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도 맘도 스산하다. <청춘>이
맘을 가로질러 흐른다.
가고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손짓에 슬퍼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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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전, 딱 이맘때였던 것 같다. 6월항쟁 뒤 한국은 직선제 개헌이다 대통령 선거 준비다 시끄러웠고 그때까지만 해도 민주화 동지로 박수받던 김대중이 부산에서 '몹쓸놈'으로 전락하고 '동교동 24시'가 날개돋힌 듯 팔리는 가운데 "이러다가 노태우가 되겠다."는 농담같은 전망의 가능성이 커지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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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고3이었다. 100일 주를 먹으면서 처음 술을 입에 대 봤던 범생이였던 나는 당시 하숙을 하고 있었다. 집이 멀었다는 핑계였는데 언젠가 어머니가 "아버지가 하도 못마땅해하셔서" 떼어 놨다는 얘길 하셨다. 허구헌날 공부한다고 책상에 앉아서 침 흘리며 퍼 자다는 아들 녀석 저런 의지로 뭘 하겠냐고 혀를 하도 차 대셔서 그랬다는 것이다. 나는 전혀 그런 낌새를 채지 못했고 하숙을 시켜 준다고 하시니 아싸 ㅇ제 110번 버스 안타도 된다고만 좋아했다는 건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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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맘때쯤 자습 분위기는 상당히 흐트러져 있었다. 이미 대충 대학 갈 군상과 그렇지 않은 군상이 갈라져 있었고 전자에게 교실은 소리 없는 투쟁의 장이었지만 후자에게 교실은 그저 야간 감옥이었다. 투사(?)와 죄수(?)가 함께 하는 교실의 분위기가 얼마나 애매했겠는가. 어느 놈들은 몰래 빠져나갔다가 술에 만취돼 들어와서 "인생이 뭐냐?"라고 헛소리를 늘어놓다가 바가지로 욕을 먹기도 했고 동의대 앞 포르노 비디오 틀어주는 다방에 단체로 뛰어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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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다방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아예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때만 해도 금단의 영역에 넘나드는 용기를 발휘하는 편이 아니었다. 몇 명이 보고 와서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그 실황을 중계할 때 잠깐 귀기울이기도 했으나 이미 선생님들이 정체를 파악하고 있어서 "느들 거기 가는 쉐이들 걸리면 바로 정학이다" 으름장을 놓는 위험 지역을 갈 엄두를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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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 자습 시간, 상대적으로 온순하고 애들 때릴 줄도 모르는 선생님이 자습 감독을 맡은 날이었다. 우연찮게 화장실에 갔는데 몇 명이 작당을 하고 있었다. 작당의 내용은 그 다방이었다. 내가 들어가자 선생님인가 싶어 흠칫 놀라던 녀석들이 아 놀랐다 씨바 하더니 다소 엉뚱하게 물어왔다. "니는 그런 데 안 가재?" 근데 참 사람이 묘하다. 거기서 내 입에서 나온 답은 정말 엉뚱했다. 그 말을 듣는 내 귀가 내 입을 의심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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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안가. 갈라모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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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아아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니가? 진짜가? 치아라 대포 치지 말고. 뭐랄까 미성년자 관람불가 극장에 간 대학생이 매표원한테 "주민등록증 내 봐라" 소리 듣는 기분? 욱할 때 욱해야 하면 용감한 사람이지만 대개 사람들은 욱할 필요가 없을 때 욱해서 찌질해진다. "언제 갈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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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섯 명이 산줄기 넘어 (우리 학교는 도망갈 루트가 많았ㄷ) 동의대 앞으로 진출하여 대망의 다방 앞으로 향하고 있는데 그만 낭패가 났다. 다방 앞에서 선생님 두 분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것이다. 생활지도 나온 게 아니라 두 분이서 한 잔 하다가 2차 나오신 분위기였지만 대여섯 명의 고3을 대학가에서, 그리고 요주의지역으로 이미 소문난 포르노 상영 다방 앞에서 마주한 학생들에게 인자할 리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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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이 자슥들...... 뭐꼬." 뭐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튈까 했는데 이미 얼굴이 노출된 상황에서 뛰어봐야 벼룩이고 날아봐야 새장. 그나마 다방 안에서 현장을 털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행일까 싶었지만 이미 선생님들은 혐의를 확정하고 계셨다. "이 자슥들 느그 다 정학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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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눈앞이 새까매졌다. 정말 정학이야 맞으랴 싶었지만 어찌 됐든 시험 앞두고 이게 무슨 짓이냐 어떻게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미쳐설랑 뭘 보겠다고 야간에 공비 침투하듯 산자락 넘어 예까지 왔다가 이런 꼴을 당하나 싶으니 눈물마저 핑 돌았다 . 그때 스쳐간 건 부모님 얼굴도 아니고 포르노 장면도 아니고, 그저 고등학교 3년의 내 모습이었다. 열심히 한 건 솔직히 아니지만 꾸역꾸역 하려고는 했던, 새벽 5시에 일어나 도시락 두 개 싸서 학교에 7시 반까지 나와서 졸다가 분필 맞고 자다가 뒤통수 맞고 그러면서 그야말로 있는 듯 없는 듯 대학 시험날만 바라보고 지내던 모습들이 슬라이드 환등기처럼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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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잡힌 놈들이 전과가 없고 결정적으로 육성회장 아드님이 계셨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범행(?)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정상이 참작됐고 그날 학교로 돌아가서 엉덩이 두어대 맞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됐다. 밤 열한시 넘어 불꺼지는 학교를 뒤로 하고 하숙집을 향하는데 날은 스산하고 맘도 추웠다. 그런데 웃음이 나왔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엄청나게 웃음이 나왔다. 한참을 미친 놈처럼 웃다가 흥얼거린 노래가 김창완의 <청춘>이었던 기억이 난다. 가사를 내 맘대로 바꿔서. 이를테면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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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시 국어는 때우고 때우고 2교시 수학은 넘어가고 도시락 까먹고 자습도 끝나고 그렇게 고3은 가는 거야."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가사를 바꿔 가면서 후렴구를 한 열 번은 불렀을 것이다. "그렇게 고3은 가는 거야." 퇴근길에 뭣 좀 정리하느라 까페에 앉아서 옷깃 올리고 주머니 손에 넣고 직장인들 퇴근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그때의 까까머리 고3, 되도 않은 객기 부리며 포르노 보러 갔다가 입구에서 들켜서 얼굴이 흙빛이 돼 버렸던, 혼자 운동장 걸으며 미친 듯이 웃다가 이상한 노래 흥얼거리던 고3이 눈앞에 살아왔다. 다시 한 번 그때 날씨도 참 스산했다. 맘도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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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사람 머리가 까까머리였으면 아마 그때 나랑 비슷한 모습이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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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힘들었지만 지금생각해보면 참 그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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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었지만 빛나는 시기였으니까요 청춘이 ... 아무리 찌질한 청춘도 아름다운 법이니까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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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어떤 상황 발생 시 그 순간에 걱정했던 것 보다는 항상 작은 파문으로 마무리되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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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는 그런데... 간혹 안그럴 때도 있긴 했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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