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 해결 VS 승부
분쟁에 관한 것들을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다루는 것을 배우고 일로 다루다보니 형사소송법에서 강조하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일반인들은 형사소송의 피의자를 넘어 피고인이 되면 '무죄판결'을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미디어도 그렇게 다룹니다만, 사실상 가장 좋은 건 절차로부터의 조기해방이란 매우 법률스러운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절차가 개시되면 이제 어떤 주장을 하고 어떤 증거를 마련하고, 상대방의 주장은 어떻게 깨고 그 약점을 얼마나 공격할 것인지 관련해서 승부의 세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말이 쉽지, 조금만 일관성이 떨어져도 공격을 당하고 상대방의 일관성을 어떻게든 공격해야 하므로 그 스트레스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특히나 같은 사실이라도 이는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과 그러한 사실이 놓인 맥락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므로 최대한 이를 유리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라쇼몽이란 영화를 보면 사실이란 것이 얼마나 환상일 수 있는 지를 적나라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각 등장인물은 모두 하나의 살인사건을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 합니다.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故이은주님이 출연한 영화 '오!수정'이 있겠네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도 객관적 사실같은 것 없습니다.
각자의 기억에 따라 편리하게 재구성된 것이 각자의 사실로 남아있게 되지요.
가장 객관적이라고 믿는 CCTV도 안타깝게도 맥락 속의 사실이 되면 전혀 다르게 변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다루는 분쟁의 흔한 처리방법
각자의 억울함을 이야기 하며 상대방의 잘못을 드러내고 누가누가 더 잘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더 잘못한 사람이 누구인지들 들춰내는 방법은 치유가 불가능합니다.
여기에 개입하는 조력자들은 각종 전문자격증을 들이밀지만, 사실 분쟁의 해결이라기 보다는 승부에 집중합니다.
상처투성이로 회복이란 것은 감히 꿈도 꾸지못하고, 분쟁이 끝났어도 정신적인 위로를 평생 해야할 지도 모를 세상으로 집어 넣게 됩니다.
다들 끝에 가서는 이야기 하죠.
"난 용서할 맘이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그럴 수 없어요."
학교폭력을 다루는 방식
학교폭력과 관련한 상담을 이따금 합니다.
학교폭력은 '폭력'이 기본적으로 들어가기에 학교에서 실시하는 '처분'에 이어 '형사'와 '민사'가 모두 들어가는 매우 복잡한 처리 방식입니다.
'반성문'을 쓰는 수준에서 '공개사과', '반 변경', '전학', '퇴학' 등 학사행정의 처분과 별개로 '형사'적으로 '처벌'과 '민사'적으로 '보상' 또는 '배상'의 과정이 들어가며, 학교에 대해서는 관리자로서의 책임까지 적잖은 분쟁이 따릅니다.
게다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학생'인 경우에는 인생의 큰 분기점이 될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어설픈 전문가들이 들어가서 엉망으로 망쳐놓습니다.
'승부'의 세계로 밀어 넣죠. 회복할 수 없는 평생의 상처를 깊게 만드는 전쟁터로 말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이긴 사람도 승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을 악으로 만드는 작업을 계속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당 사건에서 벗어나는 길은 점점 요원해지요.
학교폭력을 다뤄야 할 방식
회복이 어려운 단계가 아니라면 회복을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분쟁은 승리가 아니라 해결을 먼저 고민해야 합니다.
형사소송으로 치면 무죄가 아니라 불기소가 가장 바람직한 결과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절차로부터의 조기해방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덮고 넘어가자는 말로 오해하시고 싶은 분은 정신건강을 위해 이 글을 끝까지 읽지 않으셔도 좋습니다만 읽은 것이 속는 셈 치고 한 번 읽어 보시는 것도... 저를 위해 도움이 됩니다. ^^
누구말마따나 좀 도와 주십쇼!!! ㅋㅋㅋ
가해자를 위한 조언
사실이란 건 언제나 각자에게는 각자 나르대로 구성한 사실이 있기 마련입니다.
당연히 나도 억울합니다
나만 잘못했다고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나만 잘못했다고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부족했던 부분을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있을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나로서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과 꼭 그렇게 했어야 했다는 것은 다른 겁니다.
이유를 찾고 변명을 늘어 놓는 것보다는 해결을 위해 내가 부족했던 부분을 찾고 거기에서 시작해서 해결의 실마리로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해결에 집중하는 방법으로 제안하는 것입니다만 흘려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가해자보다 가해자의 보호자나 가해자를 돕겠다는 전문가라는 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입니다.
가해자보다 더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보호자들이나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이 일을 그르치는 경우의 대부분이 상대방의 약점을 노리겠다거나 내 행동의 그럴듯한 변명을 들이미는 것입니다.
저는 굉장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매우 어리석은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다룬 사건은 아니지만, 부모가 자식의 입장에서 가해를 부정하고 상대방에 대한 비난을 사과라는 이름을 빌어서 다룬 사건이 있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다가 입에 담기도 부적절한 욕을 잔뜩 올렸는데, 공개적으로 피해자가 엄청난 수모를 겪었을 수도 있는데, 니가 평소 행실이 나빴던 점도 있지 않았냐는 변명만 잔뜩하면서 사과라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연히 결과는 좋지 않았죠. 그 자식에게도 못할 짓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결과를 생각해서 가식적이라도 상대방에 대해 내가 저지른 실수를 잘 돌이켜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거울을 보고 웃으면 정말 즐거운 기분이 든다고 합니다.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다보면 즐거워진다는 말처럼 가식적으로라도 우선 내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집중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분쟁의 해결에 집중하지 않고 승부로 들어가고 싶은 이상하게 잘못된 믿음이 있습니다.
극히 예외적인 사정이 아닌 한 이런 경우는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감정적으로 소모를 할 대로 하고서도 원하는 결과와는 멀어지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당장은 이겨도 상대방이 이젠 엄청나게 준비해서 재공격이 들어오겠죠.
그런 짓을 하시고 싶으신가요?
피해자의 태도
억울함에서 해방되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억울함에 매몰되면 그 불안하고 억울함이 영혼을 잠식하게 됩니다.
피해자에서 벗어나서 당당하게 당사자로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대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에 괴로워하는 경우도 반드시 겪을 겁니다.
심리상담이든 무엇이든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셔야 합니다.
약간 준비가 되고 상대방도 준비가 되었다면 그 때 해결을 위해 고민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응징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해도 나무랄 수 없습니다만, 응징이 반드시 내가 원하는 '회복'과 일치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염두하시면 좋겠습니다.
'동해보복(同害報復)'은 원래 더 심한 복수를 못하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합니다. 보복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방안 가운데 하나입니다. 더한 보복으로 대를 이은 복수의 악순환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던 것입니다.
'동해보복'을 하면 잊고 넘어갈 수 있을까요? 내 행위의 정당성을 평생 안고 가는 참담한 결과에 이르지는 않을까요?
이런 것들을 생각할 여유를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그런 여유를 갖기 위해서는 그런 여유를 갖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고, 전문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츰 스스로 회복의 준비를 가진 후에 갖기를 원합니다.
대부분의 피해자 보호자나 피해자측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권리와 의무에 대한 규정을 찾습니다.
그런 것들은 나중에 해도 됩니다.
혹시 모르니 중요할 수 있는 증거를 따로 모아둘 필요는 있지만, 그걸 써먹기 위해 모으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주변에 자주 하는 말인데, 화살은 화살통에 잔뜩 담겨 있는 자체로 그리고 시위에 올라 있어야 무서운 겁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무섭지 않습니다.
맞아서 죽으면 죽었으니 무섭지 않고, 살았으면 반격할 기회를 얻었으니 무섭지 않습니다.
자꾸 뭘 써먹으려고 안달나 하는 분들이 많은데, 절대 그렇게 하시지 않길 권합니다.
용서하고 잊고 내 삶을 사는 것. 당해 사건에서 벗어난 내가 원래 하고 싶던 일상을 맘껏 누리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회복은 가해자와의 관계 회복이 아니라 내 삶과 내 일상에 다시 집중해서 살아가는 걸 말합니다.
좋지 않은 '사건'에서 벗어나서 "Let it go"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 말이죠.
분쟁의 해결
거창한 주제를 갖고 들어왔는데, 의외로 심심한 결론에 이릅니다.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다음 네 줄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 분쟁은 '회복과 해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는 가장 좋다. 즉 분쟁은 분쟁자체에서 빨리 벗어나는 길을 찾는 것이 가장 좋다.
- 승부의 세계로 들어서면 그 과정에서 돈과 시간과 감정을 지나치게 소모할 생각을 해야 한다.
- 그렇게 이겨도 정말 내가 원한 것과 일치한 결승점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다.
- 그럼에도 이기겠다면 각오를 단단히 하시라.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