 오래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빠는 수정이가 고등학생일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외동딸이었던 수정이는 고모네 집에 얹혀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쩐대요? 우리가 바빠서 서울 올라갈 시간이 없네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참 매정하다 싶게 전화를 뚝 끊어버린다.

병실에 들어서니 수정이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을 건넨다.
“고모가 받아요? 바빠서 못 오신다죠?”
수정이는 쓸쓸하게 웃고 있었다.
항상 밝고 명랑하던 수정이에게 이런 아픔이 있다는 게 마음 아팠다.

기다리던 검사결과가 나왔다.
담당의사의 이야기를 듣던 우리는 할 말을 잊었다.
위암이라고 한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수정이가 위암에 걸렸단다.
의사는 벌써 오래된 병인데 이제야 왔느냐고 묻는다.
진행이 너무 빨라 손을 쓸 수도 없다며 우리에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다.
고통이 심했을 텐데 전혀 몰랐느냐고 한다.

“수정아. 너 배 아프거나 그런 적 있었어?”
선생님이 수정이에게 물었다.
“네? 아... 오래됐는데...”
“뭐? 그럼 아픈데도 그냥 있었단 말이야? 병원에도 한 번 안 가보고?”
“병원에 못 갔죠. 돈 모아서 공부해야 하는데... 병원 가면 돈 많이 들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임마. 엄청나게 아팠을 텐데 그걸 그냥 참았단 말이야?”
선생님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수정이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왜요? 나 많이 아프대요? 아픈 건 그냥 진통제 먹고 참으면 되는데...”
선생님은 차마 위암이라는 말을 못하고 돌아가셨다.
“정한아. 난 아무래도 집에 들어가야겠다. 너 안 바쁘면 병원에 좀 있어라.”
“네, 제가 있을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세요.”

새벽까지 잠 못 들고 뒤척이던 수정이가 말을 건넨다.
“오빠, 자냐?”
“아니, 잠도 안 오네. 왜? 심심해? 이야기할까?”
이런저런 겉도는 이야기를 무심히 하던 수정이는 내게 묻는다.
“오빠도 들었지? 나 무슨 병이래?”
“응? 아... 그거... 뭐, 듣기는 들었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를 말만 하더라고...”
나는 차마 말을 할 수 없어서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렇게 새벽이 지나갔다. 부옇게 날이 밝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병원은 점점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오빠, 배고프지? 나가서 식사하고 와. 그리고 오빠도 이제 들어가야지.”
“응? 그래 식사하고 올게. 집에는 며칠 못 들어간다고 이야기해뒀으니까 괜찮아. 나 밥 먹고 화실 들렀다가 올게.”
화실에서 병원까지는 걸어서 가도 삼십분이면 도착할 거리다.
난 화실에 두고 온 가방을 가지러 갔다 오겠다고 했다.
눈에 띄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화실에 갔다.
아직 시험을 치러야 하는 친구들은 여전히 바쁘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정한아. 산업대 발표 났다.”
“네? 벌써요?”
말을 하면서 달력을 보니 오늘이 발표일이라고 큼직하게 표시되어있다.
“안 가봐?”
“그냥 있을게요. 어차피 좀 있으면 합격자 명단 올 텐데요, 뭐. 그냥 가방 가지러 왔어요.”

원장님은 싱글대며 웃고 계셨다.
“넌, 시험 결과가 궁금하지도 않냐?”
“궁금하긴 한데요. 뭐, 떨어졌든 붙었든 결과는 벌써 나왔겠죠, 뭐.”

원장님은 사무실에서 나오시더니 내게 종이 하나를 불쑥 건넨다.
“방금 팩스로 명단 넘어왔다. 봐라.”
“네? 벌써요?”
“그래. 이 놈 이거, 뭔 수험생이 발표 날짜도 모르고..., 어쨌든 네 이름 있더라. 축하한다.”

갑자기 주위에서 박수소리가 들렸다.
“와! 축하해.”
“부럽다. 우린 아직 시험날짜도 멀었는데...”
“한턱 쏴!”
사방에서 합격을 축하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2년이다.
군대까지 다녀와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편입을 결심하고 공부를 시작한지 2년...
이제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기쁘다는 생각보다는 멍한 느낌이었다.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저 합격했대요.”
전화기너머로 축하한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계속되면 시험을 준비하는 다른 학생들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인사를 건네고 화실을 나왔다.
“정한아. 병원에 가니?‘
“네. 지금 가려고요.”
“그래. 그럼 있다가 수업 끝내고 내가 갈 테니까 그때까지만 부탁하자.”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정이가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오빠! 합격했다며? 축하해.”
그새 화실에서 전화를 걸었나보다. 수정이는 제 일처럼 기뻐해주고 있었다.

저녁에 집에 갔다.
어머니는 합격 턱이라며 고기를 잔뜩 구워서 내오셨다.

화실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과 합격을 축하하는 술자리도 가졌다.
합격을 했다는 것이 마음을 느긋하게 해주었다.

삼일 정도 시간이 지나고 병원에 갔다.
수정이는 그 사이에 벌써 많이 핼쑥해져 있었다. 불과 삼일이 지났을 뿐인데...

“수정아. 이거, 전에 먹고 싶다고 했었지? 보김치 갖고 왔다.”
“어? 진짜 갖고 왔네. 고마워. 전에 먹어보고 정말 맛있어서...”
어머니는 겨울 김장을 담글 때마다 보김치를 조금씩 함께 담그신다. 개성식이라고 하는데, 나박김치에 배, 잣, 밤 등등을 넣어서 배추 잎으로 감싼다.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인데 밥 먹을 때 하나씩 꺼내어 먹곤 했던 것이다.
언젠가 화실에 몇 개를 가져가서 밤새면서 배고플 때 먹었다.
수정이는 그 때도 맛있다며 혀를 빼물었었다.

내가 집에 갔다 온다고 했더니 지나가는 말로 보김치를 먹고 싶다고 했었다.
“오빠, 집에 가? 그럼 보김치 있으면 나 하나만 가져다주면 안 될까? 되게 먹고 싶은데...”
사실 수정이는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만 먹어도 다 토하곤 했고, 더구나 자극적인 음식은 아예 입에 대지도 못했었다.

병원에서는 사실상 치료를 중단한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의사의 말로는 며칠이나 더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차라리 퇴원을 하는 게 어떠냐는 의사의 말에 화실 선생님이 상황을 설명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안 계시다는 이야기, 고모네 집에 얹혀사는데 병원비 이야기도 못 꺼내게 하더라는 이야기, 게다가 지방이라 너무 멀어서 가기 어렵다는 이야기...

의사선생님은 그러면 차라리 병원에 있게 하는 게 낫겠다고 하셨다.

수정이의 병실은 화실 동기들이 번갈아가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정이는 자신이 위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친하게 지내던 회실 여학생들 몇 명이 병문안을 왔었다고 한다.
당연히 수정이가 자신의 병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여학생 하나가 울면서 어떡하느냐고, 위암 말기면 많이 아플 텐데 어떻게 하느냐고 했단다.

그런데도 나를 보는 수정이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병원에서 깨어나던 순간부터 자신이 암에 걸렸을 거라는 사실을 막연하게나마 알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가 암으로 죽었다는 말을 몇 번 했었다.

축하한다는 친구들의 인사를 받으랴, 산업대에 가서 합격자 관련 공지를 듣고 관련 서류를 받으랴 정신없는 며칠이 지났다.

그 날은 평소에 같이 스터디를 하던 친구들과 함께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합격한 사람에게는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고, 불합격한 친구에게는 위로를 건네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 화실에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원장님이 급하게 나오시다가 나를 보더니 손을 잡아끈다.
“수정이가 이상하대. 빨리 가봐야겠다.”
우리는 정신없이 병원에 도착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병문안을 온 화실 동료들이 몇 명 보인다.
의사가 우리를 보더니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한다.
수정이의 침대에는 흰 시트만이 보였다.
“1994년 1월 20일 목요일 오후 네 시 십이분, 황수정씨 사망하셨습니다.”
의사는 건조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

뒤에서 울고 있던 영주가 말을 건넸다.
“선생님, 정한아. 수정이가 이거...”
영주는 손에 들고 있던 봉투 몇 개를 원장님께 건넸다.

봉투마다 겉에 이름이 적혀있었다.
“원장님께”
“정한 오빠”
“재성 오빠”
“영주 언니”
.
.
.

수정이는 우리 모두에게 마지막 인사를 담은 편지를 남겼다.

“정한 오빠. 그동안 내 옆에 있어주느라 고생 많았지?
정말 고마워.
난 외딸이고, 엄마 아빠도 안 계셔서 많이 외로웠거든.
화실에서 만난 오빠, 언니들이 잘 대해줘서 너무 고마웠어.
작년에 같이 떨어지고 나서 재수한다고 결심하고 공부할 때, 오빠를 보면서 많은 응원이 됐었어.
내가 시끄러운 음악 틀어도 화 안내고, 그림 잘 안 된다고 투덜거릴 때도 옆에서 좋은 말도 많이 해주고...

나, 사실 전부터 내 병이 뭔지 알고 있었다.
원래 암이 유전인 경우도 많대.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셔서 어쩌면 나도 암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

죽기 전에 대학생 한 번 되어 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네.
그래도 오빠가 합격한 걸 보게 되니까 좋아.
대학 가거든 공부 열심히 해.

참, 그거 알아?
오빠가 내 첫 키스 상대라는 거?
전에 술 마시고 화실에서 잔다고 누웠다가 잠 안 온다고 오빠한테 무서운 이야기해달라고 졸랐던 날 기억나?
그 때 오빠가 나 깜짝 놀라게 해서 내가 오빠 안고 넘어졌잖아.
그러면서 오빠 뺨에다 내가 키스를 했었잖아. (아~ 쑥스럽다.)

나이 스무 살에 그래도 키스는 한 번 해봤으니 조금은 덜 억울하네.

오빠는 아프지 마.
아픈 거 참 싫다.

잘 살아. 오빠.
가끔은 내 생각도 해줘.
안녕.

오빠, 나 잊지 마. 나 수정이야. 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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