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출동 SOS24 하던 시절 가끔 솔루션위원으로 자문에 응해 주셨고 지금은 꽤 높아지신(?) 교수님이 한 청년을 데리고 몸소 우리를 찾아 오신 적이 있습니다. 함께 온 청년은 나보다 좀 큰 키에 딴딴해 보이는 체구였는데 순박해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험악한 인상도 아닌, 문밖만 나가면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의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 사연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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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청년은 성폭행 전과 2범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더 많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발바리 아시죠? 바로 그런 류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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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쨍 하고 열리고 눈이 폭 하고 튀어나옵니다. 뭐라, 발바리? 수십 명인지 수백 명인지 모를 여자들을 성폭행하고 다녔던 경향 각처의 그 발바리같은 사람이라고? 그런 괴물이 지금 내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고? 소름 한 바가지가 온몸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내막을 미리 알고 있던 작가 얼굴에도 긴장이 완연하게 깃듭니다. 조심스럽게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사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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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필이 꽂히는 여자를 보면 무슨 몽유병처럼 따라가요. 그래서 원룸 같은 데라면 문을 여닫는 순간 달려가서 문에 발을 끼웁니다. 그리고는 들어가서 성폭행을 했습니다. 나쁜 놈입니다 저는...... 근데 자제가 되지를 않아요. 그때마다 후회하고 다시는 다시는 안한다 결심을 해도 문득 정신 차려 보면 누군가를 쫓아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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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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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출소한 뒤로는 한 번 더 하면 내 인생은 끝이다는 걸 스스로 강조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일이 없었지만 충동은 수시로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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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시한폭탄이라고 표현하는 이 청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불우한 가정에서 비정상적으로 자라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후일 제가 직접 가족을 만나 봤지만 매우 단란한 가정의 막내였고 가정 형편도 부족한 것은 없고 이른바 어린 시절 문제아도 아니었습니다. 스물을 넘어서부터 그 증상(?)이 발동하기 시작했고 여자 친구가 버젓이 있을 때에도, 그 병통(?)은 멈추지 않았다는 겁니다. 운동에도 몰두해 보고, 절에도 가 봤고 굿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네요.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관련 학과 교수님께 자기를 좀 어떻게 해 달라고 SOS를 보낸 결과 교수님이 방송을 통해서 각계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보자는 권유를 했고 결국은 제 앞까지 오게 됐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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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막막하지만 탐나는 아이템이네요.” 작가의 말이었지만 저는 정 반대였습니다. “좀 탐나지만 너무 막막한 아이템”이라는 직감이 왔으니까요. 적어도 자신의 고충을 이야기할 때 그의 눈은 진지했지만 나는 그 진지함조차 겁났습니다. 그 공포는 두 가지 구멍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도대체 이 인간을 얼마나 믿어 줘야 하는가. 출소 이후에는 참아(?) 왔다지만 그 말은 또 어찌 믿는단 말인가. 뭐 이런 괴물같은 인간이 다 있는가 하는 원천적인 부분이 하나요, 두 번째 이유는 그 진정성을 믿는다고 치고 도대체 어떤 솔루션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이 사람을 촬영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는 답답한 두려움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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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명동 거리를 걷는 것을 멀리서 팔로우한다? 그리고 이 사람이 뭔가에 홀린 듯 여자를 따라가고 있는 걸 보면 달려가서 막는다? 뇌파와 심장박동 수를 측정하는 장치를 붙여놓고 실험을 한다? 다 좋은데 만약 우리가 이 친구를 놓치기라도 하는 양이면 이건 시말서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대사건에 봉착할 것 아니겠습니까. 더하여 가장 결정적인 것. 우리가 이 친구의 상태를 ‘병적인 상태’로 보고 ‘치료해야 할 증상’으로 치부하는 순간 이건 매우 중대한 면죄부를 발행하는 것이 되지 않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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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프로그램 제작자 입장에서 자기 상황을 저렇게 솔직하게 고백하고, 화학적 거세라도 받겠다고 서슴지 않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길 가다가 신사임당 그려진 지폐를 줍는 일보다 더 드문, 쉽게 오지 않는 행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끝내 그를 취재하는 일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작가는 제게 퍽 서운해 했고 굴러들어온 호박을 하이킥했다고 암암리에 타박도 했지만 저는 꽤 단호하게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위에 쓴 이유를 제 자신 극복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언터처블’로 남았던 그 청년의 오늘은 저도 모릅니다. 그 교수님께 여쭤 보지도 않았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발바리 비슷한 사건 신문 기사만 나면 그 청년을 떠올리며 기사 내용과 그의 이력을 맞춰 봅니다. 그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말이지요. 경찰 하는 친구에게 이 얘기를 해 줬더니 단칼같은 답이 돌아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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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새끼네. 통제가 안되기는 뭘 안돼. 핑계지. 그 자슥은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라. 얼마 못가서 법무부 소관 하에 들어갔을 거다. 모르지 지금쯤 빵에 있을지도.” 이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 또라이들은 역사 이래 계속 있었다. 우리가 몰랐던 거지. 그런 인간들은 꼭 있는 거야.”
여러 명의 발바리가 체포됐고 꽤 높은 징역형을 받기도 하고 여직 잡히지 않는 놈도 있습니다. 며칠 전 신림동 주거침입 미수범의 CCTV를 보면서 저런 새끼들이 얼마나 많이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을까 생각하면 더럭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누가 뭐래도 남의 고통쯤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고 오히려 그 스릴을 즐기는 변태들은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미국처럼 삼진 아웃 제도 (성폭행 전과 3범이 되면 무기징역을 때려 버리는)를 도입하든지 뭔가 더 강력한 처벌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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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놈들”이라는 경찰 친구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습니다만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보다는 살다보니 그렇게 된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모두를 태생적인 괴물들로 치부해 버리는 것보다는 감감하고 아득할지언정 그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연구하는 작업도 병행되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학교에서의 교육이든, 의료적 접근이든 뭐든 말입니다. 그런 뜻에서 그날 제 발로 저를, 그리고 전문가를 찾아왔던 청년을 심도있게 취재하고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 아쉬워지기도 합니다. 당시 작가 말대로 “없는 것도 찾아 취재해야 할 사람이 왜 눈앞의 것도 외면하려 ” 들었는지 자책감도 듭니다.
오늘 그 청년은 어디에 있을까요. 귀한 자식이 왜 이런 일에 계속 연루되는지 모르겠다며 눈물 흘리던 어머니 속을 헤아려 자신도 감당 못했다는 유혹에서 해방되었을까요, 아니면 전과 몇 범이 되어 어느 교도소 찬바닥을 데우고 있을까요. 아니면 지금도 어느 으슥한 골목길에서 누군가를 쫓고 있을까요. 지금도 궁금합니다. 그는 진실로 그 유혹에 병적으로 시달렸던 것일까요, 아니면 일종의 알리바이로서 전문가와 방송사를 이용하려 했던 것일까요. 궁금한 건 한도 끝도 없는데 그에 대해 아무도, 아무것도 해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이 더욱 갑갑하면서 두려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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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을 강화하면 사라질까요? 아니 줄어들까요? 우선 강화부터 하고 보자는 데 찬성합니다. 그런데 저런 인간들은 도대체 왜 생겨나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