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리뷰 1
<러브, 데스 + 로봇>, 이토록 천재적이고 혁신적인 핏빛 도발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취향을 골라 담은 영상이 있다면 이보다 더 할 수 있을까. 내러티브는 사라지고 핵심만 부풀린 로그 라인이 휘몰아치는 짧은 단편들 속에서 괴물, 로봇, 우주선, 섹시한 여자가 틈만 나면 등장해 싸우고 파괴하며 성적 묘사를 해댄다.
그래서 이 단편 시리즈는 자극적이고 직관적인 것에 열광하는 남자들만을 위해 그 모든 취향을 반영해놓은 듯하지만 사실은 그 단순함 이면에 생각보다 더 큰 주제를 치밀하게 ‘세뇌’시켜놓고 있다.
시리즈의 시작, ‘무적의 소니’ 한 편으로 보는 <러브, 데스 +로봇>의 모든 것.
먼저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시리즈의 첫 번째 단편으로 등장하는 ‘무적의 소니’다. 이 작품은 ‘대리 괴수 전투’ 경기장에서 승승장구하는 주인공이 부정한 승부조작 청탁을 받으며 겪는 에피소드를 그리는데, 첫 단편이 이후 작품들의 감상을 좌우하는 만큼 '무적의 소니' 속에는 <러브, 데스 + 로봇> 시리즈가 지향하는 모든 핵심 메시지가 함축적으로 녹아있기도 하다.
작품은 의식을 인공 생명체에 ‘링크’할 수 있을 정도의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묘사하지만 그런 고도의 문명인들이 즐긴다는 것이 기껏해야 괴수들의 유혈이 낭자하는 원시적이고 폭력적인 결투다. 우수한 지혜를 얻었어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결국 원초적 물질들의 혈투를 즐기게 될 뿐이라는 이 메시지는 이후 이어지는 단편 속에서도 시종일관 유지된다.
어쨌든 이런 파괴적인 혈투 속에서도 자신의 능력으로 연승 행진을 이어가는 주인공 '소니'는 여성으로, 여성이 본인의 힘으로 세계를 개척해나갈 수 있다는 페미니스트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것도 같지만 결말을 보면 이 작품은 그런 ‘평범한 페미니즘’조차도 분쇄해 버리고 만다.
소니는 그 스스로의 능력을 믿고, 자신이 성취한 결과에 대한 명예와 자부심을 가진 존재이지만 그가 대적하는 세계는 ‘돈’, 즉, ‘물질’로 그런 ‘정신적 가치’도 살 수 있다고 믿는 부류로 등장한다. 물론 소니는 이를 거절하고 부정을 으깨가면서까지 연승행진을 이어나가지만 끝내 적의 암수에 걸려 뇌가 짓이기는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여성으로서의 소니는 그렇게 처참하게 짓이겨지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숨통은 끊어지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이미 우리는 ‘뇌가 터졌으면 죽어야지’라는 영상 관습 하나가 해체되는 낯선 경험도 하게 된다.)
여기서 소니의 진짜 정체는 사실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 괴수 그 자체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작품은 ‘괴수 소니’가 자신을 암살 시도했던 무리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섬뜩하리만치 잔혹하고 비이성적인 이 결말은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내포한다. 그 하나는 위대한 정신은 물질에 예속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된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크고 굳센 괴수도 그 ‘뼛속까지’ 비열함을 숨기고 있을 수 있으며, 아름다운 용모 속에도 물질의 노예에게 굴종해 어떤 일도 마다않는 더러운 본성이 숨어있을 수 있다는 것, 강인한 여성 페미니스트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 모습이 위대한 정신의 폭발적인 힘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페미니즘 이상의 테제를 던지는 것이다.
이 단편 시리즈에는 ‘실제 인물’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실사 영화에 가까워 보이는 단편들도 정교한 CG기술로 처리된 가상 인물들이 연기를 펼친다. 아직까지는 우리가 눈치 챌 수 있는 수준이지만, 앞으로 기술이 더 발달해서 이 가상 인물들이 실제 사람을 카메라 앞에 놓고 찍은 영화와 구별할 수 없는 지경이라면 과연 우리 앞에 놓인 상(像)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우리가 접하는 슈퍼스타가 대부분 영상이거나 사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같은 사실은 매우 소름끼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중요한 건 가상이든 실제든 그 속에 들어있는 ‘정신의 가치’라는 것이 된다.
<러브, 데스 +로봇>은 기계문명의 극치로 ‘물질의 형태가 의미가 없어지는’ 세계 속에서 ‘불변의 정신’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가를 집중 조명한다. 이 시리즈는 그 마지막을 ‘숨겨진 전쟁’이라는 다소 고전적인 이야기로 마무리 짓는데, 그것은 야만의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인간의 정신이 끝내 기계의 힘을 빌어 야만과 폭력을 불사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연 우리 실제의 세계는 반복되는 문명의 성쇠 속에서 어떤 ‘정신의 길’을 걷게 될 것인가. 심오하고 시대를 뛰어넘는 발상을 가장 단순한 형태의 본능으로 치환하여 그 누구라도 저도 모르게 ‘세뇌’될지도 모르는 이 천재적이고 혁신적인 작품에 박수를 보낸다.
<러브 데스 + 로봇>에서 특히 추천하는 단편들
‘무적의 소니’ : 시리즈의 모든 메시지를 담은, 그 시작으로 손색없는 작품
‘목격자’ : 지성의 결과물인 ‘대화’의 부재가 낳는 무한의 비극.
‘독수리자리 너머’ : <이벤트 호라이즌>을 떠올리게 하는 파괴적이고 도발적인 인체와 정신의 유리(流離)
‘굿 헌팅’ : 구미호 설화와 중국의 식민지 시기를 기막힌 상상력으로 풀어나가는 작품
‘지마 블루’ : 궁극의 인공지능에 관한 천재적인 묘사와 결말을 보여주는 작품
'숨겨진 전쟁' : 휘몰아치는 미래지향적 서사에서 탈피해 고전으로 회귀한, 작품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결말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