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챔피언을 위하여 - 소매치기 복서 김성준

in kr •  7 years ago 

잊혀진 챔피언을 위하여 - 소매치기 복서 김성준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 (시사인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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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프로권투가 거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다만 7,80년대 프로권투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했어. 세계 타이틀매치라도 벌어지면 오픈 게임부터 메인 이벤트까지 지상파 방송사에서 주말 저녁 황금 시간 내내 중계방송을 해 주었다면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겠니? 1978년 9월 30일 서울의 문화체육관에서도 권투팬들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WBC(세계 권투 평의회)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전이 벌어졌거든. 챔피언은 ‘작은 탱크’라는 별명의 태국의 강펀치 보라싱. 도전자는 한국의 김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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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라운드. 김성준은 탱크같이 밀고 들어오는 보라싱의 기세에 눌려 코너에 몰린 채 수비에 급급했다. 성미 급한 관중 몇몇이 입장료 버렸다며 자리를 차고 일어나는 찰나, 김성준이 절묘하게 몸을 틀어 구석을 빠져나가더니 보라싱을 코너에 가뒀어. 관중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일어서는데 뭔가 번쩍하더니 보라싱은 그대로 링 바닥에 나뒹굴었다. 김성준의 회심의 라이트 어퍼컷이 보라싱의 명치에 꽂혀 버렸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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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만 국민들이 그의 KO승에 열광했고, 챔피언 벨트가 그의 허리에 둘러졌어. 적어도 그는 그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과거는 그날의 화려함과 잔인할 만큼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칠흑의 연속이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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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유복했으나 아버지가 사업을 말아먹으면서 김성준의 집은 가난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김성준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뛰쳐나왔어. 집 나온 10대가 갈 곳이 어디 있겠니. 구두닦이니 신문팔이니 잡다한 일을 하며 바닥을 쓸던 청소년 김성준은 예상치 못한 분야(?)에서 천부적 소질을 발견하게 돼. 그건 소매치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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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소매치기라는 범죄 자체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만 과거 소매치기는 경찰서마다 전담반이 있었을 만큼 흔하고도 골치 아픈 범죄였어. 신용카드 같은 게 없어 누구나 지갑에 현금을 두둑이 넣어가지고 다녔던 시절, 소매치기들은 귀신도 놀랄 재주를 발휘하며 사람들의 주머니를 칼로 찢고 지갑을 털었어. 김성준은 그 세계의 ‘황금의 손’이었다. 걸출한 소매치기 실력으로 한 번 거리에 나서면 수십만 원은 예사로 훑어 왔다고 하니까. (당시 수십만 원은 요즘 가치로 하면 수백만 원이 훨씬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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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저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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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소매치기단 두목이 김성준에게 이런 말을 해. “너 몸도 날래고 주먹도 좀 쓰는 거 같은데 복싱 배워 보면 어때?” 복싱을 시작한 지 1주일만에 김성준은 경력 2년의 복서를 KO시켜 버리는 놀라운 소질을 보인다. 안 그래도 남의 피를 빨아먹는 소매치기에 환멸을 느끼던 김성준은 본격적으로 복싱에 뛰어들었어. 언젠가 김성준은 시장통에서 거금을 소매치기했는데 그 돈이 시장통 콩나물 장수 아주머니의 것인 걸 알고는 돌려 줘 버렸다고 하는구나. 이 일화를 봐도 그는 소매치기로 늙어 갈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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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치기 동료들도 의리가 있었던지 김성준을 다시 ‘사업’에 끌어들이지 않았고 생활비도 주면서 김성준을 응원했다고 해. 마침내 복싱 시작 4년만인 1976년 김성준은 한국 챔피언 자리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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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때부터 불안감은 시작됐어. 이제 동양 챔피언도 되고 세계 챔피언의 꿈도 꿀 판인데 자신의 과거가 너무 어두운 거야. 전전긍긍하던 김성준은 마침내 한 검사를 찾아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다. 검사는 뜻밖에 찾아온 한국 챔피언을 관대하게 풀어주었고 김성준은 동양 타이틀전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는데 운명의 장난같은 일이 벌어져. 옛 소매치기 동료가 며칠만 머물게 해 달라고 김성준을 찾아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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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일(?) 걱정 말고 권투나 하라던 동료에 대한 의리였을까. 김성준은 그를 내치지 못하고 숨겨 주었는데 그만 경찰이 김성준의 집을 덮치고 말았어. 그와 함께 김성준의 과거가 온 세상에 드러나고 말았지. “빽따기(소매치기 기술) 치기배의 가장 유능한 일꾼으로 5년 동안 1억여원 상당을 소매치기한” (동아일보 1976년 2월 9일자) 혐의를 쓴 김성준은 자신이 찾아갔던 김진세 검사에 의해 구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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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진세 검사 역시 자신을 찾아왔던 소매치기 출신의 한국 챔피언이 눈에 밟혔던 모양이야. 창살 안에 갇혀서도 쉐도우 복싱을 멈추지 않았다는 김성준에게 찾아온 김진세 검사가 묻는다. “저 진짜로 손 씻을 수 있겠냐” 김성준의 답은 간단했어. “권투만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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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세 검사는 김성준을 돕기로 결심한다. 김성준은 곧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석방되는데 그 판결문이 재미있어. “재질 있는 복싱 선수임을 감안,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집행유예를 선고한다.” 김진세 검사의 입김이 느껴지는 건 아빠만의 착각일까? 이후에도 김진세 검사는 김성준 후원회장을 자처하며 김성준의 재기를 도왔고 김성준이 부상당했을 때는 웅담까지 구해 먹이며 기운을 북돋웠다고 해. 마침내 한국 챔피언 타이틀을 되찾았을 때 검사와 전직 소매치기는 링 위에서 함께 만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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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준을 돕고 싶었던 사람들은 또 있었다. 김성준의 경기가 있던 날 복싱 중계 전담 아나운서였던 박병학씨는 허겁지겁 체육관을 찾았어. 그런데 주머니가 허전해. 아뿔싸 주머니는 찢겨 있고 지갑은 간데없네. 소매치기를 당한 거야. 낭패였지만 어쨌든 중계는 해야 했고 열띠게 중계를 끝내고 한 숨을 돌리는데 중계석 테이블 한 귀퉁이에 잃어버린 지갑이 얌전히 놓여 있지 뭐냐. 내막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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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소매치기가 입장하는 관중들로 혼란스러운 틈에 한 신사의 지갑을 실례해 놓고 보니 방송사 아나운서라. 그는 행여 이 사실이 전직 소매치기 김성준의 이름에 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서 다시금 소매치기의 섬세한 실력으로 살금살금 중계석에 접근해서 책상에 지갑을 올려놨던 거지.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에게 누가 될 수 있는 범죄를 되돌리려고 자신이 훔친 지갑의 임자에게 다가서던 소매치기의 마음, 상상이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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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와 소매치기의 합심 응원 속에 김성준은 한국 복싱 역사상 다섯 번째 세계 챔피언이 됐어. 하지만 이후 그의 경기는 시원치 않았다. 졸전을 거듭하며 2차 방어를 마쳤을 때 사람들은 그걸로 김성준은 끝이라고 했어. 그때껏 한국의 세계 챔피언으로서 3차 방어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더욱이 2차 방어전 상대였던 도미니카의 멜렌데스는 판정에 불만을 품고 WBC에 제소했고 WBC는 재경기를 명령했지. 아빠는 김성준의 3차 방어전을 현장에서 지켜보는 행운을 얻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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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15라운드에서 김성준은 미친 듯한 파이팅으로 멜렌데스를 몰아붙인다. 복싱을 했다기보다 싸움을 했다고나 할까. 클린치한 상태에서 멜렌데스를 로프로 던지다시피 한 뒤 주먹을 휘두르고, 빠져나가려는 멜렌데스를 붙잡고 늘어져 주먹을 내밀었어. 그리고 쏟아내던 비명 같은 기합 소리. 으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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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김성준의 동작 하나 하나는 아빠 기억 속에 선연해. 그건 한 인간이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짜서 그려낸 몸부림이었어. 눈이 부시는 영광과 눈이 찔리는 듯한 좌절을 골고루 경험했던 한 복서, 나아가 그 시대를 살았던 한 불우한 한국인이 몸으로 그려낸 고달픈 행위 예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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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듯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끈적끈적한 범죄의 유혹도 극복해 냈던 소매치기 출신 챔피언 김성준.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복싱을 떠난 뒤 세상과의 싸움에서는 아쉽게 패했고, 1989년 슬프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삶을 마감하고 말았어. 현역 선수 시절 단 한 번도 다운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던 김성준이지만 세상은 끝내 링보다 무서웠던 모양이지. 그 서글프고 덧없는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김성준의 삶을 기억하고 싶구나. 그의 비명 같은 기합이 쟁쟁하구나. 그러면서 쉴새없이 내밀던 그의 주먹질이 눈 앞을 소나기처럼 가로막는구나.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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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사진들이 영화 속 한장면처럼 너무 느낌있네요 뉴비 인사드리고 갈게요. 팔로잉과 댓글은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ㅎㅎ

네... 저도 기억 속에 선연합니다. 오히려 컬러로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팔로우하고 가요^^

감사합니다.....

와 글을 읽는데 영화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필력이 대단하세요!

아닌게 아니라 정말.... 김성준은 영화 주인공으로 충분합니다.... 소매치기의 삶.... 권투에 몰두하게 해 준 소매치기 친구... 엘리트 검사... 한국 최초의 3차 방어.... 그리고 슬픈 결말... 아우 영화죠

좋은 글이네요 사진과 글이 이해가 잘되네요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