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9년 7월 30일 1차 프라하 창문 투척
체코, 그 이전 보헤미아를 다스리던 이들은 고소공포증을 지니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분노한 프라하 시민들이 의회나 시청, 프라하 성에 난입하여 눈에 거슬리던 사람들 멱살을 틀어쥐고, 또는 팔 다리를 잡고 흔들다가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린 일이 몇 번씩이나 일어났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창문 투척 사건은 30년 전쟁을 불러온 1618년의 프라하 투척 사건인데 이는 2차 창문 투척 사건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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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2차 투척 사건의 희생자들은 그나마 행운이었다. 죽고도 남을 위치에서 추락했지만 퇴비 더미에 빠져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하지만 1419년 7월 30일 1차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의 희생자들은 그다지 운이 좋지 못했다. 목이 부러져 죽거나 겨우 살아났어도 창문 밖에서 기다리던 분노한 군중들에게 맞아 죽었던 것이다. 시장과 판사, 시 의회 의원 등이 희생자였다. 그리고 그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진 이들은 그로부터 4년 전 화형대의 연기로 사라진 얀 후스를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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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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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는 루터보다 한 세기 앞서 종교 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사람이었다. 가톨릭의 사제였으나 라틴 어를 버리고 체코어로 설교하고 성경을 번역했던 그는 교황의 무오설과 상급 성직자에 대한 무조건 복종을 거부했다. 특히 면죄부에 대해서는 그는 극언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는다. “용서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값없이 주어지기 때문에 면죄부는 필요 없다. 이건 사기 행각이다.” 아마 요즘 한기총같은 한국의 주류 개신교 목사들이 들으면 엉덩이 깨나 뜨거운 소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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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가 뜨거운 것은 당시 가톨릭 성직자와 그 후견자라 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1411년 파문 선고를 받은 뒤에도 도처를 옮겨 다니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니는 후스는 가톨릭 공공의 적이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콘스탄츠 공회를 소집하면서 후스를 불렀다. ‘신변 보장 각서’까지 제공하면서. 후스는 그에 응해 콘스탄츠로 향하지만 예감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내가 큰 두려움 없이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그분이 허락하시기를 힘써 기도해 주시오”라고 공언하고 길을 떠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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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다를까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그를 감금해 버렸다. 보헤미아 왕이 항의했으나 “이미 이단 선포를 받았고 이단과의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에 막혔다. 그러나 후스는 계속된 협박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크리스천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에 귀를 기울여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고,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리를 사수하라.”고 누차에 걸쳐 설교하던 강골이었으니 돈 주고 죄를 사함받으라는 설교가 입에 밴 장사치들이 통할 리가 없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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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년 7월 6일 그는 화형을 당한다. “나는 거위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라는 뜻)처럼 죽지만 100년 뒤엔 백조가 나타나리라. 너희들은 결코 그 백조를 태울 수는 없으리라”고 예언하면서. 그가 화형대 위에서 했다는 여러 비장하고 경건한 신앙 고백도 감동적이지만 어느 신앙심 깊은 한 노파가 사악한 이단을 화형시키는데 일조하기 위하여 열심히 땔감을 던져 넣는 것을 보고 남긴 한 마디는 이후 역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후스는 그 노파를 보며 이렇게 외쳤다. . "O, sancta simplicitas!"(오, 성스러운 단순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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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단순함은 성스러움을 가장하고 성스러움은 단순한 이들의 눈을 가린다. 단순함 속에서 성스러움은 상스러움으로 변하며 상스러움은 거룩함의 갑주를 입게 된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의 단순함은 그래서 성스러우면서 상스러운 것이겠다. 아울러 오늘 교회의 세습을 교회법상 합법으로 인정한 예장 통합에 저주 있으라. 이 단순한 자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