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6월 8일 '네이팜 소녀' 그 이후
이 사진을 처음 보았던 것은 국민윤리 아니면 도덕 교과서에서였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으나 총화단결이 이뤄지지 못해 망해 버린 ‘자유 베트남’ 얘기가 나오는 단원에 실린 사진이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사진을 기억하게 된 계기는 좀 저열하다. 한창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던 청소년들끼리 저 소녀가 옷을 입고 있는 것인지 ‘홀딱’ 벗고 있는지에 대해 내기가 붙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저 소녀가 왜 저렇게 발가벗은 채 처절하게 울면서 거리를 달리고 있는지의 이유를 알았더라면, 아무리 철없는 중고딩이라 하여도 그런 내기에 감히 이 사진을 들이대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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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의 전세가 점점 베트콩 쪽으로 기울어가던 1972년 6월7일. 심야에 베트콩은 사이공 인근의 트랑방 마을을 습격 점거한다. 날이 밝은 후 베트남 정부군은 탈환 작전을 펴지만 베트콩은 완강히 저항하여 작전은 여의치 않았다. 이에 남베트남 정부군 부대장은 늘 하던 대로 공습 지원을 요청했고 미 공군 폭격기는 득달같이 날아와 트랑방 마을에 맹폭을 퍼붓는다. 그들이 퍼부은 것은 네이팜탄이었다.
네이팜탄은 나프타와 팜유를 주원료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찐득찐득하게 몸에 달라붙고 물로도 꺼지지 않고 뒹굴어도 꺼지지 않는 지옥불같은 화염을 내뿜었다. 한국전쟁 중에도 빨치산들에게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무기이거니와, 베트남의 밀림에서도 네이팜탄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 네이팜의 화염이 군인과 민간인, 어른과 아이, 베트콩과 양민을 절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네이팜탄이 시커먼 연기를 토하며 터진 후 트랑방은 불바다가 됐다. 순간적으로 타오르면서 주변의 산소를 확 빼앗아가 버리는 폭탄의 특성상 요행히 불구덩이를 면해도 일산화탄소 중독이나 산소 부족으로 픽픽 쓰러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 와중에도 요행히 살아난 사람들은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죽을 힘을 다해 뛰어 나왔다. 찐득찐득한 화염이 달라붙은 옷은 그들의 피부를 녹였고, 피해자들이 옷을 벗을 때 피부까지 함께 벗겨져 나갔다. 발가벗은 소녀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목욕을 하다가 도망나온 것이 아니었다. 저 발가벗은 목덜미와 등, 팔에는 3도 화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섭씨 3천도의 네이팜의 혓바닥이 그녀를 희롱한 흔적이었다. 소녀의 이름은 킴푹. 사진 속에서 함께 울부짖는 소년은 그 오빠였지만 네이팜의 불길은 다른 형제 몇 명을 삼켜 버렸다.
성인이 된 뒤에도 킴푹의 상처는 여전하다.
이 사진을 찍은 이는 베트남 출신의 AP 기자 닉 우트였다. 사진을 찍은 뒤 우트는 급히 자신의 차에 킴푹을 싣고 병원으로 가지만 킴푹은 무려 17차례의 수술을 견뎌야 했다.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이었다. 닉 우트의 사진은 퓰리처 상에 빛나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았지만 킴푹은 전쟁의 참혹함에 질려 버린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는다.
몇 년 후 베트남은 패망했다. (또는 해방됐다.) 새로운 베트남 정부에게도 킴푹은 특별한 존재였다. 제국주의가 부른 전쟁에서 고통을 호소하며 울부짖는 소녀, 그로 인해 참혹한 상처를 입은 소녀의 이미지를 이용하고자 했고, 그녀가 보란 듯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약학을 전공한 소녀는 공산주의 형제국 쿠바로 유학까지 갈 수 있었다. 거기서 그녀는 베트남계 유학생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 이 부부는 그렇게 견결한 사회주의자들이 되지 못했다. 부부는 모스크바에 신혼여행을 다녀오던 중 중간 기착지였던 캐나다에서 망명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킴푹은 기독교에 귀의하여 우리 나라 말로 하면 간증자로 명성을 쌓는데 적어도 한 명의 영혼은 확실히 구한다. 그는 운명의 날 마을에 네이팜탄을 퍼부었던 폭격기 조종사 존 플러머였다. 그는 자신이 투하한 폭탄의 성과(?)를 똑똑히 보고 수십 미터 아래에서 사람들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냄새를 귀와 코에 담을 만큼 근접 폭격을 했었다.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었던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킴푹의 사진이었다. 스틸 사진 속의 소녀가 울부짖는 소리가 그를 괴롭혔고 사진 속에서 뛰어나와 자신에게 달려드는 듯한 환영에 시달렸다. 24년 동안 그는 그런 괴로움 속에서 살았다. 두 번의 결혼도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술 없이는 못 사는 폐인이 되어 버렸다.
존 플러머
그러던 중 1996년 재향군인의 날, 그는 동료들과 함께 워싱턴을 찾았는데 그날 워싱턴은 특별한 손님을 맞고 있었다. 바로 킴푹이었다. 그녀는 평화의 꽃다발을 전하며 자신의 전쟁 체험을 회고하고 그 비극의 재연을 막아야 함을 역설했다.
“화상 때문에 아직도 고통스럽지만 이젠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저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을 겪으며 죽어갔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 그날의 사진 속, 내 뒤에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육신을 잃은 사람들도 즐비하게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철저히 파괴되었지만 그들은..... 사진에 찍히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듣던 존 플러머는 미친 듯이 사람들 숲을 뚫고 앞으로 달려나간다. “나입니다. 내가 당신 마을을 폭격한 사람입니다.” 필사적이었다. 스물 네 해 자신을 뒤덮어 온 죄책감을 털어버리려는 듯 그는 계속 반복해서 외쳤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이제는 소녀적 모습이 거의 남지 않은 킴푹은 이렇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벌써 다 용서했어요.” 야수와 같은 전쟁의 끄트머리에서 만났던,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볼 일이 없었을 베트남 여자와 미국인 남자는 서로에게 준 상처를 씻고 보듬으며 용서하고 화해한다. 플러머는 24년의 고통이 그 2분간의 대화로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닉 우트 기자가 사진에 붙인 제목은 <전쟁의 공포>였다. 전쟁의 공포는 네이팜의 뜨거움과 포탄의 굉음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정작으로 무서운 부분, 그 진정한 공포의 원천은 너무나도 선량하고 죄없는 사람들이 그 인간성을 접어 두고 전장에 몰두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른 것 뿐”이었지만 도무지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없어 괴로워했던 선량한 사람이 수천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불덩어리들을 다발로 안겨야 했고, 태어나서 지은 죄가 하나 둘도 안 되었을 아이들이 속절없이 죽어가야 했다는 점일 것이다.
베트남보다 먼저 불을 뿜었던 한국 전쟁에서는 얼마나 많은 플러머들이 헤아릴 수 없는 킴푹을 죽여야 했을까. 그들은 용서를 빌 곳이 있었을까. 용서를 할 기회나 있었을까.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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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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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진짜 무서운 것 같아요
또 일어나면 안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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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무서운 겁니다.. 말도 못하게 무서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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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와 피해자, 아군과 적군으로 명명하고 있지만
결국 모두가 피해자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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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참 무섭고.... 더러운 존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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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긴장완화의 큰장이 될 이번 북미정상회담이 순조롭게 잘 되길 빌겠습니다.
네이팜은 많이 듣기는 했지만 저렇게 비인간적인 무기인지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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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네이팜탄 은 참 무서운 무깁니다.... 지금은 백배 더 무서운 무기가 널려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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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다가 눈물이 났습니다. 국가가 가지는 폭력성...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탈중앙화된 사회가 도래하여 이 구조가 바뀔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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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당장 우리 앞에 놓이는 전쟁의 그림자부터 걷어내고 평화... 평화.. 오직 평화를 되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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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죽이며 끝까지 다읽었네요ㅠ
제발 전쟁이 안일어나길
북미회담성공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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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 아들은 6월 25일 입대합니다... 작년 가을에 갔더라면 저는 무척 두려워했을 것 같습니다만 지금은 좀 편합니다.... 이 분위기가 이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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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진 기억이 납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어떻게 말로 다 하겠습니까
끔찍한 상처를 딛고 용서하고
용서 받을 수 있음이 다행입니다.
진정성의 승리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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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는 말씀이십니다.... 용서받을 만한 자격이 된 사람이랄까요. 어떤 이는 명령이었는데 뭐 하면서
평생 유유자적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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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참 대단하네요.
저 고통을 이겨내고, 나에게 상처를 남긴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삶을 살수 있다라는거.정말 대단한것 같습니다.
저도 사진전에서 저 사진을 보고 어떤 사연이 있는건지
찾아보았는데, 오늘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되었네요.
가슴이 아프면서도 위대해지는 삶을 나타내는 사진이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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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해 주는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해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에서 보듯 인간의 용서는 신과 가까워지는 일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가슴 아픈 사진의 역사..... 함께 기억했으며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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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슬픈 사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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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볼 일이 없었을 베트남 여자와 미국인 남자는 서로에게 준 상처를 씻고 보듬으며 용서하고 화해한다. 플러머는 24년의 고통이 그 2분간의 대화로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찡 합니다. 미국은 저 네이팜탄을
2차대전 전체에 쓴것보다 더 많은 양을 북한에 쏟아 부었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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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네이팜탄의 위력을 실감한 게 한국전쟁이기도 했죠. 전쟁은 그렇게 '본의 아니게' 사람들을 지옥의 악마와 피해자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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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존플러머의 삶은 정말 괴로웠을 것 같네요. 존플러머는 용서를 받은 이후 잘 살고 있을까요. (이미 돌아가셨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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