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9월 3일 호 아저씨 세상과 이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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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9월 2일 여명이 밝아오기 전의 새벽 4시. 한 깡마른 노인이 일흔 아홉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 죽음은 하루 동안 비밀에 부쳐졌다가 9월 3일 공식적으로 발표된다. 세상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알고 다양한 상념에 잠겼던 날은 1969년 9월 3일의 일이었다.
폐렴이 있었음에도 담배를 손에서 떼지 않았고, 이제 금연 좀 하시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내 나이 쯤 되면 담배의 해로움에 대한 두려움 같은 건 사라진다고." 라며 웃던 골초. 그는 그의 모국어 외에도 영어 독어 불어 중국어 러시아어 타이어 등등을 구사했던 언어적 천재였으며 인구 수천만을 지닌 나라의 최고위직에 있었지만 그가 남긴 유품은 폐타이어로 만든 신발과 안경, 그리고 낡은 타자기 정도였다. 가명이 10개도 넘었던 이 노인이 주로 불리운 이름은 호치민.
1911년 반프랑스 운동으로 퇴학을 맞은 베트남 청년은 한 프랑스 선박에 주방 견습생으로 승선, 유럽으로 건너간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식민지 청년은 꽤 성실하고 유능했다. 리츠 칼튼 호텔의 버스 보이 (식당의 허드렛 일꾼)에서 접시닦기를 거쳐 주방 일을 하다가 주방장 자리에까지 올랐던 것. 아마 그가 프랑스 요리 전문 요리사로 눌러앉았더라면 동남아시아, 나아가 2차대전 후 세계의 역사는 퍽이나 단조로와졌을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가 그의 소망대로 미국 프로야구단 입단 테스트에 합격했더라면 중남미의 역사가 얼마나 밋밋했을 것인가)
1차대전이 끝났을 때 호치민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했던 것과 비슷한 일을 했다. 양복 한 벌을 빌려 입고 클레망소나 윌슨, 로이드 조지 등을 찾아다니면서 베트남의 독립을 청원했던 것. 하지만 여지없이 퇴짜를 맞으면서 그는 급격히 공산주의로 기울어진다. 하지만 "나를 레닌에게로 이끈 건 내 애국심이다."는 말처럼 레닌 등이 제3세계 민족해방 운동에 관심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선택한 것일 뿐이었다. 스탈린이 “민족주의자와 국제주의자의 의자 중 어디에 앉겠나?”라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의자를 붙여 놓고) 두 군데 함께 앉겠다.”였다.
그는 철저한 실용주의자였다. 베트남의 독립을 보장만 해 준다면 그는 누구와도 손잡았다. 일본군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미군의 무기도 타냈고 그가 이끌던 저항군은 OSS로부터 훈련도 받았다. 장개석 휘하의 군벌이 ‘코민테른 동남아 총책’ 호지명을 잡아 죽이려 들 때, 노발대발하면서 그를 구해 준 것도 미국의 OSS 였다. 2차대전 종전 이후 다시 발을 디밀려는 프랑스와 싸우면서도 미국에 우호적인 자세를 계속 취하기도 했다. 이는 베트남 독립이라는 목표 하에 모든 것을 수렴시킨 결과였다. “독립이 우선이오. 다음 일은 다음 일이지. 다음 일이 생기려면 우선 독립을 이뤄야 되거든.”
호치민과 OSS 요원들
“이불변 응만변(以不變 應萬變)” 즉 내 안에 있는 하나의 불변으로 만변하는 세계에 대응한다는 말처럼 그는 이념을 위해 복무한 혁명가라기보다는 이념을 이용한 혁명가였다. 조급하게 서두르지도 않았고 섣부른 유토피아에 현혹되지도 않았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교의를 가질 권리가 있소. 2천년 전에 예수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했지. 그 가르침은 지금까지도 실현되지 않았잖소. 맑스주의는 언제 실현될 수 있을까? 아무도 대답할 수 없을 거요.”
남북분단 후 북베트남의 최고 지도자로 살면서 그는 으리으리한 총독궁을 사양하고 그에 딸린 정원사의 집에서 기거했다. 조금은 정책적으로 선전된 탓도 있지만 검소하고 소탈한 ‘ 호 아저씨’로서 그는 8천만 남북 베트남 인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북베트남 정부가 그의 생가 성역화를 추진하자 그는 크게 화를 내면서 말했다. “그럴 돈이 있으면 공장이나 하나 더 지으시오.” 그의 꿈은 오로지 외세가 물러난 베트남 사람들의 베트남이었고 그 꿈을 가로막는 모든 것에 단호하게 저항했다. 월남에 파견된 한국군 사령관은 사령부에서 근무하는 남베트남 타이피스트들이 스스럼없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호 아저씨”라 말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하거니와, 호치민은 그럴만한 인물이었다.
남베트남과 미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베트콩의 구정 대공세 이후 평화 회담이 시작됐다. 후일 키신저와 함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지명됐다가 거부했던 레둑토가 전쟁 상황을 보고하는 와중에 죽기 1년 전의 호 아저씨와 나눈 대화는 가슴을 울린다. 베트남에 평생을 바친 이 노인은 죽기 전에 남베트남을 보고 싶어했던 것 같다.
"남베트남으로 간다고? 나도 함께 가겠네."
"캄보디아 항구를 통과해야 하는데 비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주석님의 유명한 턱수염 때문에 금방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겁니다.."
"이 턱수염? 턱수염을 깎아버리면 될 거 아닌가."
레둑토는 어린아이처럼 보채는 호 아저씨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 그럼 남부의 우리 동포들이 주석님을 못 알아볼 것 아닙니까. "
"그럼 선원 행세를 하며 몰래 배를 탈 수도 있고, 화물칸에 숨어 갈 수도 있는데."
"알았습니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레둑토가 인사를 마치고 일어서려 하자 그만 그를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아마도 레둑토도 같이 울었을 것 같다. 지칠 줄 모르고 타올랐던 한 사람의 열정, 몸이 시들어가면서도 마치 어린 아이처럼 무지개같은 꿈을 잡으려 들던 한 노인의 주름살 앞에서 태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프린스턴 대학 박사 받았답시고 영어에는 능통했지만 한글 사용에 서툴렀던 한국의 초대 대통령보다 다섯 배의 국제 감각을 지녔고, 김구만큼이나 불굴의 의지를 발휘했으나 김구가 아쉬웠던 유연성을 가졌으며, 살아 생전 동상 수백 개를 세우고 그 권력까지 아들에게 물려준 김일성과도 차원이 달랐던 한 혁명가가 1969년 9월 3일 세상과의 이별을 고했다. 그의 말 한 마디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파릇파릇하도록 새롭다.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호치민의 사진조차 처음 봤습니다.
가치있는 포스팅에 풀봇 헌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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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베트남에 가보면 그들의 호치민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죠. 마지막 말은 가슴이 찡하네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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