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외국 영화 보는 젊은 또는 어린 사람들은 성우 더빙이 오히려 낯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머리와 뼈가 굵어갈 무렵에는 외화든 다큐멘터리든 성우들의 목소리를 거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죽하면 소년중앙인가에서 성우들의 세계를 소개하기 전까지는 6백만불의 사나이 스티브 오스틴부터 미드 <전투>의 소대장까지 전 세계 영화 배우들이 한국말만 쓰는 줄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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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영광의 탈출> 주제 음악이 시그널로 울려 퍼지던 <주말의 명화>나 아랑훼즈 협주곡이 단아하게 흐르며 오스카 트로피들이 화면을 수놓던 <토요명화>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주제 음악의 서막이 쩌렁쩌렁 울리던 <명화극장>은 금발 푸른 눈의 배우들과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성우들의 합동 무대에 다름 아니었다. 오히려 5-60년대 영화를 섭렵했던 아버지는 성우 더빙 영화를 싫어하셨다. “리처드 버튼 목소리는 저게 아니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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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람 따라 취향은 다를 것이다. 열연을 펼치는 배우들의 오디오와 비디오 그대로를 받아안고 싶은 이도 있을 게고 영어 잘하는 사람들은 번역의 문제를 성토하며 아쉬워하는 이도 있으리라. 하지만 어쩌랴. 내게는 리처드 버튼과 성우 유강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캐릭터였고 <로마의 휴일>의 앤 공주는 송도영의 목소리라야 더 이뻤으며 앤터니 퀸이 등장하면 어김없이 ‘인민무력부장’ 오진우 역 탤런트이기도 했던 이치우 선생이 함께 떠올랐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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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삐용>을 DVD로 봤을 때 스티브 매퀸과 더스틴 호프만의 목소리는 왕년의 최응찬과 배한성의 목소리에 비하면 너무나 빠삐용과 드가스럽지 아니하였고, <왕과 나>의 율 부린너의 오디오 또한 박상일의 위엄에 미치지 못하였다. 물론 주관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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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었다시피 예전 이름 있는 성우들은 저마다 맡아놓고 하던 배역이 있었다. 8-90년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맹활약을 하고 있는 배우 톰 행크스에게도 전담 성우가 있었다. 그분이 바로 2015년 5월 22일 오늘 돌아가신 오세홍이라는 분이다. <아기공룡 둘리>의 마이콜 역을 하셨고 <탑건>의 톰 크루즈 역도 맡았고 짱구 아빠 역도 그였지만 역시 그분이 제격인 배역은 톰 행크스였다.
<포레스트 검프>의 어눌한 목소리와 <필라델피아>의 절박한 에이즈 환자의 음성 모두 그분의 결코 굵직하지 않고 기름지지도 않지만 쓰다듬듯 귓전을 맴도는 미성(美聲)에 실려 안방에 전달됐었다. 영화 <콘에어>의 악당 존 말코비치에서 애니메이션 <빨간머리 앤>의 길버트까지 소화할 수 있으니 그 음역(?) 또한 넓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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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들을 만날 때는 묘한 놀라움 같은 게 있다. 배우들이야 얼굴을 익히 아니까 아 그 사람이구나 하는 마음의 각오(?)를 하게 마련이지만 성우들이 느닷없이 이름을 밝히는 순간 그 목소리와 이름이 갑자기 골든 크로스를 이루면서 머리 속을 번개가 휘젓는 듯한 느낌이랄까. 은하철도 999의 차장 아저씨 김기현씨를 만날 때도 그랬고 장유진씨를 마주할 때는 오디오와 비디오의 부조화 (그분은 엘리자베드 테일러 등 미인 전문 성우)에 당황했고 고 장정진 성우와 대면했을 때는 홍두깨!를 나도 모르게 면전에서 부르짖어야 했던 이유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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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홍씨도 그랬다. 그분을 처음 만난 이유는 영화 더빙이나 정규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나레이션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회사에서 주최하는 농구 캠프 스팟 (30초 정도의 행사 홍보 영상) 나레이션 때문이었다. 그때 녹음실 선배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아 오세홍 선배도 이젠 이런 걸 하는구나. 예전에는 어림도 없었는데.” 성우들과 일면식이 없던 처지로 녹음실 선배에게 섭외를 맡겼기에 오세홍씨를 섭외한 건 다름아닌 녹음실 선배였다. 그래서 무슨 말인가 싶어 연유를 물으니 더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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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인 줄 알아 임마. 오 선배 원래 스팟같은 거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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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도 끝도 없는 영광은 달갑지 않다. 재차 선배에게 무슨 소리냐고 캐물어 얻은 정보는 ‘성우’로서의 오세홍씨의 자부심에 대한 것이었다. 영화나 만화 더빙 또한 하나의 예술적 창조라고 보는 사람이며, 그 창조 행위에 대한 프라이드를 간직하고서 상업 광고나 스팟 등 ‘목소리 기교를 통해 돈을 버는’ 행위까지도 못마땅해 하는, 요컨대 성우계의 ‘딸깍발이’같은 존재라고 했다. 그런데 영광스럽게도(?) 내 스팟에 목소리를 얹어 주시게 된 이유는 ‘사고를 쳤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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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송사에서 한 PD가 목소리가 맘에 안든다고 해서 녹음이 끝난 상황에서 오세홍씨의 분량을 싹 지워 버렸고 이 만행에 격노한 오세홍씨는 해당 방송사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자진 하차해 버렸다는 얘기였다. 당연히 지갑은 가벼워지고 어깨는 무거워질 밖에. 그런 차에 녹음실에 놀러 왔다가 노니 장독 깨라는 녹음실 선배의 청에 응하신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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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을 가른다! 청춘이 땀에 젖는다! SBS 스타즈 농구캠프!” 멋쩍은 미소를 흘리면서도 오세홍 씨는 열심히 스팟 나레이션을 읊으셨다. “너무 약하지 않나? 내가 이런 건 잘 안해 봐서.” 고개를 갸웃하시면서 열심히, 또 반복해서 몇 안되는 나레이션을 열 번쯤은 반복해서 읽으셨던 것 같다. 뭔가 송구하고 안스러워서 “선생님 됐습니다!”를 외쳤을 때 녹음실 안에서 돌아온 대답은 우직한 포레스트 검프의 말 같기도 하고 전투기 안에서의 탐 크루즈의 무전 소리 같기도 했다. “내가 안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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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을 마지막으로 뵌 건 어느 상가에서였다. 용케 농구 캠프 스팟을 비롯해 몇 번 함께 작업했던 PD를 알아보시고선 옆에 와서 술 몇 잔을 주고받으시다가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사람 사는 게 말이야 참 우스운 거야. 내가 로또를 계속 샀거든. 고정 번호로 말이야. 처음 시작할 때부터 계속 그 번호로만 샀지. 그런데 딱 지난 주에 내가 어디 지방에 갔다 오다가 시간을 놓치고 못샀어. 그런데 아 글쎄 다음 날 길을 가는데 로또 1등 번호가 전광판에서 지나가는데 세상에 그 번호들이지 뭐겠어. 몇 번을 봐도 믿기질 않아서 다시 봤는데 그 번호더라고. 참 인생이란 게 묘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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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남자의 외모에 넘어가는 게 아니라 목소리에 넘어간다던가. 비록 여자는 아니지만 나는 그때 그분의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구수한 음색과 명확한 발음, 그리고 힘 줄 때 주고 꺾을 때 꺾어 주는 아름다운 한국어 억양에 완전히 빠졌었다. ‘츠암~~~~’ 할 때의 그 치읓 발음은 그 후로도 흉내 내고 싶어서 츠암 츠암 거렸거니와 “인생이란 묘한 거야”의 그 억양을 따라하고 싶어서 얼마나 애써 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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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분도 세상에 없다. 홈페이지에 있었다는 그분다운 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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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청소년이 되면, 너희들은 뭐든지 맘대로 할려고들지. 20대는 좀 희미하고, 30대가 되면 가족을 부양하고 쥐꼬리만한 돈을 벌면서 20대를 그리워하지. 40이 넘으면, 아랫배가 조금씩 나오고 턱이 이중턱이 되고 무슨 음악이든 너무 시끄러운 것 같고 고등학교때의 여자 동창생이 할머니가 되지. 50대가 되면 가벼운 수술을 받게 되고 그걸 본인은 사소한 치료를 받았다고 우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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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가 되면 중한 수술을 받게 되고 음악따위는 시끄럽든 말든 관심도 없지. 어차피 안들리니까. 70대엔 마누라하고 은퇴해서 플로리다같은데 가서 오후 2시에 저녁을 먹고 점심은 아침 10시, 아침은 전날밤에 먹으면서 할일없이 백화점같은데나 돌아다니며 물렁한 음식을 찾아보면서 줄기차게 "애들이 왜 전화도 안하지?"하고 투덜거린다. 80세가 넘으면 심장마비로 한두번 쓰러지고 담당 간호원한테 마누라에 대한 불평이나 늘어놓는 신세가 되지. 질문 있나?”
이 긴 대사를 시니컬하면서도 명확하게, 지루하지 않으며 달착지근하게 읊어줄 목소리는 이제 레테의 강 너머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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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그를 추억하고, 그와의 짧은 조우를 더듬으며 그분의 명복을 빈다. 안녕히 가세요 오세홍 선생님.
ER의 닥터 그린도 하셨고... 심지어 그 연세에 '기동전함 나데시코' 더빙판의 주인공이기도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오세홍 선생님의 목소리가 제 머리속에 처음 기억된건 1984년 애니메이션 '샛별공주'에서 두 오빠 중 한 분을 맡으셨을 때였던 것 같네요. 그리운 목소리입니다. 좋은 포스팅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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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 제가 못본 것들이라..... 아 샛별공주는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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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의 닥터 그린 역할은.. 상대역으로 나온 조지 클루니의 닥터 로스가 김환진님이었기 때문에... 샛별공주의 두 오빠가 바로 세홍님과 환진님이었어서 저한테는 굉장히 감회가 깊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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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티비에서 성우분들 연기를 보는게 자연스러웠는데 이제는 명절에도 외화 더빙을 보기 힘들 정도네요
가끔 더빙판 영화 볼 때면 옛날 생각이 나서 많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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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원작을 해친다고 하는데 갠적으로...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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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단순히 번역된 대사를 읊는게 아니라 캐릭터에 대한 재구축 작업인데 이걸 무시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죠.
특히나 인터넷 붐이후 외국 영상물을 실시간으로 접하는 사람들 중에 마치 원작을 즐긴다는 걸 무슨 특권 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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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성우 덕후 방송 본게 기억나요. 만화 첫 회에 목소리만 들으면 누가 주인공인지 바로 알 수 있다는 말에 공감했던 기억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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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죠. 저는 아직도 옛 미국 배우들은 그들 목소리보다는 그들을 맡았던 성우 목소리가 더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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