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6월 11일 광성진 전투
‘신미양요’라고 배운다. 란(亂)같은 대규모 전쟁은 아니고 소요 정도의 분쟁이 ‘양이’에 의해 일어났다는 말일 게다. 그 양이의 국적은 미국이었다. 미국도 전면전을 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몇 년 전 대동강을 거슬러 오르며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관민들에 의해 불타 버린 제너럴 셔먼 호 사건도 따질 겸, 일본에서 재미를 봤던 ‘포함 외교’를 통해 조선의 빗장을 열어 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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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휘관 로저스 제독은 5년 전 병인년에 프랑스 함대가 왔다가 별 소득 없이 철수했을 때 “조선이 프랑스 최강 함대를 무찔렀다.”는 소문이 퍼져 중국 천진에서 외국인 학살극이 펼쳐졌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바 여차하면 강력한 무력을 휘두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로저스 제독과 청나라 주재 미국 공사 로우까지 올라탄 5척의 군함이 나가사끼에서 조선으로 향한 날이 1871년 5월 16일. 여기 저기를 측량하고 해로를 살피며 북상하던 그들이 강화도에 접근한 것은 6월에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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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조선측에서 보면 그야말로 계엄 지역 중의 계엄 지역인 강화도 손돌목 앞바다에 미군 군함이 나타난다. 이에 조선측 요새의 포병들은 용서 없이 포격을 가했다.
“남북전쟁 때만큼이나” 맹렬한 포화가 군함들에 쏟아졌고 급히 피하다가 암초에 부딪친 배 등 두 척이 손상을 입는다. 하지만 대수로운 것은 못되었고 일단 물러선 미군은 예의 “U.S under attack!"을 주장하며 이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한다. 그러나 척화비 위에 버티고 앉아 있던 대원군이 수염 한 올 까딱할 일이 없었다.
6월 10일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에 무자비한 포격을 가하고 해병대를 상륙시켜 요새를 간단히 장악한다. 그리고 6월 11일 그들은 강화도 제일의 요새이자 수백 명의 정예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광성진에 접근한다.
지휘관은 진무중군 어재연. 그 수백 명은 죽기를 맹세하고 한 부채 안에 전원의 이름을 결사의 맹세로 써 넣고 있었다. 이름하여 일심선 (一心扇)이었다. 두만강변 회령 부사를 지낸 적이 있던 어재연은 인근 고을 경원과 경흥에 심심찮게 나타났던 또 다른 양이 아라사(러시아)인들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시커먼 배들은 계속 다가왔다. 아마도 살아서는 육지를 밟을 수 없으리라.
수(帥 )자기가 대문짝만하게 쓰여진 대장기 밑에서 어재연은 결사의 맹세를 다시 언급하며 병사들에게 외쳤다. “우리는 이제 피할 곳도 없다. 적병들이 포대를 좁혀오니 죽기로써 싸우자.”
병사들도 호응했다. 그러나 포탄은 사방에서 날아왔다. 이미 상륙해 있던 해병대 병력의 곡사포와 군함의 함포가 앞뒤에서 광성진에 집중사격을 가한 것이다. 광성진 전투의 시작.
광성진 전투는 다들 잘 아실 테니 생략하기로 하자. “칼 창이 부러지자 흙까지 던지며 싸웠으며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여 총검을 목에 겨누고 찔러달라고 하고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바다에 몸을 던졌으며 이 장렬함에 감탄한 미군은 더 이상의 전쟁을 포기하고 물러갔다.”는 식의 이야기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위의 주장도 팩트는 맞다. 광성진 전투에서 보여 준 조선군의 감투 정신은 대단했다. “조선인들의 애국심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보여준 적이 없을 듯” 하다는 미군의 평가도 있었다. 그런데 불편한 진실도 자리잡고 있다.
조선군 대포는 병자호란 때 쓰던 것과 큰 차이가 없는 화기였고 미군 함포의 사정거리의 1/5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조선군의 포탄은 목표물에 명중했을 때 폭발하지도 않는 그냥 쇠뭉치였다. 광성진 요새 벽을 단번에 허무는 미군의 포탄과는 여러 차원이 달랐다. 그렇게 요새가 무너진 건 어쩔 수 없다 치고 그 다음 전투는 백병전이었다. 미군 해병대가 상륙했고 창칼을 휘두르는 조선군과 맞붙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망자 수는 미군 3명 조선군 수백 명이었다.
조선군의 칼과 창은 미군의 총검에 부딪치자마자 부러지거나 휘어 버렸다. 근대적 제철기술로 만들어진 미군의 총검은 대장간에서 옛날 하던 대로 두드려 맞춘 쇠와는 질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조선군은 곰처럼 둔했다. 대원군이 전국에 영을 내려 거둬들인 아이디어의 하나였던 “아홉겹 솜옷 갑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흰옷을 입은 243명의 시체는 요새 안에 있었고 100여명의 시체는 요새 밖에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솜이 밖으로 튀어나온 아홉 겹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종군기자 그리피스)
화승총으로 실험한 결과 여덟 겹까지는 뚫었고 아홉 겹은 뚫지 못해 아홉겹 갑옷이 채택된 것인데 미군의 총탄은 간단히 그 아홉 겹을 관통했다. 초여름 6월 11일. 아홉 겹 솜 갑옷을 입고 팔다리를 놀리며, 간단히 부러져 나가는 총칼을 들고 조선군은 싸웠던 것이다. “창 칼이 부러지자 흙을 뿌리며 싸웠다.”는 건 장렬하기도 하지만 얼마나 비참한 얘기인지를 상상해 보기 바란다. 지휘관 어재연도 미군의 총검에 죽는다.
어재연은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는 등 죽어서 대접을 받는다. 함께 죽은 동생도 이조참의 감투를 사후에나마 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들이 장렬 또 장렬했음은 또 알겠는데 그 죽음의 이유를 깨달아 다른 죽음을 면하게 하는 지혜는 우리 선조들은 왜 발휘하지 못했는가 하는 일이다.
장렬함 뒤에 숨은 비참함에 대해서는 왜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관심이 없는가 말이다. 하나 하나를 따지면 태산보다 무거운 생명들의 결사의 각오를 그저 총알받이로 몰아넣고 그 ‘장렬함’에 들떠 눈물 흘리며 “적들이 아무리 강해도 우리는 죽음으로 이긴다.”는 식의 구 일본군같은 정신세계로부터 과연 우리는 자유로울까 말이다.
1871년 6월 11일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는 미군 침략군의 기함의 마스트에 내걸렸고 이후 100년이 넘게 미 해군 박물관에 미군이 노획한 각 나라의 깃발들과 함께 보존되어 있다가 임대 형태로 다시 조선 땅, 한국 땅에 들어왔다. 그 장군기 밑에서 목청이 터져라 힘내라를 부르짖으며 병사들을 독려했을 어재연 장군. 일심선에 이름을 써내려간 수백 명의 장병들. 부러진 창칼을 내던지고 흙을 뿌리며 미군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덤비다가 총검에 맞창이 나버린 사람들. 몸을 굴려 벼랑으로 떨어진 사람들의 한맺힌 목소리들이 그 깃발에는 서려 있을 것이다.
아마 그들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후회는 절대로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장렬하게 죽기보다는 쪼잔하게라도 이기고 싶었다.”
신미양요 최대의 격전. 광성진 전투가 1871년 6월 11일 벌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안좋게 시작한 인연으로부터 147년 플러스 하루인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열린다. 부디 좋은 결과 있기를
참 아이러니한 시간의 반복이네요. 6월 11일, 6월 12일. 좋은 결과가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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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은 계속해야하는데 새로운것은 다 막으니
지금 이랑 별차이는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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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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