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동원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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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의 이름은 우리 현대 시 역사에 드높은 봉우리라 할 만하다. 한국인의 최고 애송시라 할 ‘서시’의 윤동주가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던 사람이요, 조지훈,박목월, 박두진 청록파를 세상에 알린 이이며 자신을 ‘국보’라 일컬으며 자뻑의 최고봉을 달리던 양주동으로부터도 “예술적 기법과 감각을 지닌 시인이며 현대시단의 한 경이적 존재”라고 극찬을 들은 시인이며, 청마 유치환을 시의 세계로 인도한 장본인이며 윤동주의 스승 이양하에게는 “조선인임이 자랑스럽게 만들어준” 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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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사람을 우리는 반세기 동안 송두리째 잃어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차단당했다. 해방 공간 좌우익 칼같은 갈라섬에서 왼쪽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냈고 친일파 중심의 한민당을 성토한 경력으로 좌익으로 몰렸고 6.25 때 월북인지 납북인지 하여간 북쪽으로 간 뒤 그의 이름은 반 세기 동안 우리 사회의 금기어였다. 현대문학 교과서 한 귀퉁이에서 시 소개는 없이 이름 석 자 정도만 살짝 비쳤던 그가 별안간 내 눈 앞에 화사하게 펼쳐졌던 것은 1988년 그가 해금되고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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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로 정보사령부 군인이 기자의 허벅지를 칼로 쑤시는 한편으로 북한의 ‘피바다’가 ‘민중의 바다’라는 이름으로 출판돼 신문 광고에 실리던 기묘한 공존의 시대, 여타 많은 월북 인사들의 작품과 더불어 정지용의 이름은 역사의 심연으로부터 자맥질하며 솟아올랐고 나는 학교 앞 서점에서 그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를 보며 전율했 다. 시를 잘 모르고 그다지 즐겨 읽지도 않는 내가 그 시 하나를 선 채로 수십 번 되뇌었을 정도였으니 ‘전율’이라는 표현이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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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이 많았나보다. 며칠 전 세상을 뜬 가수 이동원도 그랬다. 그는 신촌의 운동권 서점 (ᄋᆞᆯ서림쯤 되려나, 오늘의 책이었으려나)에서 해금된 정지용 시선을 읽고 바로 노래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원래 정지용의 향수는 반세기 전, 정지용의 팬으로서 자신의 가곡 12곡 중 대부분을 정지용의 가사로 만들었던 채동선이 곡을 붙인 바 있었다. 하지만 대중들의 귀에는 쉽게 들러붙지 않았다. 이동원은 <사랑의 미로>와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작곡가 김희갑에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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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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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랑 노래, 이별 노래만 부른 사람은 아니었다. 원래는 제자의 죽음을 슬퍼하여 만든 노래이지만 한국 현대사의 파장 속에서 묘한 화학적 분위기를 이으킨 <부용산>을 처음으로 대중 음반에 실은 이가 그였다. 김근태, 노무현과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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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쩼든 향수 하나로...... 그는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고 갔다고 생각한다. 고인의 명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