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탱 원수 사형선고 받다

in kr •  6 years ago 

1945년 8월 15일 필립 패탱 사형선고

1945년 8월 15일은 프랑스의 한 법정에서는 특별한 인물에 대한 재판이 끝난다. 피고는 필립 패탱. 나찌의 괴뢰였던 비시 정부의 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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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7월 저는 프랑스 국민의 대표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았습니다. 저는 그 권력을 프랑스 국민을 보호하는 데 썼습니다. 그것은 제 명예를 스스로 더럽히는 선택이었습니다. (…) 제 목에는 언제나 칼이 들이밀어져 있었습니다. 적의 강요 앞에서 국익을 지키기 위해, 저는 갖은 애를 써야만 했습니다. 역사는 제가 여러분을 지키고자 얼마나 애썼는지 밝혀줄 것입니다.”

나이 아흔. 요양원에 들어가도 아랫목 차지가 틀림없을 고령이었다. 서 있기조차 힘들어 보였지만 백만 대군을 호령하던 장군으로서, 한때 정부의 수반으로서 위엄을 잃지 않으려 애쓰던 그의 자제력은 사형이 선고되면서 무너졌다.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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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판을 주도한 이 중의 하나이자 후일 프랑스 대통령이 되는 샤를 드골은 패탱의 이름을 따서 그 장남의 이름을 필립이라고 지은 바 있었다. 둘은 그토록 절친한 선후배이면서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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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저 사람은 너무 오래 살아서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는구나 혀를 차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데 정확히 페탱이 그랬다. 패탱은 지나치게 장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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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이전에 숨을 거뒀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프랑스의 영웅들이 묻히는 팡테옹의 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1차대전 당시 독일 군과 프랑스 군 양쪽을 합쳐 120만여 명이 죽어나갔던 베르됭 전투에서 페탱은 강철 같은 의지로 독일군을 물리치고 전쟁 영웅이 된 사람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국민들의 사랑은 그치지 않아 “프랑스의 원수” 칭호와 함께 일곱 개의 별이 박힌 지휘봉까지 선사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기갑 부대를 앞세운 독일의 전격전에 프랑스는 지리멸렬 무너졌고 정부도 붕괴됐다. 그 와중에 불려나온 것이 패탱이었다. 프랑스 전역이 나찌에 점령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상태에서 그는 “현실을 인정한 최선”을 찾았고 드골은 “최후까지 항쟁”을 선언하며 영국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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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원수(元帥)”는 나찌의 괴뢰 정부 수반이 된다. 패탱은 자신의 선택이 프랑스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라 여겼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 프랑스인들도 많았다. 남프랑스 비시에서 열린 프랑스 제3공화국 마지막 국회는 패탱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고 전권을 부여한다. 그는 프랑스 영토의 40퍼센트를 2년 동안 다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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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막강한 영향력을 부인할 수는 없었지만 페탱은 나름대로 자신의 정부의 독립성과 프랑스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테면 독일군 몇 명이 레지스탕스에 살해되고 나찌가 억류 중인 프랑스군 100명을 죽이겠다고 통보했을 때, 페탱은 격노하여 부르짖는다. “나를 먼저 죽여라.”

하지만 프랑스가 무너진 이유가 인민전선 정부 등 좌파들의 비애국적 준동과 민주주의라는 미명의 혼란 때문이라고 여겼던 패탱은 그가 다스린 땅 안에서 집회 결사의 자유를 엄격히 통제하고, ‘합법적인’ 통치에 거역하는 행위를 용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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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프랑스의 일부를 구한 구원자로서 프라이드를 가졌으나 그 일부의 영토에서 유태인들을 솎아냈으며 자신의 손으로 ‘불법적’ 레지스탕스들을 잡아내어 게슈타포에 넘겼다. 그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조선인 천재 작가 이광수의 변명을 빌리면 페탱은 “민족을 위해 친독”한 셈이었으나 그의 친독은 결국 프랑스의 가치를 망가뜨렸고, 프랑스의 '생존'의 핑계 속에 인간 존엄의 가치는 가사상태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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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탱은 끝까지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저를 단죄하시려거든, 그것이 마지막 단죄이게 하십시오. 어떤 프랑스인도 합법적인 지도자의 지시를 따랐다는 이유로 구속되거나 범죄자 취급을 받지 않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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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호소가 절절했으되 감동적이지 못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고수한 ‘합법성’과 그가 사랑한 ‘프랑스’가 어떻게 프랑스의 정의를 무너뜨리고 전후로도 수십 년 동안 프랑스인들의 양심을 짓누르는 바윗돌이 되었는지를 그는 가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이광수가 자신의 민족의 이름을 어떻게 참수하고, 한때 자신을 추앙하던 조선인들의 가슴에 얼마나 날카로운 비수를 꽂았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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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4일 패탱의 이름을 딴 마지막 거리가 프랑스에서 사라졌다. 1차 대전 이후 수백 개의 거리에 ‘패탱 가’가 붙여졌었지만 2차대전 후 싹 교체되었고 단 하나 남은 페탱 거리가 그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인구 100명의 시골 트랑블루아-레 카리냥의 주민들은 패탱의 행적이 문제가 있긴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불러온 거리 이름을 굳이 바꿔야 하느냐며 떨떠름해했지만 그 이름을 지우자는 압력이 더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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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기게도 자신의 흔적이 지워져가는 조국을 바라보면서 저승의 ‘프랑스의 원수(元帥)’ 패탱은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프랑스가 아니라 한국같은 나라에서 태어날 것을! 그러면 아직도 내 동상을 세우자고 할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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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때 조국을 구한 장군으로서의 긍지를 평생 간직했던 그는 아마도 생각을 바꿀 것 같다. “아니야. 그런 나라에서 태어나느니 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프랑스를 나는 사랑한다,”

그가 사형선고를 받은 8월 15일은 우리의 광복절이었다. 우리에게 페탱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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