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한 천재 장덕

in kr •  6 years ago 

1990년 2월 4일 불운한 천재 장덕 영면

고 3때 저는 기숙사에 잠깐 있었습니다. 시내버스 안내양 제도가 사라지면서 학교 앞에 있던 버스 회사 안내양 기숙사가 비게 되자 학교 육성회장님이셨던 버스 회사 사장님이 학교에 기숙사 운용을 제안했던 거죠. 저도 집이 멀고 해서 들어가 있었는데 하루는 오락회가 열렸습니다. 콜라와 환타에 새우깡 놓고 빙 둘러앉았지만 술 한 잔 없이도 시커먼 머스마들은 별의 별 추태(?)를 다 보이며 놀았습니다. 그 중에 주말 외출 때마다 덕명여상 다닌다는 여학생과 데이트를 즐기고 온다는 녀석 하나가 노래를 자청하더니 엉성하다 못해 추악해 보이는 안무와 함께 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 너 좋아해”

장덕의 노래였죠. 녀석은 후렴구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만 계속 반복하다가 온갖 야유와 지탄을 받았고 누군가는 새우깡을 집어던지며 항의했지만 녀석은 꿋꿋이 제 부르고 싶은 데까지 부르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표정이 밝지를 못했습니다. 알고보니 녀석이 딱지를 맞았더라고요. 녀석은 일종의 탄식을 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너 좋아하는데 너는 왜 나 안좋아해.”

이 노래를 지은 장덕이라는 가수를 아련하게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녀는 ‘불행한 천재’타입의 뮤지션이었지요. 작곡가 안익태가 인정했다는 서울 시향 첼리스트였던 아버지와 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그 예술적 감각은 타고났다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만 성장 과정은 지극히 불운했습니다. ‘뿐철학’ 이라는 좀 기이한 동양철학에 심취했던 아버지와 그에 질려 버린 어머니는 일찌감치 떨어져 살았고 장덕은 거의 늘 혼자였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두 달간 입원하는데 어머니가 간호를 해서 어머니와 함께 있었기에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추억하곤 했다니 넉넉히 이해가 갈 일이죠. 그러다가 음악 활동을 했던 오빠 장현에게서 배운 기타와 오선지를 가지고 뚱땅거리면서 음악에 입문했고 그 폭을 홀로 넓히면서 타고난 천재성을 발휘합니다.

“누가 누가 잘하나”같은 추억의 프로그램에서 입상했던 것은 그 재능의 깃털도 못되었습니다. 이 외로운 소녀는 가정 환경을 비관하며 몇 번씩이나 자살을 기도하고 이에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오빠와 함께 일찌감치 미 8군 무대 (이 무대가 한국인 뮤지션의 등용문이자 메인 스테이지였던 것 역시 슬픈 역사입니다만)에 서서 그 재능을 펴도록 돕습니다. 그러던 중 장덕은 1977년 MBC 국제 가요제에서 그녀가 작곡하고 진미령이 부른 <소녀와 가로등>으로 입상하는 대형 사고를 치게 됩니다. 그의 나이 열 다섯 살 때였습니다. 당시 무대는 작곡자가 함께 무대에 올라 악단을 지휘하는 것으로 꾸며졌다는데 빵모자 (이후로도 그녀의 아이콘이었던) 를 쓴 장덕은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앳된 외모로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냈죠. 하지만 그 가사를 보면 이 천재소녀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조용한 밤이었어요 너무나 조용했어요 / 창가에 소녀혼자서 외로이 서있었지요
밤하늘 바라보았죠 별하나 없는 하늘을 / 그리곤 울어버렸죠 아무도 모르게요
창밖에 가로등불은 내 맘을 알고있을까 / 괜시리 슬퍼지는 이밤에 창백한 가로등만이
소녀를 달래주네요/ 조용한 이밤에 / 슬픔에 지친 소녀를 살며시 달래주네요.

오빠 장현과 더불어 ‘현이와 덕이’로 활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영화에도 출연하여 하이틴 스타로 급부상했지만 어릴 적부터 그녀를 자욱하게 둘러쌌던 외로움은 자살 시도로까지 이어졌고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거기서 짧은 결혼과 파경을 맞는 등 도무지 ‘단란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녀는 다시 국내로 돌아오게 되지요. 그녀에게 80년대 초반은 매우 엄혹하고 차가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녀가 계속된 실패로 좌절한다는 소식에 오빠 장현이 나섰고 그들은 7년만에 ‘현이와 덕이’로 재결합하여 히트곡을 내게 되는데 그게 “나 너 좋아해”였습니다. 하지만 워낙 음악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컸던 남매는 다시 헤어지게 되고 장덕은 솔로로 나서 인생 최대의 전성기를 맞지요. 그녀는 가요톱텐에서 <님 떠난 후>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립니다. 정수라 이선희와 더불어 ‘바지 삼총사’ (치마 안 입는)로 불리며 그 줏가가 하늘로 솟았지요. 아마 외로운 천재에게는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동생의 매니저 일을 맡아 보던 오빠 장현이 설암에 걸리고 89년 발표한 노래들이 계속 실패하면서 장덕은 또 한 번 좌절하게 되고 그녀는 불면의 밤을 달래주던 수면제를 너무 많이 복용한 끝에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1990년 2월 4일이었지요.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왜 남들처럼 행복할 수 없는가”를 비관하며 자살을 기도했던 한 외로운 인생은 그렇게 떠났고 장례식 때 굳어가는 혀를 애써 움직이며 고통스럽게 동생을 위한 추모가를 불렀던 오빠 장현도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숨을 거둡니다.

첼리스트였던 아버지도, 화가였던 어머니도, 오빠 장현도 동생 장덕도 하나같이 영특하고 우수한 사람들이었는데 신은 그 재능을 주신 것만큼 섞이지 않는 외로움을 주셨던 것 같습니다. 장덕이 죽은 후 심령술을 동원하여 장덕을 살리려고 했다는 전설이 있는 아버지 장규상도 보기 드문 기인이었습니다. “일거수 일투족을 깨어있는 상태에서 느끼면서 하라. 차를 마실 때에도 평소보다 두 배정도 느린 속도로 움직이면서, 잔을 들 때, 마실 때, 내려놓을 때, 심지어 찻잔에 비어있는 공간까지 속속들이 느껴 보라.”고 설파했다는 그는 흡사 도인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아이들을 잃은 후 첼로 하나를 들고 전국을 돌며 나환자촌이나 교도소, 고아원 등을 방문하여 음악을 들려주다가 1999년 아이들의 뒤를 따릅니다.

문득 청소년 시절로 돌아가 치기어린 데이트에 실패한 고딩이 불렀던 “나 너 좋아해”를 흥얼거리게 됩니다. 그래도 장덕이 그 인생 가운데 얼마 안되는 행복한 순간, 오빠와 함께 불렀던 노래. 고인의 명복을 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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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 오랜만이네요 이런 아픈 사연이 있었군요 ㅜㅜ 잘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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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참 슬픈 천재 이야기


글을 읽고 이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참 좋았죠.

네 저도 간만에 듣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