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삶 사. 생노병사. 삶은 늙고 병드는 과정 일까?
삶에는 믿지 못할 전재조건이 있다.
지구의 탄생은 건반을 치는 또는 연필을 잡은 원숭이의 한음이나 한획이
끝없이 더해져 모찰트의 음악이 되고, 도스도예프스키의 문학이 되는 정도의조건이 필요하다고 농담 된다.
인간의 탄생은 어느 정도 전재조건이 필요할까?
동전을 던져 연속으로 앞면만 100번이 나올 확율 이상 이라고 한다.
1/2의 100승, 약 2의30승 정도이다. 로또를 연속으로 40번 정도 맞을수 있다.
확실한것은 지구보다 인간의 탄생은더 많은 시간, 더 희귀한 확률에 의거 한다.
지구의 탄생에 곱하여, 인간이 생겨 낫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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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도 믿지 못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 들이는 대부분은 기적적인 것들이다.
생의 희귀한 확률은, 산 모든것들은 존중을 천부적으로 획득하고 있다고 단정 된다.
그와 비견된 죽음은 노무현의 유언중 일부 "생과 함께 있는 자연의 한조각"일 것이다.
불가사의한 전재 만큼 뚜렷한 결말이 쌍을 이루고 있다. 그럼 생 과 사 한가운데 삶은 무엇인가?
"미워마라 원망마라 운명이다." 노무현의 결론이다. 삶은 운명을 받아 들여야만 하는가? 전재와 결론이
받아 들이지 못할것이 없다고 속삭여도, 우리는 기필코 죽어도 잊지 못할, 용서 못할 복수심을 잉태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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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불가의 논리에 따르면 적멸치 못한 삶이 윤회의 길을 따라 재차 태어난 생의 단초가 복수심일지 모른다.
아무튼 ,풀지 못한 인연이 생의 이슬 방울로 맺힌다는 도식은 대단히 수학적인것이다.
다시 한번 생을 사는 고단한 삶들에게 지워진 책무는 무엇일까?
진부하지만, 용서 사랑 감사...등으로의 환언, 동어 반복일지 모른다.
가만 생각해 본다. 희귀한 전재와 뚜렷한 결말 사이, 생의 한가운데서...
받아 들여서도 안되고,받아 들일수도 없는 운명은 없다고,
있다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인간이 만들어낸 조악한 발명품이란 사실을.
자살하려고 물에 뛰어든자가 힘을 빼니, 물에 뜨는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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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권력, 이명박의 경제력도 희귀한 전재와 뚜렷한 결말 사이에 있다.
a제곱 b제곱 사이 우리는 ab와 ba를 보고 있는 것이다.
권력도 낙엽이 되어 구르고,
욕심도 겨울을 맞이 한다.
a는 b로 가고, 참새들의 지저귐은 b에서 a를 알리는 새벽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