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떠라.... 박두진 시인 이야기

in kr •  6 years ago  (edited)

1998년 9월 16일 박두진 시인 가다

“다음 중 청록파 시인이 아닌 것은?” 1.박두진 2. 조지훈 3. 유치환 4. 박목월. 5지선다의 수능 체제 이전 4지선다 방식의 학력고사 공부한 세대라면 한 번쯤은 접해 봤을 문제다. 물론 답은 3번이다. 청록파 시인은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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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록파란 1940년대 초 잡지 <문장>지의 추천으로 시단에 등장했고 자연을 바탕으로 한 전통적인 율감을 즐겨 사용하는 시풍으로 인해 그 이름을 얻게 됐다. 시에 대한 얘기는 이 정도로 해 두자. 워낙 시에 대한 문외한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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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인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를 더 찾자면 모두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오게 되었다는 것인데 정지용은 친일 시인과 월북 시인의 멍에를 모두 쓰고서 근 반 세기 동안 그 존재 자체가 희미해졌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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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국민 가곡처럼 부르는 <향수>의 노래 가사,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이지만 정지용은 잊혀졌었고 그의 시는 금기가 되어 분단 시대 지하를 흘렀다. 청록파의 문학적 스승(?)이 그런 팔자였으니 청록파 시인들이 죽림칠현처럼 자연만 노래하고 살기에는 우리나라 현대사가 너무 가팔랐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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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진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유복하지 못했다. 경기도 안성 사람으로 ‘고장치기’라는 이름부터 뭔가 없어 뵈는 마을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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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각별하게 지내던 누나가 있었는데 빈한한 집 살림을 돕기 위해 일찌감치 도회지로 나가 공장에서 일하다가 결핵으로 세상을 뜬다. 이후 박두진이 한 살 아래의 윤동주를 알게 됐더라면 윤동주의 시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면 일터로 간다……”를 읊으며 슬퍼했을지도 모른다.

가난과 식민의 어둠 속에서 그가 광명의 태양을 꿈꾼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대표적인 시이자 까마득한 제자 조하문이 롹음악을 붙여 만든 노래 <해야>의 가사 <해>는 읽을수록 흥이 나고 그 기세가 충만해지는 명시라고 생각한다.

“산 넘고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 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하략)

동료 조지훈은 고려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박두진은 연세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집에서는 아이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아내 무릎을 베는 다정한 남자였지만 학교에서는 꽤 꼬장꼬장하고 엄격한 교수였다고 한다.

그는 연세대생 조하문이 자신의 시를 들고 노래를 만들어 대학가요제에 나간다는 사실을 몰랐다. 집에 TV조차 두지 않았던 양반이기도 했지만 뭣보다 조하문이 결례를 한 것이다. 이 사실은 조하문의 노래를 듣다가 “선생님의 곡에 저런 시끄러운 음악을 붙이다니!”라고 격노한 학생에 의하여 박두진 교수에게 전달됐다. 조하문은 즉시 박두진 교수에게 호출됐다.

조하문의 회고다. “ 박 교수님은 우릴 점잖게 타이르셨다. ‘예전에 어느 가수가 찾아와서 시를 써 달라고 한 걸 거절한 적도 있다. 저작권이 뭔지도 모르고 교수얼굴에 먹칠을 해서 되겠느냐. 다시는 그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두손을 싹싹 빌면서 다시는 그 노래를 안 부르겠다고 말씀드렸다. 박교수님은 “다시 그 노래를 부르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으셨지만 아직까지 아무 연락이 없으신 걸 보면 포기하신 것 같다.”

하기사 어쩔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노래가 연세대학교의 대표적 응원가가 돼서 수만 명이 해야 떠라를 부르짖으며 손칼로 하늘을 가르는 광경 앞에서야 그냥 웃고 넘길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런 관대함은 그가 집안에 들였던 가정부와의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오래 있었던 가정부의 혼처는 자신이 알아보겠다며 발벗고 나섰고 예식장에 혼수감까지 모두 장만했고 예식장에 그 손을 잡고 입장해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식같은 아이인데 그렇게 해 주고 싶다.”고 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했다. 어쩌면 그는 가정부 처녀에게서 앳된 나이로 죽어간 누나의 얼굴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등산과 수석 모으기를 취미로 한 자연친화적 시인이며 가족들에게 각별히 다정했던 사람이었지만 그는 단호할 때는 단호할 줄 아는 남자였다.

김지하의 시 ‘오적’이 세상을 뒤흔들고 박정희 정권의 엉덩이를 가시로 찔렀을 때 물불 안가리고 흥분한 정권의 법정에서 박두진은 이런 의사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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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주의 문학 내지는 이적 표현물로 몰아붙인 이 작품은 문학 본래의 사명과 책임에 충실한 결과로 오히려 우리의 민주 비판적 영향의 잠재력을 과시한 좋은 표징이 된다.” 시인은 독재자의 뺨을 이렇게 때린다.

또 하나를 덧붙이자면 그는 하마터면 현직 대통령과도 교분을 가질 뻔 했다. 육영수 여사가 시를 배우고 싶으시다며 문학 선생으로 초빙했지만 박두진은 단칼에 그를 거절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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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연세대 교수직에서 퇴임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해방 후 독재정권 때문에 시는 기본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시가 자유의 추구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고별 강연에서 그는 “말의 기교”로써 시를 쓰는 시인 하나를 매섭게 비판한다. 말당 서정주였다.

아마도 그가 ‘자유’를 노래한 가장 격정적인 시는 아래에 인용된 시일 것이다. 나는 이 시를 대학 입학 후 4.18 ‘민족해방대장정’ (이름 한 번 거창하다. 별 거 아니다. 4.19 탑까지 뛰어가는 거다) 팜플렛에서 처음 봤었다.

가까이 있는 선배에게 이게 우리가 배운 청록파의 그 박두진이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김남조’와 ‘김남주’가 헛갈리던 무렵이었으니 당연히 동명이인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선배도 글쎄?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 시는 박두진의 시가 맞다. 4.19 후 격한 감동과 슬픔으로 내리쓴 시였다. 그 시를 다시 한 번 읽는 것으로 박두진을 추념해 본다.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은 아니다.

  • 박두진 -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은 아니다.
그 붉은 선혈로 나부끼는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절규를 멈춘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 피불로 외쳐 뿜는
우리들의 피외침을 멈출 수가 없다.

불길이여! 우리들의 대열이여!
그 피에 젖은 주검을 밟고 넘는
불의 노도, 불의 태풍, 혁명에의 전진이여 !
우리들 아직도
스스로도 못막는
우리들의 피 대열을 흩을 수가 없다.
혁명에의 전진을 멈출 수가 없다.

민족, 내가 사는 조국이여
우리들의 젊음들
불이여! 피여!
그 오오래 우리에게 썩어내린
악으로 불순으로 죄악으로 숨어내린
그 면면한
우리들의 핏줄 속의 썩은 것을 씻쳐 내는
그 면면한
우리들의 핏줄 속에 맑은 것을 솟쳐 내는
아, 피를 피로 씻고
불을 불로 사뤄
젊음이여! 정한 피여! 새 세대여!

너희들 일어선 게 아니냐 ?
분노한 게 아니냐?
내달린 게 아니냐?
절규한 게 아니냐?
피흘린 게 아니냐?
죽어간 게 아니냐?
아, 그 뿌리워진
림리한 붉은 피는 곱디고운 피 꽃잎
피꽃은 강을 이뤄
강물이 갈앉으면 하늘 푸르름,
혼령들은 강산 위에 햇볕살로 따수어,

아름다운 강산에 아름다운 나라를,
아름다운 나라에 아름다운 겨레를,
아름다운 겨레에 아름다운 삶을,
위해
우리들이 이루려는 민주공화국,
절대공화국

철저한 민주정체
철저한 사상의 자유
철저한 경제균등
철저한 인권평등의

우리들의 목표는 조국의 승리
우리들의 목표는 지상에서의 승리
우리들의 목표는
정의,인도,자유,평등,인간애의 승리인,
인민들의 승리인,
우리들의 혁명을 전취할 때까지

우리는 아직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들의 피외침을 멈출 수가 없다.
우리들의 피불길,
우리들의 전진을 멈출 수가 없다.
혁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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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y- this article is @sanha88’s original post. It’s not spam!! cancel your downvote

강한 애국심이 진동처럼 느껴집니다.
잘읽고 갑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