祭亡兄歌

in kr •  4 years ago 

祭亡兄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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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형제는 3남 2녀다. 아버지는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의 나이와 거의 비슷하다. 1939년생 토끼띠로 흥남철수 당시 우리 나이 열 두 살. 여동생 둘의 손을 잡고 배에 올랐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에서처럼 장남이 아니라 형이 둘 있었다는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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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목사였다. 38 이북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선 다음 목사 가족은 일제 시대 불령선인이나 남한의 빨갱이 가족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평안도만큼은 아니어도 기독교세가 꽤 강했던 함경도 일원에서 중공군에게 퇴로가 막혀 버린 흥남 부두에 모인 사람들 중 상당수는 기독교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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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으면 거의 죽을 것이 확실한’ 사람들이었다. 도망갈 때는 경황 없이 도망갔지만 돌아온 ‘빨갱이’들의 행동은 너무도 여실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 정도는 열 두 살 난 우리 아버지도 알았다. 월요일만 되면 ‘인민의 아편을 먹은 동무 나오시오’ 해서 자아비판 시키던 눈초리에 전쟁의 살기가 더해진다면 뭔 일이 벌어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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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당시 아버지 가족은 함경남도 홍원에 살고 있었다. 국군이 올라와 갑자기 제 세상이 된 (세상이 바뀌니 아버지는 학교에서 왕이 됐다) 학교에서 느긋하게 공부하던 아버지 교실에 갑자기 누군가 뛰어들었다. 교사가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둘째 형, 나에게는 둘째 큰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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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래 나오라.” 뭔 일인지 몰라 가방을 싸는 아버지에게 둘째 형이 악을 썼다. “책보 다 때려치우고 날래 나오라.” 그리고는 홍원역으로 달려갔고 홍원역에서 흥남 가는 마지막 열차를 올라탔다. 그 열차를 타지 못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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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 목사였던 할아버지는 남한에 와서도 그렇게 처세에 능하지 못하셨다. 설교를 잘하셔서 여기저기 초빙은 받았지만 교회에서 조금만 분란이 일어나도 그걸 능란하게 해결하기보다는 그냥 내 책임이니 내가 때려치우겠다 하고 나서시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덕분에 우리 아버지는 초등학교는 거제도에서 나왔고 고등학교는 대구에서 졸업하는 와중에 수십 번 전학을 다니게 된다. 그 와중에도 둘째 큰아버지는 공부를 잘하셨고 그 시절 ‘한양공대생’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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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내가 봤던 신기한 물건은 대개 둘째 큰아버지의 손을 탔다. 플라로이드 카메라를 보고 정신이 나갈 정도로 놀란 것도 그때였고 생애 처음으로 차 본 손목시계도 둘째 큰아버지의 선물이었다. 둘째 큰아버지가 사우디 등 건설 현장에서 찍어 보낸 사진은 그 자체로 새로운 지평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장남인 제일 큰아버지보다 결혼이 빨랐던 둘째 큰아버지는 3형제 가운데 가장 먼저 자식을 보았다. 외동이었다. 민(敏)자 돌림의 사촌 중 제일 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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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은 삼형제였다. 태민 정민 형민. 그리고 여동생들이 둘이었다. 여동생 둘은 이렇게 평했다. “가장 젠틀한 사람은 태민. 가장 순한 건 형민. 가장 샤프한 건 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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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네 살 차이가 나는 태민 형은 함경도 핏줄 특유의 불뚝밸은 있었으나 매우 점잖은 사람이었다. 일단 나이 차가 있으니 여러 모로 지식이든 행동이든 나와는 차이가 있었다. 거기에 외국 건설 현장을 돌던 큰아버지 덕에 외국 생활을 했으니 (그 시절에!) 그 차이가 어찌 범연했겠는가. 친형이 없는 나에게 가끔씩 만나는 사촌형의 존재는 단순한 사촌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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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형이 5학년때 보이스카웃 웃을 입고 부산에 내려왔을 때, 좁은 골목길에서 내 또래 아이들과 축구를 할 때, 형은 덩치부터 달랐지만 허물없이 같이 놀았다. 적당하게 봐 주면서 아이들이 겁내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실어 공을 찼고 짐짓 실수를 하며 아이들에게 공을 내 주면서 웃었다. 참 잘 생기기도 했었다. 청소년때까지는 ( 그 뒤는 장담 못한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느그 형 언제 오노?” 하면서 묻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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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손자 세 명 중에 한 명은 목사가 되기를 바랐다. 그 유력한 후보로 점 찍혔던 건 나였다. 할머니가 나더러 네가 제일 목사할만하다며 (뭘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신학대학 가라고 하셨으니까. (그 말씀을 들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다. 맘 먹고 사기치면 잘 쳤을 것이다. 아니면 전광훈처럼 됐을 수도 있고. 하여간 지금보단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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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그렇게 되지 않았고 목사의 가업은 끊기나 했는데 태민 형이 목사가 됐다. 원래부터 뜻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그렇게 뜻을 세우고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겠다고 했다. 내가 1991년 미국에 갔을 때 신학대학생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창 한국의 기독교에 저주를 퍼붓던 반항아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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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예수는 어린 양 한 마리를 구하려고 시련을 마다않는 사람이잖아? 근데 이 망할 놈의 기독교는 자기를 따르는 어린 양 한 마리만 천당에 보내고 아흔 아홉 마리는 자기를 안따른다고 지옥 보내는 양아치 같단 말이지. 형은 아니길 바라.”
“그렇지 않아. 예수를 믿는다는 게 주여 주여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성경에 나와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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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예수쟁이들은 안 그렇다고. 예수천당 불신지옥 그런다니까. 성경에 그런 말이 어딨어. 그런데 그 말을 서슴없이 해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건 맞지만 믿는다는 건 교회 열심히 나가는 건 아니지. 예수라는 사람을 믿는 게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믿는 거잖아.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면 구원받겠지. 근데 예수의 뜻을 거슬러 사는 사람은 댓가를 치르겠지. 예수의 뜻과 가르침은 넓고도 깊어...... 교회 나가고 안나가고의 문제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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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미국 경험은 형과 더불어 이런 논쟁을 하며 지냈던 1991년 1월이 유일하다. 그 뒤 미국에 가 본 적이 없다. 시애틀에서 LA까지 미국 서부 해안도로를 종주할 때 나는 형과 같이 있었다. 제임스 딘이 죽었던 101 고속도로도 그때 가 봤고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도 건너 봤다. 몇 달 뒷면 (로드니 킹 사건으로) 전쟁터(?)가 될 코리아 타운에서 북창동 순두부 (나는 그 이전에 다양한 순두부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를 먹었고 낮에는 괜찮지만 밤에는 모텔 밖을 나가면 안되는 헐리우드 거리의 모텔에서 묵었다. 태민 형은 그때 내 드라이버이자 길동무이자 토론자이자 사촌을 넘은 형제이자 보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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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의 간극은 넓고도 깊어서 그 이후 일상을 살면서, 또 형도 미국에서 목회를 하면서 교류할 기회는 극히 적었다. 안 보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게 인간인지라 한때 형제처럼 가까웠던 사이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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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그런 것이다. 정들면 고향이고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가장 좋은 친구지만 정 떨어지면 이방이고 멀리 있으면 천하없는 사이도 남보다 못하게 된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별안간..... 그야말로 별안간 형의 부고를 듣는다. 부모님 다 살아계신 마당에 갑자기 나이 쉰 다섯의 창창한 목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가는 데에 아무리 순서가 없다 해도 이건 너무나 무리한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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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 적었고 소식 교환도 드물었지만 막상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그저 가슴이 먹먹하고 허공에 손을 내저으며 바라볼 수 없는 어딘가를 응시할 뿐이다. 왜 이렇게 허망하게 떠났는가. 왜 이렇게 빨리 떠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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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20년 30년 먼저 가는 게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보기 힘들었던 사람 영영 못 보게 된 것이 무슨 큰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막상 집을 팔고 재산을 탕진한들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 한 켠이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그와의 추억이 머리를 두르고 맴돌다가 토성의 테처럼 굳어진다. 우리의 인연은 반 세기를 겨우 넘기고 말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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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명복을 빈다. 내 입으로 하기에는 좀 면구스러운 말이지만 ....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하시길....... 그분의 손길 아래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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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형님의 명복을 빕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