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 *사진 : 다음 영화 <괴물>(2006)
3. 무의미의 의미를 향한 변주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종합해보면 그의 족적은 인간 심연에 내재된 이기심을 끄집어내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또 다른 일관된 특징이 발견된다. 바로 ‘잉여인간’을 자주 다룬다는 점이다.
교수임용에 실패하고 처에게 의존하는 무력한 박사(플란다스의 개), 사건을 우격다짐으로 해결하는 무능한 형사(살인의 추억), 한강에서 매점 심부름을 하며 어렵게 딸을 키우는 남자(괴물), 지적장애인(마더), 수모를 겪는 혁명가(설국열차), 세상 물정 모르는 산골소녀와 슈퍼돼지(옥자), 반지하방에서 피자포장지를 접으며 힘겹게 삶을 연명하는 가족(기생충)까지 그의 작품은 모두 잉여인간들의 이야기로 꾸려진다.
그런데 봉준호 감독은 주인공만 잉여인간으로 내세우는 게 아니다. 내러티브뿐만 아니라 미장센을 구성할 때도 반드시 잉여 이미지를 활용한다. 바르트가 ‘무딘 의미’라고 명명한 그것은 작동하는 그 순간에는 ‘기의 없는 기표’로서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영화의 모든 순간에 산재하고 그 진행에 따라 적층되면서 영화적 환유성을 증강한다. 예컨대 한 신에서 인서트로 등장한 사물 이미지가 그 다음 신에서 사건의 발화점이 되는 계기가 된다던지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의미의 의미를 향한 변주’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작업은 봉준호 감독이 가장 선호하는 기술이자 그만이 가진 뛰어난 특장점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렇게 봉준호 감독은 ‘잉여’에 주목하면서 ‘무의미의 의미를 향한 변주’를 통해 심연에 숨겨놓은 ‘희생양’―대개 여자 혹은 어린 여자, 어린 아이, 장애인, 실험용 돼지와 파출부에 이르는 특정한 약자―를 심연 속에서 잉여인간과 접붙이면서 이기심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폭로하는 동시에 또 다른 의미를 열어두려 한다.
봉준호의 잉여인간들은 작은 만족을 위해 타인의 아픔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예컨대 <살인의 추억>에서 희생자의 시신은 죽음이라는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인간 최대의 절망 상태에 놓였지만 그것에 대해 어떤 죄의식이나 책임감을 느끼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범행을 저지른 범인도, 심지어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들도 일신의 만족을 위해 사건을 이용할 뿐, 그로써 죽은 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심연이 개방된 후부터는 이 잉여인간들에게 작지만 큰 변화가 목격된다. 바로 ‘양심’의 발견이다.
영화 <살인의추억> *사진 : 네이버 영화 <괴물>(2003)
<플란다스의 개>에서 윤주는 죄를 덮는데 성공했음에도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살인의 추억>에서도 사건 수습에만 급급하던 두만은 유력한 용의자를 앞에 두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 <괴물>에서는 가족이 아닌 세상일에는 관심도 없던 강두가 괴물을 상대한 뒤로 뉴스를 챙겨본다. <마더>에서 마더는 자신이 낳은 괴물의 본 모습을 보고 더는 수습할 수 없음을 인정한 뒤 끔찍이도 아끼던 아들을 버린다. <설국열차>에서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딸만 돌보던 남궁민수는 아예 거대한 심연의 옆구리를 부숴버린다. <옥자>에서도 미자는 옥자만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이내 도살장에 도달해 진실을 본 뒤에는 ‘슈퍼돼지 부부’의 새끼를 말없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기생충>에 이르러서는 이기심에 찌들어있는 가족들 중 유일하게 ‘마음의 짐’을 받은 기우만이 어긋난 상황에 대한 이질감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그 짐을 내려놓는다.
심연 속으로 끌고 들어간 잉여인간들의 양심을 자극하는 봉준호 감독 작품 속에는 ‘반복’도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이 됐건 반복은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태어나고 소멸하는 것조차 반복이다. 한 개인의 심리에서 국가적 단위의 이기심까지 그 모든 것들은 반복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교수임용비리가 반복되듯이, <살인의 추억>에서 살인이 반복되듯이, <설국열차>에서 심연의 세계가 세계를 매년 반복해서 일주하듯이.
이기심과 추악함이 찌든 세계는 자꾸만 반복되는데, 그럼에도 어쩐지 세계는 멸망하지 않는다. 왜일까. 그것은 추악함만큼이나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양심이 반복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봉준호 감독은 판도라의 상자 속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희망’처럼, 인간의 저열한 최심부를 헤쳐 나가다보면 그 끝에는 분명 ‘양심’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영화 <기생충> *사진 : 다음 영화 <기생충>(2019)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의 결말에서 유일하게 마음의 짐을 가지고 죄책감을 느꼈던 기우를 빌려 이기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인간을 구조하는 방법을 이렇게 제시한다. 인간을 이기로 물들이며 그 본질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세상쯤은 비웃어버리고, 마음의 짐은 시간의 흐름에 씻긴 뒤에 ‘성실한 삶을 계획’할 것을 주문한다. 기우의 말마따나 그 성실하다는 것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인생 그 모든 것으로 치환해도 무방하다. 이기심은 존재를 부정하는데서 나오고, 반복된 존재의 부정은 자기 자신을 지운다. 그러므로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목표, 그 목표를 향한 성실함이 우리를 정의하게 된다면 종래엔 하루를 때우기 위해 대책 없이 타인의 뒤통수를 치며 양심을 저버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봉준호 감독이 ‘무의미한 것들’로 ‘유의미한 의미’를 주조해냈듯이 비록 잉여의 세계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언제든 유의미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평소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좋아해 정말 집중하며 읽었습니다. 무의미의 의미를 향한 변주라는 말이 와닿네요. 게다가 글 끝의 잉여의 세계와 연결지어 말씀하신 문장에서는 삶을 포기하지 않을, 아무리 절망스러워도 끝끝내 발걸음을 옮겨야 할 힘을 얹어주시는 느낌입니다.
평소 자주 찾아 뵙지 못한 제 자신에게 아쉬움을 넘어 속상할 정도로 좋은 글이었습니다. @pistol4747님의 글을 모두 정주행 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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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제서야 답을 남기는 군요! 글은 계속 쓰고 있지만 요즘 스팀잇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답니다. 다만 오늘부터는 눈팅이라도 조금씩 해볼까 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매력이라면 역시 별 것 아닌 것들에 잘 집중하고 의미 또한 잘 끄집어 낸다는데 있는 것 같아요.
독자를 속상하게 할 정도라는 것은 언제 들어도 벅차군요 분에 넘치는 칭찬 감사드립니다 저도 이따금 찾아뵙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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