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아버지의 기록을 제가 정리하고 덧붙인 것이며 여기서 '나'는 제 아버지입니다... 즉 제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기초 텍스트를 쓰신 건 몇 년 전인데 지금에사 이러니 어지간히 게으른 아들입니다만... 그래도 초안이 있으니 정리는 어렵지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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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두만강을 건너가 정착한 이도구는 내 어린 시절 마지막으로 평온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흙으로 만든 토성이 감싼 마을에 육백여 가구가 모여서 살았고 그 대부분은 조선인들이고 중국인들은 소수였다. 그런데 중국인들에 대한 어머니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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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놈들이라면 치를 떠는 어머니였지만 나에게 항상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내가 너희들 커서 일본 여자 데리고 오는 건 봐도 중국 여자 데리고 오는 건 싫다.” 나쁘게 말하면 중국 여자들은 조선 여자들에 비해 게으르면서도 드셌고, 좋게 말하면 그때 중국 여성들은 조선 여성들에 비해서 가정에서 꽤 독립적이고 강력한 지위를 가졌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 남편을 하늘로 섬기라고 교육받은 조선 여성들 보기에는 안좋게 보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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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이도구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하지만 북한에 살던 시절 영민한 사업 수완으로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재산까지 장만했던 어머니는 이도구 일대에 땅을 사 놓으셨었다. 이도구로 옮기자는 결심이 선 것도 어머니가 장만한 땅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으리라. “내 땅 안 밟고 연변 못다닌다.”는 수준의 대지주는 어림도 없이 못미쳤겠지만, 근면하고 딱 부러졌던 어머니 덕에 우리 집은 이도구 근방의 비옥한 토지 몇 뙈기를 지닌 지주 겸 자작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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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구는 흡사 중세 유럽 봉건 시대의 성(城) 같았다. 낮에는 저마다 흩어져 성 밖에서 농사일 또 나뭇일도 하고 각종 생활을 하다가 저녁이면 성 안으로 들어와 잠을 잤다. 토성이 있어야 했던 이유는 마을을 덮치기 일쑤였던 마적, 비적들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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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들 형민이 “과거 비적, 마적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대개 항일 빨치산들”이라고 멋모르고 우기기에 알지도 못하고 떠든다고 나무란 적이 있다. 일본군이 토벌한 이른바 비적 가운데 항일 빨치산도 있기야 했겠지만 그보다는 피도 눈물도 없이 사람들 죽이고 재산 빼앗는 무법자들이 훨씬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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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만주는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와 비슷했다. 개척하고 개간하고 소출을 거두면 도적 같은 만주 관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몰려왔고, 서부 영화 속 인디언들처럼 (인디언들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마적들이 총칼 휘두르며 사람들의 목숨과 재산을 노렸다. 내가 이도구 살던 무렵에는 이도구가 그들에게 습격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먼발치에서 ‘행군’하는 그들을 본 적이 있다. 더럽고 남루한 옷 입은 수십 명의 무리가 가족들까지 데리고 어디론가 가던 그들을 두고 사람들은 마적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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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구의 토성 안에서 교회는 하나의 구심점이었다. 주일이면 교회는 성도들로 꽉 차고 교회의 파워가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용정에 머무르던 캐나다 선교사들, 즉 평안도 지역이나 기타 한국 선교를 담당했던 보수적 기독교단과 달리 한국 독립운동에 온정적이었고 병원부터 학교까지 많은 도움을 베풀었던 캐나다 선교사들은 일제에 의해 죄다 내쫓겼지만 그들의 선한 영향력은 교회에 대한 믿음으로 남만주 일대 곳곳에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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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구 교회는 주일마다 조선인들로 그득했고 이도구 전체 체육대회가 열리면 그 일등은 항상 교회 대표팀의 차지였다. 1등을 차지한 교회 청년들과 웃고 떠들며 환호하던 즈음은 내 유년기의 마지막 평온한 시간이었다.
아직도 학교문을 두드리기 전의 어느 날 밤이었다. 수많은 교인들이 모여서 하늘을 보면서 고함을 치며 연신 손가락질을 했다. 구름 사이에 모습을 비친 달 안에 놀라운 모습이 보인 것이다. 휘영청 밝은 달 안에 십자가 모습이 선연히 박혀 있었던 것이다. 자연 현상이 낳은 우연이겠지만 사람들은 그 자연 현상에 의미를 두고, 또 따지게 되는 법이다. 해방이 올 징조라느니 하느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는 거라느니 커다란 박해가 있을 것 같다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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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내 눈으로 달 속 십자가를 보았기에 정말 신기하다 여겼다. 하느님이 무슨 뜻으로 저걸 만드신 걸까. 결국 달 속 십자가는 역사적인 격변의 전조가 되긴 했다. 머지않아 일본이 패망한 것이다. 나야 해방이 뭔지 독립이 뭔지 울림 있게 알아챌 나이는 아니었지만 “왜놈들이 망했다.”는 건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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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소식이 전해진 교회에는 교인들이 모여들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교인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만세를 외치다가 노래를 부르다가를 반복했다. 그때 교인들이 목청을 돋워 함께 부른 노래 중 하나는 <만세반석 열린 곳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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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반석 열린 곳에 내가 숨어 있으니
원수 마귀 손 못대고 환난 풍파 없도다
만세반석 열린 곳에 내가 편히 쉬리니
나의 반석 구주 예수 나를 숨겨 주소서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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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풍파 지나도록 순풍으로 도우사
평화로운 피난처에 길이 살게 하소서
만세반석 열린 곳에 내가 편히 쉬리니
나의 반석 구주 예수 나를 숨겨 주소서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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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 흘렀다. 내 아버지만 해도 만주에서 태어났으니 함경북도 사람들이 살기 팍팍한 조선을 떠나 두만강을 건넌 것은 거의 두어 세대 전이었거니와, 경술국치 이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식민지가 된 조국을 떠나 만주로 몰려왔다.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이도 있었고 밀정도 적지 않았지만 그저 먹고 살려고 죽을 힘을 다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 잃은 백성들의 설움은 성경 속에서 앗수르에 망하고 바빌론에 끌려간 유대인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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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일본놈들’이 사람을 잡아 목을 치던 얘기를 곧잘 회고했다. “큰 칼로 사람 목을 치니 단번에 목이 떨어져 나갔어. 그런데 대체 어찌된 일인지 목 없는 몸이 픽 쓰러지는 게 아니라 팔짝팔짝 뛰는 거야. 다들 놀라서 기겁을 하는데 저 악독한 일본놈들은 담요를 싸서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지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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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꼴을 일삼아 보았던 사람들, 중국인 지주들에게 괴롭힘당하고 마적들 칼부림에 상처 입어도 호소 한 자락 할 데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해방’이란 정말로 큰 의미였으리라. ‘원수 마귀 손 못대는’ 나라, ‘환난 풍파 없는’ 시간, 그리고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만세반석이 튼튼히 놓인 시대의 출발이었으리라. 어린 나도 마냥 들떠서 노래하고 춤추며 어른들을 기쁘게 했다. 나도 좋았다.
해방 얼마 뒤였던 어느 날 나는 어머니를 따라 소학교에 입학하려 갔다. 전입학생이 차례로 교장선생님과 면담을 했는데 내 차례가 되니 교장 선생님 말씀이 엉뚱했다. “동훈이라고 했느냐. 야. 네 뒤의 학생을 한대 때려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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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 말씀의 의미를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장 선생님 말씀 아닌가. 어릴 적부터 깡다구는 있다 소리 들었던 나는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뒤로 돌았다. 뒤에는 또래 아이가 역시 영문 모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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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겁을 먹고 있었다. 주먹을 쥔 나보다는 “뒤엣 놈 때려라.”는 교장 선생님의 명령이 더 무섭고 황당했으리라. 그 표정 앞에서 나도 주먹에 힘이 풀어져서 그냥 뒤로 돌아 해 버렸다. 교장선생님이 왜 그냥 돌아서느냐고 묻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불쌍해서 못때리겠습니다.” 그러자 웃음이 터지고 좌중에서 그놈 똑똑하다며 칭찬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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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대관절 교장 선생님이 왜 그런 일을 시켰고, 무얼 시험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그때껏 살면서 처음으로 잘한 일이었다는 것은 알 것 같다. 해방 이후에 우리 가족을, 그리고 기껏 되찾았다고 생각한 나라를,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살아가던 조선인들을 덮친 것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보다 더한 폭력과 증오였다. 달 속 십자가는 길조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