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反芻 (16)

in kr •  7 years ago 



반추反芻 (16) - 대북산에서의 약속

그날, 태식은 문희의 손에 작은 반지를 끼워 주었다. 반지위에 내려앉은 가로등 불빛에 반지는 유난히 반짝 거렸고 문희는 토끼처럼 뛰며 태식을 몇 번이나 안았다. 마치 신부가 된 것처럼 수선화 다발을 들고 태식 앞에서 다소곳이 서 있던 문희의 눈빛이 어두운 밤, 별보다 더 예쁘게 반짝이고 있었다.
태식은 문희에게 어머니와 상의해서 부모님의 상면 날짜를 잡아 줄 것을 부탁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말씀드리게 되면 여러 가지로 걱정하시는 모습을 보게 될 것 같아 태식은 문희에게 말씀 드리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문희도 태식의 부모님이 상면날짜를 잡으라고 한 것에 대하여 매우 벅차했다. 그러나 막상 결혼이 자신의 집 여건상 어렵게 진행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잠시 얼굴이 굳어지기도 했다.
“어머니! 문희 어머님이 5월 8일 쯤 어떻겠냐고 하시던데요? 그날 문희도 쉬고 저도 쉬고, 어버이 날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 의미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이놈아!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
태식의 어머니는 상면날짜를 아들에게 듣고 웃으며 태식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어머니 그날 너무 멋있게 하지 마세요. 그냥 문희 어머님이 편하게 만나셨으면 하시더라고요. 또 원래 우리 어머님이야 워낙 미인이셔서 꾸미지 않아도 멋있으니까…”
“이 녀석이 오냐오냐 했더니 아예 엄마를 가지고 노는 구나.”
태식의 어머니는 내심 아들이 문희를 생각하는 마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조금은 섭섭하게 생각되었지만 언제나 자신의 일을 충실하게 감당해오던 아들이었기에 결혼 문제도 그렇게 잘 풀어 가리라 생각했다.

이틀 전 봄비가 촉촉이 내리고 난 후 5월 5일 어린이날, 태식은 오랜만에 문희와 교외로 나갔다. 교외라고 해 보았자 K시에서 30여분 거리에 있는 대북산 기슭이었다. 그곳은 문희를 알고부터 가끔 단 둘이 가던 곳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산 동쪽 커다란 밤나무 밑에 앉아 바라보는 건너편의 호수가 장관이었다.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인적이 거의 없었고 시내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음습하지도 않았고 항상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양지바른 곳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오기 전 이모부와 함께 장사를 하는 큰 이모로부터 전화가 와 장사 때문에 어린이 날인데도 아이들과 함께 어디 갈 수 없다고 조카들을 데리고 놀러가 달라고 부탁했지만 태식은 미리 약속된 문희와의 약속을 깨트릴 수 없었다. 마침 휴일이라 늦잠 자고 있는 태근이 형을 두들겨 깨워 부탁을 하고 아침도 먹지 않고 도망쳐 나온 터였다.
“저 놈이 여자한테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네.”
등 뒤에서 태식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며 중얼 거렸지만 태식은 대꾸도 하지 않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바라보며 쌩긋 웃고는 바람처럼 빠져 나온 것이었다.
밤나무 밑에 앉아 머리를 기대오는 문희의 머릿결이 봄바람에 날려 태식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늘진 밤나무 아래 넓적한 돌을 두 사람은 오래전에 근처에서 날라다 놓았었다. 손을 꼭 잡은 두 사람은 평화로웠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함께 건너편에 햇빛에 반짝거리며 비늘을 치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마치 자신들을 위해 있는 기분이 들었다. 태식은 말없이 문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문희야!”
“왜요?”
“우리가 결혼해서 아이들도 낳고 또, 그 아이들 시집보내고 장가보내고 나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도 여기에 이렇게 함께 앉아 있으면 이 모든 세상에 하나도 부러울 게 없을까?”
“모르죠,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산과 저 호수의 물빛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거죠. 누가 인위적으로 파헤치지 않는 한…”
“우리 일 년에 한 번씩 여기에 오자! 그리고 저 호수의 물빛을 함께 보며 서로의 마음이 물빛처럼 여전하기를 기도하자.”
“야, 그거 참 좋은 생각이다. 그쵸? 그 약속 지킬 수 있어요?”
“그럼, 꼭 약속 지킬게…”
두 사람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바라보는 눈빛 하나로도 둘은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얼마나 남았을까?
너와 나의 시간은
나무가 자라 잎새 떨굴때면
그리움도 떨칠 수 있을까?

밤하늘 무수한 별들
가지에 걸려
새벽, 반짝이는 이슬로 남으면
햇살처럼 네 마음속에 부서질 수 있을까?

보고픔이 꿈속에서
네게로 뚜벅뚜벅 걸어가면
넌 눈부신 아침으로
날, 맞이할 수 있을까?

          - ‘꿈’ 전문 -

5월 8일, 아침부터 집안은 소란스러웠다. 어버이 날 선물과 함께 꽃을 달아 드리자마자 어머니는 근처 미용실에 가셔야 한다며 서둘러 집을 나가셨다.
“문희 어머니 앞에서 괜히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또, 네 엄마 입장 곤란한 말 하지 마라.”
신문을 보고 계시던 아버지가 태식에게 말씀하셨다. 태식의 아버지 또한 상면 자리에 함께 하고 싶어 하셨으나 문희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문희 어머니 혼자 나오셔야 했으므로 아버지는 어머니가 함께 나자자고 했지만 불편을 끼쳐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 당신의 뜻에 따를 테니 여자들끼리 편하게 만나 상의하고 오라고 하시며 나가지 않으시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셨다.
태식은 문희 어머니에게 드릴 선물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그것은 항상 집에서 녹차를 즐겨 드시는 문희 어머니였지만 제대로 된 찻잔도 없이 투박한 컵에 1회용 녹차를 우려 마시는 정도였다. 그래서 태식은 얼마 전 제주도로 출장 가는 정 상무에게 부탁하여 제주산 녹차와 찻잔세트를 사다 줄 것을 당부하였었다.
태식의 어머니는 연회색에 검정색 점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양장을 입었다.
“에이, 어머니 그거 너무 칙칙해 보이지 않나요?”
“이놈아! 내가 너한테 선 뵈러 가냐?
그 양장은 얼마 전 태식의 외삼촌이 어머니의 생신이라고 특별히 사준 것을 아직 한 번도 입지 않고 장롱 속에 보관해 놓은 새 옷이었다.
미리 태식이 예약해 놓은 K시내의 한정식 집에서 문희의 어머니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곳은 태식이 다니는 회사에서 가까운 곳이었고 가끔 외국에서 손님이 올 때면 식사대접을 하러 가는 곳이기도 했다. 잔잔한 가야금소리에 깔끔하게 정돈된 전통 한옥풍의 방에 들어서면 외국인들은 금세 분위기에 매료되곤 했다.
한정식 집으로 들어서자 문희와 문희의 어머니가 먼저 와 있었다.
문희의 어머니는 가슴에 문희가 꽂아 주었을 카네이션을 달고 보랏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와 앉아 계셨다.
방으로 막 들어서려는 순간 태식의 어머니는 갑자기 태식의 팔을 붙들고는 핸드백을 맡겼다.
“점잖은 자리에서 이야기하다가 일어서면 안되니 화장실 좀 미리 다녀와야 겠다.”
그리고는 사뿐히 화장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태식은 방안에 먼저 들어섰다.
“우와! 어머니 한 10년은 젊어 보이시네요. 너무 예쁘십니다.”
태식은 딱딱하게 굳어 있던 문희 어머니에게 말했다. 문희 어머니는 태식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문희는 남색 치마 정장을 예쁘게 차려 입고 나왔다.
“태식씨 왔어? 어머니는?”
“응, 금방 오실거야.”
문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못내 불안하다는 듯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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