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8일 4.19 이브
1960년 4월 전국적으로 심상찮은 공기가 떠돌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부정선거가 한 달 전에 있었고 며칠 전에는 물고기가 파먹은 고교생의 시신이 바다 위로 떠올랐다. 이때만 해도 학생운동(?)의 주력은 고등학생들이었다. 각지의 ‘고삐리’들이 먼저 교문을 박차고들 나와서 데모하다가 경찰에게 흠씬 두들겨 맞으며 끌려갔다. 부산고등학교에서 휘날린 선언문 한 구절을 읽으면 요즘과 , 아니 내가 고딩 때와도 참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더러 눈을 감으라 한다. 귀를 막고 입을 봉하라 한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가슴 속에 한 조각 남은 애국심이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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굼뜬 대학생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동국대생 김칠봉의 증언에 따르면 4월 14일 고려대,성균관대,홍익대 등 학생들이 모여 4월 21일 총궐기를 결정했고 그에 상응하는 준비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4월 21일 D데이를 앞두고 김칠봉은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소식을 듣는다. “고려대에서 시위가 터졌다!”
이 모의에 참여했던 고려대 대표 김금석은 먼 훗날 “40년 동안 (약속을 어긴) 고려대 는 배신자 ! 소리를 들었다.”고 술회하거니와 4월 18일 벌어진 시위는 고려대가 ‘먼저 치고 나간’ 셈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게 폄하할 수도 없는 것이 고려대학교에서는 이미 4월 16일 신입생환영회를 기화로 시위를 벌이려다가 무산된 적이 있었고 18일의 시위는 그 재시도였던 측면도 있다.
점심 시간을 틈타 학생들이 사이렌을 울리려 하자 학교측이 이를 막아섰다. “동을 뜨는” 수단을 잃어버린 고려대생들은 목소리를 사이렌 대신 사용했다. “인촌동상 앞으로!” “인촌동상 앞으로!” 사이렌은 주의를 환기시킬 뿐이었겠지만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사람들의 육성은 고려대생들을 격동시켰다. 내가 그 데모를 주동했노라고 하는 사람은 꽤 되는데, 그 시위는 조직적이라기보다는 자연발생적이었다. 법대생 홍영유의 회고에 따르면 1시경 모여든 사람은 100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 인원으로는 안된다고 여긴 홍영유가 도서관에 들어가 시위의 시작을 알리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루루 학생들은 가방을 싸고 우당탕 의자들이 책상 밑으로 들어갔다. 4.18 고대 시위의 시작이었다.
이제 수천 명이 된 고려대학생들은 교문을 뚫고 거리로 나섰다. 안암로터리와 대광고등학교에서 경찰과 충돌했지만 고려대생들은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하는데 성공한다. 광화문 앞에서 고려대생들은 교가를 부른다. “북악산 기슭에 우뚝 솟은 집을 보라 안암의 언덕에 퍼져나는 빛을 보라. 겨레의 보람이요 정성이 뭉쳐 드높이 쌓아올린 공든 탑......” 이 노래를 작곡한 이는 후일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한몸에 새긴 작곡가 윤이상이다. 그는 고대 교가를 두고 이렇게 얘기한 바 있었다.
“교가를 부르는 것은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읍니다…… 이 교가가 현재나 장래에 여러분의 학교에 대한 감회와 항상 같이 할 수 있기를 작곡자로서 바라는 바이요……이 노래가 여러분의 진리의 탐구와 애교심에 통하여 길이 좋은 반려가 되었으면 이상에 없는 소망이겠습니다.” 최소한 1960년 4월 18일 그 소망의 반은 이루어졌다.
처음 데모에 나선 대학생들이어서 그랬는지 정부의 대접도 고등학생들 때려잡을 때와는 달랐다. 홍진기 내무장관이 특명을 내려 연행 학생들을 석방했고 총장 유진오의 권유로 시위를 끝낸 뒤에는 경찰 백차를 앞세우고 학교로 돌아가도록 했다. 백차의 선도까지 받은 고려대생들이 의기양양 을지로를 거쳐 종로 방향으로 행진하면서 사달이 발생한다.
깡패들이 고려대생들을 습격한 것이다. 약 100여명의 깡패들이 흉기와 둔기를 들고 학생 대열을 들이쳤고 삽시간에 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나뒹굴었다. 반공청년단 종로 지부장이었던 임화수, 그리고 이른바 이정재의 ‘동대문 사단’ 똘마니들이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계획된 습격”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2004년 4월 시사저널에서 인터뷰한 ‘낙화유수’ 김태련은 그게 우연이었다고 증언한다. 3.15 선거 지지 관제 시위를 위해 깡패들이 모인 것은 사실이지만 충돌은 우발적이었다는 것이다.
시민들에게 환호를 받으며 또 박수를 유도하며 행진하는 고대생에게 한 깡패가 “학생이면 공부를 해야지 웬 데모냐.”고 시비를 걸었고 이에 발끈한 단순한 고대생들이 몰려들자 깡패들이 그에 대응한 것이라고 한다. 이유야 어쨌든 대로변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대학생들의 모습은 온 서울 시내를 들끓게 한다.
김태련은 “고대생들이 그때 반공청년단 사무실이 있던 종로 4가 길로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우연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이미 우연이 아니었다. 깡패들이 정당의 연설회를 방해하고 권총으로 야당 정치인을 쏘던 시절 발생할 수 밖에 없던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 때문에 동대문 사단의 오야붕 이정재와 임화수는 목이 매달리게 된다.
깡패에게 두들겨 맞은 이들 외에도 그날 처참하게 짓밟힌 고대생들은 더 있었다. 대오가 학교로 돌아간 뒤에도 43명의 고대생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계속 농성을 전개하다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짓밟힌 것이다. 그렇게 기나긴 4월 18일이 저물었다. 깡패에게 습격당한 고려대생들의 소문은 서울 시내를 폭풍처럼 휩쓸었고 대학생이고 고등학생이고 주먹을 부르쥐었다. “이 새끼들을 그냥.....” 4월 21일의 연합집회는 바로 이틀 앞 4월 19일로 당겨졌다.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은 그렇게 우리 역사에 다가오고 있었다.
4월 유독 피로얼룩진 역사가 많이 있는걸 새삼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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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어트가 한국인인 모양입니다 4월은 잔인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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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잘보고 갑니다.
오늘 글은 울분이 담겨있네요.
58년전 오늘 이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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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반드시 기억해야 할...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인 이유를 만든 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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